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엔 '여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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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운동 당시 활동했던 여성 3인방 인터뷰
'구속자 가족 협회' 만들었던 노영숙씨
"동생 찾으러 금남로 나갔다가 투쟁에 참여"
초기 가두방송 주도했던 차명숙씨
"19일부터 21일까지 가두방송 진행해…가혹행위 당하기도"
마지막 새벽 도청방송의 주인공 박영순씨
"재심 청구해 무죄 받아내…진상규명 바람"

(사진=5.18기념재단 제공)
사람들이 기억하는 5·18의 얼굴은 어떨까. 그동안 주목하지 못한 면면속에는 그날의 비극을 같이 했던 '여성'도 있을 것이다. 여성들은 주먹밥을 만들고, 시신에 염을 하고, 가두방송을 하며 힘을 보탰다.

CBS노컷뉴스는 5·18 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아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연인이 아닌 그날 '운동가'로서의 여성을 조명한다.

◇"우리는 광주 가족입니다" 금남로에서 명동성당까지, 노영숙씨

노영숙(66)씨는 동생이 걱정되어 거리로 나섰다가 광주의 참상을 봤다. 노영숙씨의 동생은 1978년 전남대 교육지표사건 당시 교수들이 구속된 데 항의 시위를 벌이다 고초를 겪었던 故노준현씨다.

노씨는 1980년 5월 18일 금남로거리를 '아수라장'으로 기억한다. 공수부대는 젊은이들을 쫓아가 막무가내로 무릎 꿇리고 폭행했다. 노씨는 "처음엔 두렵고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다"며 "이후에는 그것도 사라지고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만 남았다"고 회상했다.

동생을 찾지는 못했지만, 분노한 노씨는 광주에 힘이 되기로 결심했다. 처음에는 김밥을 쌌지만, 상황이 급박해지면서 이후에는 주먹밥을 쌌다. 21과 22일에는 시민군에게 먹거리를 전달하기 위해 직접 도청 안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광주는 27일 계엄군에 진압됐다. 노씨는 당시 "패배감이 너무 심했다"라면서 "많은 시민이 죽었는데, 언론에는 '광주에서 폭도들이 난리를 일으켜 소탕했다'라는 보도가 나갔다"라고 말했다. 설상가상으로 동생까지 잠복 경찰에 잡혀 상무대 영창에 감금됐다.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던 노씨는 연대를 결심했다. 같은 처지에 있던 사람들과 '구속자 가족 협회'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전남대 명노근 영문과 교수의 아내 안성례씨와 당시 전남대 복학생이었던 정동년씨의 아내 이명자씨 등 남편이나 가족이 구속된 여성들이 주로 모였다. 남성들이 양지에서 활동하기엔 서슬퍼런 시기였다.

"81년 3월에 명동성당을 점거하고 김수환 추기경님을 만나기도 했어요. 배용주, 정동년씨 등 3명에게 사형이 선고되는 걸 막기 위해서였죠. 5·18이 정말 빨갱이들이 일으킨 것도 아니고 무고한 시민들이 많이 죽었는데 사형만은 막아야겠다 싶었어요." 광주 가족들의 점거 소식은 청와대까지 전해졌고 3명에 대한 사형은 결국 철회됐다.

노씨는 5·18 당시 '여성들의 자발적 참여'가 있었다고 강조했다. 노씨는 "사회운동을 하겠다는 마음은 없었어도, 당시의 만행을 보고 많은 여성이 순수하고 정의로운 마음으로 참여했다"며 "추모 리본을 만든다든지, 취사를 한다든지 기본적인 것들을 많이 하셨다"고 덧붙였다.

1980년 9월12일 광주 상무대의 군사법정에 나온 차명숙씨. (사진=차명숙씨 제공)
◇초기 가두방송 이끌었던 차명숙씨 "그때 그 사람들을 기다립니다"

차명숙(60)씨는 가두방송을 한 인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만 19살이었던 차씨는 19일 오후 처음 마이크를 잡았다고 회상했다.

"제가 방송이란 걸 알겠어요? 처음엔 써준 쪽지를 일단 읽었어요. 그런데 한 12시간쯤 지나니까 쪽지가 필요 없어졌어요. 그저 본 상황을 말할 수밖에 없었지요." 차씨는 21일까지 "당신의 아들딸들이 다 죽어가고 있다. 빨리 나와서 광주를 지키자"는 방송을 했다.

기관은 당시 차씨가 '간첩'이라는 소문을 냈다. 차씨는 "말을 너무 잘하니까, 심지어 시민군들 사이에서도 제가 간첩이라는 말이 돌았다"며 "당시 광주에 50명 정도 저격수가 내려와 있었는데, 저를 총으로 겨누려 하다가 너무 어려서 못 쐈다는 이야기도 훗날 전해 들었다"고 말했다.

23일 광주기독병원에서 연행된 차씨는 505보안대와 상무대 영창을 거쳐 광산경찰서, 광주교도소로 끌려다니며 모진 고문을 받았다. 차씨는 "형을 받고 수감된 광주교도소에서는 25cm 쇠줄에 수갑을 연결하는 혁시갑을 찬 채 징벌방에 갇히기도 했다"고 토로했다. 차씨는 이러한 가혹행위를 지난 2018년 기자회견을 통해 폭로하기도 했다.

차씨의 가두방송 이후로 광주 거리에는 많은 여성이 뛰쳐나왔다. 차씨는 "제가 마지막까지 방송했던 21일 이후 많은 여성분이 나와 방송을 했다"며 "환자들이 쏟아지니까, 헌혈을 호소하고, 관이 필요하다 솜이 필요하다 도와달라 이런 방송을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방송을 하면 숨고, 방송을 하면 숨는 그런 시기가 27일까지 계속됐다"며 "잡혀가서 고초를 겪진 않으셨더라도 같이 활동했던 여성분들이 다 나오셨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차씨의 요즘 관심사 중 하나는 '트라우마 극복'이다. 5·18의 상징이 되어버린 차씨를 찾아오는 '그때 그 사람들'은 많지만, 그들의 얼굴을 두 번 보기는 쉽지 않다.

"머리가 희끗희끗해져서 찾아오더니 그래요. 초등학교 6학년 때 누나 방송할 때 쫓아다니다 계엄군을 만나서 리어카 밑에 숨도 안 쉬고 숨어있었다고…" 차씨는 "저를 보고는 다시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 트라우마에 갇히는가 보다"며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 자리에서 그들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라고 담담히 말했다.

1979년 호남예술제 시상식에 지도 학생들과 함께 참여한 젊은날의 박영순씨. (사진=박영순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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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말아주세요" 마지막 새벽 방송의 주인공, 박영순씨

"광주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모두 도청으로 나오셔서 계엄군의 총칼에 죽어가고 있는 학생, 시민들을 살려주십시오. 우리 형제, 자매들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우리는 도청을 끝까지 사수할 것입니다."

박영순(61)씨는 광주가 계엄군에 진압되던 27일 새벽, 전남도청에서 마지막 새벽방송을 진행했다. 당시 시민학생투쟁위원회 위원장이던 김종배씨가 원고를 써서 넘겼고, 박씨는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숨기며 원고를 3번쯤 읽었다. 원고를 들킬까 봐 입에 넣고 삼킬 무렵, 계엄군이 들이닥쳤고 박씨는 기억을 잃었다.


박씨 역시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이후 계엄법 위반과 내란부화수행 혐의로 1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가 6개월 만에 형 집행 정지로 풀려났다.

'유죄'라는 꼬리표는 내내 박씨를 따라다녔다. 박씨는 "여자로서 징역형을 받은 데다가 5·18 폭도가 되어버린 것"이라며 "이후 사회생활은커녕 졸업반이던 학교도 졸업할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박씨는 이후 '박수현'이라는 가명으로 내내 숨어살았다.

박씨의 한은 35년이 지나서야 풀렸다. 2015년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것이다. 과거 판결은 박씨의 행위를 '헌정질서를 파괴하는 범죄'로 봤지만, 재심 판결은 같은 행위를 자유민주주의, 국민의 기본권 보장 등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라고 해석했다.

박씨는 지난해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박씨는 "그때 제가 문재인 대통령께 쪽지를 드렸다"며 "트라우마나,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는 5·18 당사자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 짤막하게 말씀을 드렸다"고 설명했다.

이어 "우리 유공자들이 마치 연금이나 배상을 엄청나게 받은 것처럼 왜곡이 되는 걸 듣고 있으면 너무 가슴이 아프다"고 덧붙였다.

예순의 나이를 넘긴 박씨의 바람은 하나다. 5·18에 대한 왜곡을 멈춰지고 진상이 규명되는 것. "올해 진상조사위가 출범하기도 했으니, 왜 광주에 와서 그런 잔인한 폭력과 총질을 했는지 부디 규명이 됐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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