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 혁신 기술이 모이는 CES는 또다른 이유로 올해 주목을 받고 있다. '기술인가 외설인가'를 두고 최근 몇년 사이 논쟁을 불러일으킨 섹스토이 업체들이 TV, 로봇, 인공지능, 자율주행, 사물인터넷, 5G로 가득한 CES 2020 전시장 한 켠 웰빙 및 웰니스 구역에 둥지를 틀었다.
작년 CES 2019에서 혁신상을 수상했다 박탈당한 뒤 4개월 만에 다시 수상하는 우여곡절을 겪은 로라 디카를로의 여성용 바이브레이터 'Osé'. 로라 디카를로는 CES 2020에 신형 모델을 출시해 2년 연속 혁신상을 수상했다.
데임(Dame), 러브센스(Lovense), 오미보드(Ohmibod), 펄스(Pulse), 미스터리바이브(MysteryVibe) 등 12개 섹스토이 기술 회사들은 CES 주최측인 소비자기술협회(CTA)가 정한 금기를 깨고 이번 전시회 당당히 명함을 내밀었다.
작년 CES 2019에 여성용 바이브레이터 'Osé'를 출품한 로라 디카를로(Lora DiCarlo)는 드론 및 로봇 분야에서 CES 혁신상을 수상했지만 선정성 논란이 일자 CTA가 혁신상을 취소한 사건이 발단이 됐다.
당시 CTA는 "CTA의 이미지에 부적합하거나 부도덕하거나 외설적이거나 불경스러운 것으로 간주되는 참가자는 실격될 것"이라며 로라 디카를로에 수여한 혁신상을 취소하고 섹스토이 회사의 향후 CES 참가를 불허할 것이라는 입장을 내놨다.
로라 디카를로는 이를 '명백한 성차별'이라고 항의하며 VR 포르노와 남성용 섹스 로봇이 과거에 CES에서 버젓이 전시돼왔다고 비판했다. 유명 보컬그룹과 여성계, 인권단체의 비난도 쏟아졌다.
이 회사는 혁신상까지 취소되는 불명예를 얻었지만 해당 제품은 날개돋힌 듯 팔려나갔다. 작년 12월 Osé 사전판매로 1만여대가 팔려나가 300만달러(약 34억7천만원) 이상의 매출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졌다.
성차별 논란에 직면한 CTA는 4개월 만에 혁신상 취소를 번복하고 상을 돌려줬다. 섹스 테크 회사들이 CES 건강 및 웰니스 카테고리에 참가할 수 있도록 개방한다는 방침도 밝혔다.
공식 논평을 통해 "CES 2019 이후 CTA는 내부적으로, 그리고 외부 자문단과 몇가지 중요한 대화를 시작했다"며 "CES 2020에 기술기반 섹스 테크놀러지 제품을 시험적으로 포함시키는 것을 허용하기로 했다. 매년 해왔던 것처럼 올해 CES 2020 이후에도 포함될지 여부는 표준정책과 절차에 따라 정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CTA의 마케팅 및 커뮤니케이션 담당 수석 부사장인 장 포스터는 성명을 통해 "CTA가 (혁신상을 취소한) 이 상에 대한 처리과정이 미숙했다. 공개적으로 사과했다"고 인정했다.
디카를로는 CNN 비즈니스와의 인터뷰에서 "성욕구에 대한 수치심은 없다. 그것은 우리 건강의 일부이며 이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것이 더 널리 받아들여지기를 바란다"며 "우리의 가장 큰 목표는 이것을 소통하도록 바꾸로 주류로 가져오는 사회적 책임을 계속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디카를로는 올해 CES에 신제품 온다(Onda)와 바치(Baci)를 선보였고 2년 연속 CES 혁신상을 수상했다.
CES 2020이 열리고 있는 라스베이거스 컨벤션센터에 관람객들이 몰려들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CES 2020에 참가한 또다른 스마트 바이브레이터 업체 라이오니스(Lioness) 공동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 리즈 크링거는 "우리 회사의 목표는 여성들이 자신의 몸과 즐거움에 대해 더 잘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라며 "현재 바이브레이터나 질(vagina)과 같은 용어는 헤리포터의 볼드모트와 비슷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같은 혐오를 제거(destigmatizing)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라이오니스는 CES 2020에 머신러닝 및 수십 가지의 사용자 연구를 바탕으로 개발한 인공지능 기반 2세대 바이브레이터를 출품했다.
섹스 테크놀러지가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 된 것은 이들 여성 기업가들과 관련 업계의 참여와 '포용성'이 CES에서 확대됐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이제 겨우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갈 길이 멀다.
벤처투자가인 안드레아 바리카는 자신의 저서 '섹스(기술) 혁명: 성 웰니스의 미래'에서 아마존이 2018년 약 8억달러(약 9300억원)의 매출을 기록한 성 웰니스 제품 6만개를 판매하고 있다"고 추정했다.
하지만 그는 오늘날 온라인 광고의 구조는 특정 제품을 클릭하면 해당 제품에 대한 관심을 인식해 관련 제품을 이용자에게 노출시키는 추적 광고를 노출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섹스 테크놀러지 분야에서는 사용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바이브레이터가 '부끄러운 제품'이라는 인식이 짙게 깔려있기 때문이다.
전 세계 온라인 광고의 80%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구글과 페이스북도 이 분야의 광고 노출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비디오 공유 플랫폼인 '메이크 러브 낫 포르노(Make Love Not Porn)' 설립자 겸 CEO인 신디 갤럽은 MIT 테크놀러지리뷰와의 인터뷰에서 "여성들은 오랫동안 남성들에 의해 무시되거나 관과되어온 문제들을 섹스 테크놀러지를 통해 해결하고 있다"며 "CTA의 이번 조치는 미진하고 너무 늦었다"고 지적했다.
CTA는 2017년과 2018년 CES에서 여성 기조 연설자가 한 명도 없었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리더십을 가진 여성이 부족한 탓"이라는 변명으로 일관해 비난을 자초하기도 했다.
미국을 비롯한 글로벌 산업계와 기술 업계는 오랫동안 '백인과 남성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가장 혁신적인 기업으로 전세계 취업자들이 선호하는 애플이 펴낸 '다양성과 포용성에 관한 보고서'에 따르면 여성 비율은 전체 직원의 32%에 불과하고 백인 비율은 57%, 임원은 남성이 71%를 차지했다.
구글은 2017년 남성과 여성에 대한 임금차별을 정당화 하는 문건이 유출돼 파문이 일기도 했다. 이 문건을 작성한 남성 엔지니어는 "남녀는 생물학적으로 컴퓨터 프로그래밍 능력과 예술 분야 선호도가 다르고, 이것이 기술 산업과 리더십에 있어 왜 여성이 평등하지 않은지를 뒷받침해준다"며 "구글의 다양성과 포용성을 추구하는 정책은 좌편향 문화"라고 비판했다. 구글은 이같은 사실이 보도되자 즉각 '구글 시각과 다르다'는 해명자료를 냈다.
CES에 여성용 섹스 테크놀러지 제품에 대한 편향적 시각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지적은 합리적으로 보인다.
(사진=Pixabay)
CTA 장 포스터 수석부사장은 "우리는 사람들이 섹스 테크에 큰 관심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성적인 건강은 수면, 건강, 영양 등 전반적인 건강 유지면에서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것은 건강의 일부이지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갖고 있다"며 "중요한 것은 기술이다. 그 것이 전제된다면 지속적으로 포함할 수 있다" 말했다.
실제 엄격한 심사를 통과해 CES 2020에 출품된 섹스토이 제품들은 매우 정교한 기술 제품들이었다. 해부학, Wi-Fi 및 블루투스, USB 사용자 선호 패턴 진동 프로그래밍, 보석 디자인의 링 진동기, 앱 기반 제어, 에어 펄스 기능 등 첨단 기술이 적용됐다. 성인용품 샵과 달리 부스 디자인과 전시할 수 있는 진열 제품들도 관심있게 들여다보지 않으면 섹스토이 제품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기술은 포용성, 다양성을 수용하고 '즐기는 것'이라는 캠페인을 들이대는 기술업계 조차도 섹스 테크놀러지에 대해서만은 여전히 서구사회에 뿌리깊게 내린 엄숙주의를 요구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