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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속 인물 나 맞다고요"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가 고소를 포기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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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번방, 그후②]쏟아지는 신종 디지털 성범죄 은어·단축어…기존 매뉴얼 못 따라가
"상담은 이쪽, 삭제는 저쪽, 피해자가 직접 채증…매시간 성폭행당하는 느낌"

(사진=연합뉴스)

 

'텔레그램 n번방' 사건으로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실질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n번방 이전에 수많은 n번방이 있었고, 많은 피해자가 근본적인 대책을 요청했지만,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관심과 현실적인 지원은 너무나 미흡했다"며 고충을 토로했다.

피해자 구제 속도는 불법 촬영물의 복제유포 속도를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고, "네가 동의한 것 아니냐"는 시선은 피해자를 고립시켰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 단순 호기심, 관전이란 명목으로 26만 명이 n번방을 드나들었다. 성인 여성뿐만 아니라 수많은 미성년자의 일상은 완전히 짓밟혔다.

◇ 쏟아지는 신종 디지털 성범죄, 은어·단축어…기존 매뉴얼이 따라가지 못해

여성가족부의 '디지털 성범죄 예방 및 피해자 지원체계 발전방안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디지털 성범죄 지원센터를 비롯한 국내 성폭력 상담소 등 관계 기관은 저마다 디지털 성범죄 지원에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기존 공문이나 응대 매뉴얼은, 매일같이 쏟아지는 신종 디지털 범죄 유형을 반영하지 못해 어려움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예를 들어 인터넷BJ 벗방 등 기존 디지털 성범죄 사례와 다른 유형의 피해자 지원을 위한 공문 작성 시, 기존 공문 형태를 활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A 상담소는 "벗방처럼 영상을 띄어놓고 채팅을 하거나, 채팅 말고 목소리만으로 말하면서 하는 게임이 있는데 피해자가 삭제해 달라고 링크를 보내더라도, 기존 유형화된 몸캠 피해나 유포 협박 이런 것들이 아니면, 계속 새로운 공문이나 지원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제는 어떤 공문을 보내야 하나 상의하고, 공문을 주고받는 순간에도 복제와 유포는 끝없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또 아동·청소년 디지털 성범죄의 경우엔, 보통 어른들은 도무지 알 수 없는 10대들만의 새로운 용어가 나날이 등장하는 것도 범죄 적발이나 예방에 즉각적으로 대응하기 힘든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웹하드나 SNS 등에서 특정 키워드로 검색해도 여성이나 성범죄를 지칭하는 은어·단축어·온라인 신조어, 새로운 웹사이트나 디지털 기술 언급하는 키워드가 나오다 보니, 성인인 상담사나 센터직원이 이를 이해하고 피해 지원을 설계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사진=연합뉴스)

 

◇ 유포자는 24시간이 없는데 상담소, 주중 운영…상담은 이쪽, 삭제는 저쪽 '고통↑'

불법 촬영물 유포 피해자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 시급한 삭제가 급선무다. 그러나 한국 정책연구원의 조사 결과, 대부분 상담소는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지원센터를 알려주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연구원이 심층 면접을 진행한 B 상담소에서는 "유포자들은 24시간이 없고, 주말도 없다"면서 "하지만 대다수 성범죄 상담소나 센터는 평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운영되고 주말엔 열지도 않는다"고 현실적인 어려움을 쏟아냈다.

여성긴급전화 1366은 24시간 운영하긴 하지만 피해자들이 가장 원하는 유포물 삭제는, 늦은밤 신고했다면 다음 날 담당자가 오기만을 기다려야 하고, 지역 상담소나 경찰서 등 연계 기관 간 공문을 주고받느라 시간을 또 허비하게 된다. 가해자 고소나 삭제를 위해 피해자 본인이 직접 수사 기관에 가서 채증하기도 하는데 이러는 동안에도 피해자는 발을 동동 구르고만 있던 셈이다.

B 상담소 관계자는 "신고 접수 뒤 대리 삭제 동의서를 빨리 수령해 삭제에 들어가면, 하루 이틀 만에 삭제됐을 때 유포 범위가 훨씬 줄어들었다"면서 "유포가 확실한 내담자에 한해서는 지원센터뿐만 아니라 일반 상담소에서도 삭제만이라도 빨리 진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상담의 정의와 삭제 지원업무의 정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남아있다. 지역의 한 상담소는 "유포 방지는 시간 싸움인 만큼 영상이 한시라도 빨리 삭제돼야 하는데, 상담은 이쪽에서 받고 삭제는 저쪽에서 하라는 건 현실적이지 않다"면서도 "삭제 지원은 기술적인 요소가 필요한 터라 상담과 삭제의 분리 가능성에 고민이 깊다"고 전했다.

급증하는 피해자 규모보다 턱없이 부족한 인력의 한계도 여전하다. C 센터는 "1366이든 상담소든 '사이버'나 '인터넷'만 붙으면 일단 전화가 온다"면서 "손가락으로 꼽는 상담원들이 밀려오는 전화를 받다 보면 빨리 영상을 삭제해야 하는 유포 피해자는 밀릴 수밖에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사진=연합뉴스)

 

◇ "겨우 다리 사진 가지고", "영상 속에 얼굴 안 보이는데?" 2차 가해에 주저앉는 피해자

디지털 성범죄의 경우, 수사 지원에 대한 피해자 태도에 따라 연계되는 지원기관이 다르다. 피해자가 불법 촬영물 삭제와 가해자 처벌까지 원한다면 수사기관으로, 단순 삭제만 희망한다면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센터로 연계한다.

그러나 상당수 피해자는 수사기관 연계가 아닌 단순 삭제만을 희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다른 범죄와는 달리 디지털 성범죄의 경우 '피해 사실을 증명하는 수사 과정에서 2차 피해가 발생하기 때문'이라고 상담사들은 입을 모은다.

나무여성인권상담소 이희정 지지동반자는 "피해자에겐 본인이 직접 자신이 나오는 영상물을 찾는 것만으로도 버거운데, 수사 담당자들을 마주하고 사진이나 영상에 나오는 인물이 본인이라는 걸 증명해야 한다"며 "본인이 자기가 맞다고 소리쳐도 제 3자가 보기에 아닌 것 같으면 피해자는 그냥 돌아가야 한다"며 고충을 털어놨다.

A 상담소 관계자도 "이런 상황을 겪은 내담자가 '내 영상 찾고 나라는 걸 증명하다 보면 매시간 강간당하는 느낌이라고 호소했다'"며 "상담사한테도 이게 가장 힘든 부분"이라고 말했다.

채증 과정 전부터 2차 피해는 비일비재하다. "겨우 다리 사진 가지고 뭘", "얼굴도 안 나왔네", "네 다리인지 엉덩이인지 몰라" 같은 사건의 사소화와 "네가 동의해서 찍은 것 아니냐, 네가 먼저 주지 않았냐" 라는 식의 피해자 유발론 등이 피해자를 절망으로 빠뜨리는 것이다. "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느낀 피해자들이 수사 기관으로부터 발걸음이 멀어질수록 가해자는 또 다른 피해자를 찾고, 끝없이 범죄를 반복하는 셈이다.

서울시 여성정책담당관 김지현 주무관은 "절대 피해자들의 잘못이 아니고, 어린 친구들을 이용하는 가해자들의 잘못"이라면서 "디지털 성범죄 피해를 보더라도 네 잘못이 아니라는 걸 주변에서 끊임없이 인지시켜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울러, "서울시에서 수사 과정 도중 2차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지지동반자 서비스를 진행하고 있다"면서 "전화만 주면 피해자가 원하는 곳으로 찾아가 도움을 준다"면서 "다른 지역이라도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 주저하지 말고 연락을 달라"고 당부했다.

이희정 지지동반자는 "피해자는 피해자일 뿐"이라면서 "피해자를 지원하는 사람들이 많고, 본인이 중심에서 일을 해결하다 보면, 본인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면서 "필요한 부분 지원받고 같이 해결해나가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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