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현지의 코피노들(사진=탁틴내일 제공/자료사진)
필리핀에서 현지 여성과 맺은 관계로 아이가 태어났으나 잠적하고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은 한국인 남성들에 대해 경찰이 처음으로 수사에 나섰다. 필리핀 여성과 한국인 남성 사이에서 태어난 '코피노'는 약 4만명으로 추산된다.
친부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남성들은 필리핀에 남겨진 엄마와 아이의 삶을 고통으로 밀어넣었다. 민사소송을 제기해도 나아지지 않는 현실에 코피노 친부들에게 '아동학대' 혐의를 적용해 처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경찰, 코피노 친부들 '첫' 수사 나섰다서울지방경찰청 여성청소년과는 지난해 12월 국내 법무법인이 필리핀 여성들을 대리해 고소한 한국인 남성 5명을 입건해 수사 중이다.
A씨 등 남성 5명은 아동복지법 위반(아동 유기·방임) 혐의를 받는다. 이들은 필리핀 여성과의 사이에서 낳은 친자에게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는 등 친부로서의 책임을 지지 않고 아동을 유기·방임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은 피의자 소재지에 따라 일선 경찰서에 사건을 이송했다. 이 가운데 2건은 불기소 처분됐고 나머지 3건에 대한 수사를 이어가고 있다.
경찰 조사에서 자신이 친부임을 인정하고 "이제부터라도 책임지고 양육비를 지급하겠다"고 약속한 남성도 있었지만, "친자일 리 없다"며 "술집에서 잠깐 만난 여자일 뿐, 동거한 적 없다"고 부인한 이들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배드파더스' 홈페이지 캡처)
◇유전자 검사 거부하자 영장 신청했지만…검찰 '불청구'
변호인과 경찰이 특히 주목하고 있는 사건은 '쌍둥이 코피노'다. 필리핀 여성 B씨는 2010년 필리핀에서 한국인 남성 A씨와 만나 쌍둥이 딸들을 낳았다. A씨는 아이가 생후 7개월 때까지는 함께 살며 매달 26만원 가량의 생활비를 지급하다가, 돌연 연락을 끊었다. "한국에 있는 아내가 알아챘다"는 게 이유였다.
그렇게 10년이 흘러 B씨는 필리핀에서 홀로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 아이 아빠가 사줬던 가구를 하나씩 내다 팔아 생활비를 마련했다. 집과 멀리 떨어져 있는 공장에서 하루 꼬박 일해도 손에 쥐는 일당은 1만원이 채 되지 않는다. 지난 1월에는 화산 폭발로 피해를 크게 입어 살던 곳을 나와 임시로 거처를 옮겼다.
부산진경찰서는 A씨를 아동복지법 위반(아동 유기·방임) 혐의로 입건했다. A씨는 경찰조사에서 자신이 친부임을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A씨는 유전자 검사도 거부한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은 친부임을 밝히기 위해서는 검사가 필요하다는 판단 하에 검찰에 A씨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신청했지만 지난 9일 반려됐다.
검찰은 쌍둥이 코피노가 교육·경제 등 여러 측면에서 방임돼 왔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입증할 자료를 추가 확보하라고 경찰에 지휘한 것으로 파악됐다.
검찰은 코피노 친부를 아동복지법 위반 혐의로 형사처벌한 전례가 없는 만큼 영장 청구를 고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이 수사에 착수한 5건 가운데 검찰이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불기소 처분한 건과 관련해, 검찰은 "양육비 미지급을 이유로 아동복지법상 유기·방임 행위로 처벌한 사례는 없다"고 검토 의견을 밝혔다.
◇"학대 문제로 접근해 강경 대응해야"
탁틴내일 등 필리핀 여성을 지원하는 단체들은 아이를 현지에 두고 잠적한 채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은 건 '아동 학대' 행위라며 강경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코피노 엄마'들이 친부인 한국인 남성들을 형사고소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동안 여성들은 가정법원에 인지청구·양육비 청구 소송 등을 제기했다. 하지만 양육비 지급 이행 명령에 따르지 않는 남성들이 많다고 변호인들은 지적했다.
고소인들을 대리해 소송에 나선 법무법인 온세상 김재련 변호사는 "양육비 지급 이행 명령을 위반하면 프랑스 등은 징역형까지 부과하지만, 한국은 직접적으로 형사처벌하는 규정을 두고 있지 않다"고 꼬집었다. 이어 "아동학대 혐의가 인정돼 기소된다면 사회적으로 큰 의미가 있을 것"이라며 "양육비를 지급하는 등 조정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유전자 검사를 거부한 남성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이 반려된 것을 두고는 "불구속 상태에서 조사를 받고 있는 만큼 영장을 청구해 친부 확인에 필요한 검사를 하도록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코피노 엄마들은 "아이들이 아빠가 누구냐고 물어보면 누구인지 이야기해줄 수 없어 마음이 아프다"며 "양육비 지급도 중요하지만, 친부 확인이 돼서 우리 아이도 아빠 이름을 알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