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인교진 (사진=키이스트 제공)
최근 드라마와 예능에서 보아온 배우 인교진의 이미지는 코믹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야구팀의 경기 모습을 바라보며 일희일비하는 등 꾸밈없이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낸다. 그런 인교진이 그려낸 코믹한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높은 몰입과 웃음을 전달한다. 코믹하지만 마냥 같은 웃음만을 그려내지 않는다. 그는 캐릭터가 가진 서사, 시대, 관계를 통해 서로 다른 인물로 만들어 낸다. 캐릭터마다 다른 '결'을 살릴 줄 안다.
JTBC '나의 나라'에서 선보인 박문복도 그렇다. 짧게 자른 단발머리에 웃거나 말할 때 벌어진 입 사이로 보이는 까맣게 썩은 치아를 가진 박문복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다. 그러나 '나의 나라'를 보다 보면 그러한 모습을 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상황이 박문복의 외형에 고스란히 녹아 있음을 알 수 있다. 마냥 돈만 밝힐 것 같던 그의 뒤에 감춰진 사연과 그의 마음 등 복합적인 캐릭터가 박문복이다.
그런 박문복을 누구보다 '박문복스럽게' 그려낸 배우 인교진을 지난 11월 26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본 인교진의 모습에 더해 진지한 배우 인교진의 모습도 만날 수 있었다.
JTBC '나의 나라'에서 박문복 역으로 열연한 배우 인교진 (사진=방송화면 캡처)
◇ '문복의 방송 분량을 늘려 달라'는 요청에 행복한 인교진"아시다시피 모두 오랫동안 촬영을 했습니다. 사극이라는 특징도 있고, 정말 여러 배우, 여러 스태프와 의기투합한 작품이라 좀 더 아쉬움도 커요. 그만큼 후련함과 기쁨도 큰 거 같아요. 잘 마쳤다는 데 대해서요." (웃음)
이번 드라마를 통해 인교진은 다시 한번 자신의 이름을 시청자들에게 강렬하게 각인시켰다. '문복의 방송 분량을 늘려 달라'는 요청이 쇄도했고, 그의 이름 앞에 '신스틸러'라는 수식어가 많이 등장했다.
인교진은 "배우들도 시청자들의 다 본다. 그게 또 재미가 쏠쏠하더라. 얼마 전부터는 TV를 보면서 옆에 스마트폰을 두고 봤는데,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배우들이 다 그러더라"며 "실시간으로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 중 걸러야 하는 것도 있지만, 요즘 시청자들께서 워낙 디테일하게 평가해주셔서 받아들여야 할 게 있다. 문복의 분량이 늘어나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하시는데 내가 잘했나보다 생각이 들어 정말 기분이 좋았다"고 말했다.
JTBC '나의 나라'는 고려 말 조선 초를 배경으로 각자의 신념이 말하는 '나의 나라'를 두고 서로에게 칼끝을 겨누며 권력과 수호에 관한 욕망을 폭발적으로 그려낸 액션 사극이다.
박문복의 외모는 쉽게 잊힐 수 없다. 단발머리에 오랜 군역 생활을 하며 까맣게 썩은 이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군역이란 특수한 상황에 놓인 사람을 표현하기 위해 인교진이 작가와 PD와 논의 끝에 만들어낸 설정이다. 이러한 설정 때문에 '눈이 참 인교진 닮은 배우네'라고 하는 시청자가 있을 정도였다.
인교진은 "예전 '백희가 돌아왔다'에서도 충청도 사투리를 했는데 박문복 역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역할이었다. 비슷해 보이면 안 된다는 부담감도 있었다"며 "그러나 느낌은 비슷할 수 있어도 다른 인물이고, 살아온 배경이나 시대도 달랐다. 그렇기에 박문복 캐릭터 하나만 생각하고 열심히 하자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배우 인교진 (사진=키이스트 제공)
◇ 평범한 사람들의 '나의 나라'를 대변한 박문복, 그를 그려낸 인교진'나의 나라'에서 인교진이 맡은 박문복은 염장이(염습하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 출신으로, 10년간 군역을 살며 전장을 누볐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 살아남은 게 박문복이다. 그는 "저승길도 노잣돈이 두둑 혀야 괄시 안 받는 뱁이다"라고 말한다. 돈에 환장한 것처럼 보이지만, 돈 때문에 가족을 잃은 상처가 너무도 큰 인물, 마음만은 누구보다 따스한 인물이 박문복이다.
박문복은 이성계의 휘하로 북방을 호령했던 장수 서검의 아들인 무사 서휘(양세종 분)의 조력자이기도 하다. 실전에서 익힌 의술을 통해 많은 병사를 치료하고, 서휘와 생사고락을 함께한다. 그들의 관계는 '의리'로 단단하게 얽혀 있다.
"처음 기획할 때 제일 이야기를 많이 한 게 이들의 의리가 왜 생겼고, 어떻게 당위성을 가져갈 것인가였죠. 드라마 제목이 '나의 나라'인데, 각자의 나라, 나의 삶, 그게 곧 '나의 나라'라는 이야기예요. 문복은 누이가 그 흔한 고뿔에 걸려 죽어요. 약 한 번 못 쓰고 죽은 게 너무 화가 난 상태에서 군역에 끌려오죠. 그런 문복이 동생 서연(조이현 분)을 끝까지 지켜내려는 휘의 마음을 이해하고, 힘들지만 그걸 지켜줘야 하지 않나 생각한 게 있어요."
JTBC '나의 나라'에서 박문복 역으로 열연한 배우 인교진 (사진=방송화면 캡처)
돈만 밝히는 줄 알았던 박문복에게는 따뜻함과 의리가 있었다. '돈'이라는 건 박문복의 서사와도 관련이 있다. 그의 욕망은 '돈'이었고, 돈은 다시 말해 그에겐 '생존'을 이어가기 위한 절실함이었다. 즉, 생존에 대한 욕망이 박문복에게 있었다. 인교진은 "문복은 재물을 많이 모은다. 병사들이 죽으면 시신의 돈을 챙긴다. 그렇게 돈을 벌어 군역을 제대한 후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당시에는 먹고 사는 거, 군역에서 죽지 않고 살아야겠다는 게 중요했을 거다. 대사 중에 우리가 버틴 건 싸움을 잘해서가 아니라 눈칫밥으로 버틴 거라고 말하는 게 있다"며 "문복은 살고 싶다는 욕망과 혼돈의 시기에 살았다. 그 안에서 돈을 모아서 잘 살아야겠다는 욕망, 화월(홍지윤 분)에게 사랑을 표현한 것도 예쁜 각시를 만나고 싶다는 욕망도 있지 않았을까"라고 말했다.
박문복에게 '나의 나라'는 그저 '살아가는' 삶이었다. 인교진은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이게 나의 나라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에서 권력욕을 가진 자들이 역사를 바꿔 간다고 할 때, 평범한 사람들이 제일 원한 건 밥 세 끼 잘 먹고, 내 가족 잘 지키며 행복하게 사는 게 '나의 나라'였다"며 "역사적으로 우리가 기억하는 건 굵직굵직한 사건, 정치적인 내용이다. 드라마도 그들의 삶을 조명한다. 그러나 '나의 나라'는 민초들에게 집중하며 그들을 기억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배우 인교진 (사진=키이스트 제공)
◇ 어떤 역할이든 잘해내고 싶은 배우 인교진인교진은 미워할 수 없는 허당 야망꾼 조상무(KBS2 '저글러스'), 백희의 꼬붕이었던 홍두식(KBS2 '백희가 돌아왔다' 등에서 코믹한 이미지의 배역을 제대로 소화해냈다. 이미지 변신은 물론 같은 코믹이라도 결이 다른 모습을 선보였다. 또한 SBS 예능 '동상이몽 2-너는 내 운명'에서 인교진의 솔직한 모습을 선보이며 배우 인교진 안에는 '재밌는' 면모도 있음을 시청자에게 알렸다.
"'저글러스'를 할 때도 인교진이 재밌는 역할에 특정화되는 것이 걱정되지 않는지 질문을 받았어요.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같은 마음인데, 어떤 역할이 왔을 때 예전과 비슷한 거 아니냐고 물으면 저는 이렇게 답할 거 같아요.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한번 잘해볼 수 있을 거 같다고 말이죠. 그때그때 느껴지는 신의 상황이 다르잖아요. 아이디어도 다르고요. 그런 것들이 합쳐지면 다른 것들이 보이지 않을까요? 제가 차분하고 가라앉는 진지한 것도 자신이 있어요. 제가 현재 하는 감초 같은 역할도 확고히 잘하고 싶은 마음도 있고요. 비열한 것도 사실 잘해요. 제가 유일하게 못 하는 게 순정만화 같은 역할이죠." (웃음)인교진은 카메오로 잠시 등장하면서도 강렬하게 자신을 각인시킬 수 있는 배우다. JTBC '으라차차 와이키키2'에서 신현수(국기봉 역)의 야구팀 선배 곽하니로 등장했을 때도 그랬다. 말과 행동을 네 번씩 반복하는 징크스는 물론 헛스윙까지 타석에 들어선 잠깐만으로도 시청자에게 큰 웃음을 안겼다. 특히 프로야구 한화 이글스의 팬으로 알려진 인교진이 SK 와이번스 유니폼을 입은 모습은 인교진을 아는 사람들에게 또 다른 웃음을 제공했다.
"그때는 이창민 감독님이 '교진아, 너 야구 좋아하지? 네가 해야 할 게 하나 있어. 야구선수야'라고 해서 제가 또 의리가 있으니 알겠다고 하고 갔죠. 잘못됐죠. 온종일 배트를 휘두를 거라 생각도 못 했죠. (웃음) 결과를 보니 재밌더라고요. 그때는 그런 생각을 했어요. 요즘 시트콤이 없는데 시트콤 연기를 진지하게 하면 재밌겠다고 말이죠. 어떤 '재발견'할 수 있는 연기도 한번 해보면 재밌겠다고 생각했어요."
◇ 인교진, 그리고 배우 인교진의 원동력이 된 그의 새로운 '나의 나라'
인교진은 역할을 가리지 않는다. 그는 다양한 카메오 출연을 통해서도 자신과 다양한 작품으로의 가능성을 '재발견'했다. 그렇다면 시청자가 '배우 인교진'에게서 '재발견'할 수 있는, 배우로서 아직 미처 발견하지 못한 그의 모습은 무엇일까. 인교진은 자신 안에 있는 '악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어릴 때 연기학원에서도 그렇고, 연기를 계속해오면서 내가 진짜 준비를 많이 해온 게 바로 '악역'이다. 피도 눈물도 없는 악역을 한번 해보고 싶다"며 "영화 '달콤한 인생'에서 이병헌 씨가 자신의 극한을 보여주는데, 기회가 온다면 그런 처절한 악역을 해보고 싶다"고 설명했다.
이어 인교진은 "덧붙이자면 거기에 그런 것도 있으면 좋겠다. 처절한 악역인데 아주 잠깐잠깐 웃음이 담기는 것"이라며 "예를 들면 영화 '괴물'에서 진짜 급박하게 괴물이 사람을 잡아먹으러 뛰어가는데, 한강 변두리에서 삐끗하고 넘어진다. 그런 악역, 그런 장면이 오래전부터 내 머릿속에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아직도 시청자에게 보여주지 못한 게 배우 인교진에게는 많이 남아 있다. 배우로서 지나온 시간만큼 앞으로 나아가야 할 시간에서 인교진은 더욱 다양한 인물로 시청자를 만나게 될 거다. 그런 그를 지치지 않게 이끄는 원동력에 대해 인교진은 새롭게 생긴 '나의 작은 나라'라고 말했다.
드라마 '나의 나라'는 우리에겐 지켜야 할 나라가 있고, 그것이 곧 삶이라는 걸 보여줬다. 인교진에게도 지켜야 할 작은 '나의 나라'가 생겼다. 바로 '가족'이다. 그리고 그것이 곧 인교진의 삶의 새로운 원동력이 됐다.
"물론 하나의 뚝심으로 가는 것도 있지만, 원동력이 한 번씩 바뀌는 거 같아요. 처음에는 패기와 하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어요. 그리고 소위 말해서 유명해지고 싶기도 하고, 돈을 많이 벌고 싶기도 하고, 인정받고 싶었죠. 시간이 지나면서 서러움과 속상함이 원동력이 되기도 했죠. 그런데 결혼하고 아내가 생기고, 아이가 생기면서 바뀐 거 같아요. 아내한테, 자식들한테 부끄럽지 않은 아빠, 부끄럽지 않은 연기자가 되고 싶어요. 시청자들께도 그렇고요. 그런 책임감이 지금의 제 원동력인 거 같아요. 이제는 새로 생긴 '나의 작은 나라'가 제 원동력이 됐어요." (웃음)
배우 인교진 (사진=키이스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