"아프면 밥그릇 끊겨…" 택배사장들의 비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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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행 당한 용인 택배기사 6일 만에 배달 시작
특고직 "아파도 달린다"…갑질 당해도 '보호망' 없어
업계 "개인사업자라 대응책 마련 어려워"
처우 개선 담긴 '생활물류법' 20대 국회 처리 불발
"소비자 신고·처벌, 택배기사 포함돼야"

지난 7일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의 한 아파트에서 A씨 형제를 폭행하는 아마추어 복싱 선수 출신의 한 입주민 모습과 이후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A씨의 동생 얼굴이다.(사진=제보자 제공)

 

아파트 입주민으로부터 "마스크를 제대로 안 썼다"는 이유로 구타를 당한 '용인 택배형제 폭행 사건'. 택배기사 A(30)씨는 갈비뼈에 금이 가고 눈을 다쳐 4주 진단을 받았지만, 6일 만에 운전대를 다시 잡아야 했다.

그는 26일 CBS 노컷뉴스에 "너무 오래 구역을 비우면 밥줄이 끊길 수도 있다"며 "내 처지에서는 다쳤어도 일에서 손을 놓을 수 없다"고 말했다.

◇ 대리점 눈치 보여…아플 시간 없는 '택배사장'

"택배기사는 아플 시간도 없어요."

대부분의 택배기사들이 겪는 현실이다. 경기도 김포의 2년차 택배기사인 40대 남성 이모씨는 "허리 치료를 받고 싶어도 병원을 자주 갈 수 없어 증상이 악화됐다"고 했다.

이씨는 "하루만 쉬어도 대리점에 짐이 되기 때문에 눈치가 보여 쉴 수가 없다"며 "정 안되면 가족이나 친척에게 일을 부탁하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그가 일을 쉬면 대리점은 '용차'로 불리는 배달차를 부른다. 건당 배달료가 1500원으로 택배기사들이 받는 830원보다 2배 가까이 차이가 나 점주들이 내켜하지 않는다는 것.

더욱이 개인사업자가 많은 택배기사들은 대리점과 1년마다 위탁계약을 갱신하기 때문에 계약해지 걱정으로 마음대로 쉴 수가 없다.

이처럼 대리점주에게 철저하게 '을'일 수밖에 없는 택배기사들은 본 업무인 배송 외에도 물품 분류 업무까지 강요 아닌 강요를 받고 있다. 분류작업은 택배기사들에게 이른바 '공짜노동'으로 불린다.

대전지역의 한 택배기사는 "따로 수당도 못 받는 분류작업을 오전 내내 하고 나면 오후가 돼서야 배송을 시작한다"며 "차에서 김밥 먹고 뛰어도 밤 10시는 기본"이라고 고된 업무 환경을 토로했다.

◇ 근로자 아닌 근로자 '특고직'…폭행에도 '보호망' 없어

(사진=스마트이미지 제공/자료사진)

 

한국교통연구원 등에 따르면, 택배기사들은 지난 2017년 기준으로 평균 한 달에 25.6일, 하루 12시간 넘게 일한 것으로 나타났다. 성수기에는 근무시간이 14시간까지 늘었다.

개인용달 등 다른 유사 운송업과 비교하면 평균 2시간 이상 길다. 지난 4일 광주광역시에서 한 택배기사가 한 달에 1만개 넘게 배달하다 숨진 사건도 택배기사들의 과도한 노동강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전국 택배기사의 92% 이상은 대리점 등과 '근로계약'이 아닌 '위탁계약'을 맺은 개인사업자들이다. 이들은 주 수입으로 택배업체로부터 배달 수수료를 받는다.

노동 형태는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와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대부분 택배기사는 사업주와 개인간 도급계약으로 일하는 특수고용직(이하 특고직)으로 분류된다.

근로기준법 적용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택배기사는 유급휴가가 없고, 고용보험 가입 대상도 아니다. 노동자처럼 일하면서 노동자로서의 권리는 없는 셈이다.

택배 형제들이 입주민의 폭행에 아무런 맞대응을 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대리점주나 고객들에게 항상 '을'일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이들을 보호해줄 보호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택배업계와 전국택배연대노동조합 등에 따르면, 대부분 택배업체들은 고객의 부당한 대우에 대한 택배기사들의 대응 매뉴얼이나 피해 구제책 등을 갖고 있지 않다.

한 택배업체 관계자는 "하도급법과 파견근로자법 등을 준수해야 되기 때문에 직영 기사가 아닌 이상 모든 택배기사들을 대상으로 별도 근무 규정을 둘 수 없다"고 말했다.

이에 전국택배연대노동조합은 "사측이 기사들을 보호하는 데 소극적"이라며 "고객 민원만 강조해 기사에게 벌점 매기는 데만 혈안인 상황에서 택배기사들은 고객들의 갑질에 참고 당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고 꼬집었다.

◇ 처우 개선 위한 '생활물류법' 재발의 추진…갑질 대책 관건

이처럼 열악한 택배기사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지난해 '생활물류서비스산업발전법(이하 생물법)' 제정이 추진됐다. 하지만 거듭된 국회 파행에 이어 야당과 대형 택배업체들의 반대로 빛도 보지 못하고 소각됐다.

야당과 사측은 신생 배송업체 포함 여부와 기존 위탁계약(업체-택배기사) 관계에서의 공정거래법 위반 가능성 등을 이유로 법 제정을 반대했다.

생물법은 6년간 계약(고용) 보장과 산재보험 적용, 배송과 분류 업무 구분, 휴식 시간과 공간 보장 등의 내용을 담고 있어 택배기사의 근무 처우를 개선하기 위한 핵심 방안으로 꼽힌다.

법안을 대표발의 했던 박홍근 의원은 "국토교통부와 사측 등과 의견을 조율해 개선된 내용으로 제정안을 다시 제출할 예정"이라며 21대 국회에서 재발의 의지를 분명히 했다.

또 정부는 특고직에 대한 고용보험 확대 대상에 내년부터 택배기사를 포함시키기로 했다. 이들의 고용 불안정성이 어느 정도 해소될지 주목된다.

고객의 갑질이나 괴롭힘 등에 대해서는 별도 처벌 규정을 촉구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최근 직장 내 제3자에 의한 괴롭힘으로부터 근로자를 보호하는 조치가 필요하다는 권고안을 내놨고, 대상을 택배기사 같은 특고직으로 넓혀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한국노동연구원 허재준 선임연구위원은 "일부 근로자에게만 갑질 처벌 규정을 적용할 게 아니라 고객과 자주 접촉하는 택배기사들도 제도적 장치를 통해 보호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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