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여 년 전 제주 4‧3 당시 군‧경에 의해 억울하게 빨갱이로 몰려 '수장' 학살된 사람은 기록도 없을뿐더러 먼 타국 대마도까지 시신이 흘러가 여태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제주CBS는 일본 대마도 현지에서 '역사의 어둠 속에 묻힌' 그들을 추적했다.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매장지와 화장터를 대마도 곳곳에서 찾아냈다. 27일은 세 번째 순서로 대마도 북서쪽 사고만 지역을 찾았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
① 생(生)의 기억조차 말살…제주 4·3 수장 학살의 비극 ② "손발 철사로 묶여…" 대마도로 흘러간 제주 4·3 희생자 ③ '시신 태우는 곳' 대마도에 남은 4·3 수장 희생자 흔적 (계속) |
상대마도 사고만 지역 4·3 희생자 매장지. (그래픽=김성기 PD)
대마도 북서쪽에 있는 사고만. 상대마도 히타카츠 항에서 차로 40분가량 이동하면 올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 70여 년 전 4‧3 광풍이 몰아치던 시기 수백 구의 한국인 시신이 떠밀려왔다. 당시 주민들은 시신을 해안가에서 화장하거나 매장했다. '히토야케바(사람 태우는 곳)'라는 지명이 있을 정도로 4‧3 수장(水葬) 학살 희생자의 흔적이 또렷이 남아 있다.
◇ 4·3 당시 떠밀려온 한국인 시신…주민이 화장
지난달 15일 대마도 북서쪽에 위치한 사고만. 우찌하마 수구레(78)씨가 70여 년 전 한국인 시신을 화장한 '히토야케바(사람 태우는 곳)'를 가리키고 있다. 곳곳에 해류에 떠밀려온 쓰레기가 보였다. (사진=고상현 기자)
"여기 쓰레기가 많이 떠밀려온 공터 보이죠? 이곳에서 한국인 시신을 많이 화장했다고 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히토야케바(사람 태우는 곳)라고 부릅니다."지난 10월 15일 오후 취재진이 사고만 해안가에서 우연히 만난 인근 미나토 마을 주민 우찌하마 수구레(78)씨가 이렇게 말했다. '1950년 전후로 한국인 시신이 많이 떠밀려온 사실을 아느냐'고 묻자 취재진을 이곳으로 안내하며 한 말이다.
'히토야케바'는 맑은 날에 부산 시내를 훤히 볼 수 있는 '이국이 보이는 언덕 전망대'에서 해안가를 따라 미나토 마을 방면으로 차로 5분 거리에 있다. 갈대로 둘러싸인 해안가 공터에는 파도에 떠밀려온 페트병, 어구 등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쓰레기 중에는 삼다수 페트병도 눈에 띄었다.
"보시다시피 이곳에 한국어가 적힌 쓰레기가 많이 떠밀려오는데, 1950년 전후로 한국인 시신이 이곳에 많이 흘러와서 수십 구를 화장했어요. 일본 다른 지역에서 그렇게 많은 시체가 떠밀려온다고 생각하긴 어렵거든요."
지난달 15일 대마도 사고만 인근 미나토 마을에서 만난 다니나가(82)씨. (사진=고상현 기자)
히토야케바 주변에서 가장 큰 마을인 미나토 마을에서 만난 시마이 사다오(92)씨의 딸도 '히토야케바'에 대해 "아버지한테서 들어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시마이 씨는 이 마을에서 최고령자다.
"지금은 아버지께서 치매에 걸리셨지만, 어렸을 때 그곳에서 한국인 시신을 많이 화장했다고 들었습니다."
미나토 마을에서 나고 자란 다니나가(82)씨도 '히토야케바'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해안에 한국인 시신이 떠밀려오면 묻을 곳이 없어서 히토야케바에서 시신을 화장했습니다"라고 증언했다.
1950년 전후로 히토야케바 인근 해안가로 떠밀려온 한국인 시신 4구는 바로 옆 사리에 마을 주민들이 마을 공터에 무덤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취재진이 처음으로 직접 현장을 확인한 결과 지금은 주변에 아스팔트 도로가 닦이고, 대나무 숲이 들어서 있었다.
◇ "옷에 한국어 적힌 시신이…너무 많아 매장"
한국인 시신 4구가 묻혀 있는 '사리에 마을' 대나무 숲. (사진=고상현 기자)
한‧일 관계가 악화하기 전 대마도에서 부산 시내를 훤히 볼 수 있어 한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았던 '이국이 보이는 언덕 전망대'. 전망대를 기준으로 바로 밑 해안가 왼편과 오른편에도 한국인 시신 집단 매장지가 있다.
1950년 전후 이곳으로 100구~200구의 한국인 시신이 떠밀려오자 미나토 마을에 거주하던 故 에토 히카루(2007년 81세 나이로 사망)씨가 친구 5명과 함께 시신을 매장한 곳이다. 그의 아들 에토 유키하루(62)씨는 아버지가 숨진 직후 인근 해안에 한국인 시신을 위해 250만 엔(한화 2600만 원)을 들여 '공양탑'을 세웠다.
대마도 사고만 해안에서 에토 유키하루(62)씨가 70년 전 아버지 故 에토 히카루가 시신을 매장한 곳을 가리키고 있다. (사진=고상현 기자)
취재진은 지난 10월 17일 오전 에토 씨의 안내로 집단 매장지를 확인했다. 히토야케바와 공양탑을 지나 돌이 깔린 해안을 따라 30분여간 걸어야 도착할 수 있었다.
"아버지께서 20대였을 때 몇 개월 사이에 이곳에 수많은 시신이 떠밀려왔다고 합니다. 남녀 구분 없이 시신이 왔고, 옷이나 옷에 지니고 있던 물품에 한국어가 적혀 있어서 한국인 시신으로 생각했다고 하셨습니다."
4‧3 당시 총살되거나 예비검속으로 희생된 사람 중에 가족들이 시신을 찾을 수 있게 희생자가 군‧경에 끌려가기 전 자신의 이름을 새긴 도장이나 물품을 지니는 경우가 많았다. 또 군‧경은 남녀 가리지 않고 학살을 자행했다. 사고만 해안에 떠밀려온 시신이 4‧3 수장 희생자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처음엔 20구~30구의 시신만 오니깐 시신을 모닥불 태우듯이 교차시켜 해안에 화장했다고 하셨어요. 나중엔 너무 많은 시신이 떠내려와서 당시 흙이 많았던 이곳에서 집단 매장하셨다고 합니다. 시신 상태도 좋지 않아 다른 곳으로 운반할 수도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에토 유키하루(62)씨. (사진=고상현 기자)
집단 매장지는 해안가로부터 섬 내륙과 인접한 흙무더기가 있는 곳이다. 과거에는 흙이 많았으나 지금은 인근에 해안도로가 닦이고, 태풍이 불면서 상당 부분이 유실된 상태였다. 집단 매장지가 7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훼손된 것이다.
제주 4‧3 당시 억울하게 '빨갱이'로 몰려 차가운 바다에 버려진 수장 학살 희생자들이 머나먼 타국에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어서일까. 에토 씨의 설명을 듣고 돌아오는 길에 들은 이곳 파도 소리는 유달리 구슬펐다.
대마도 현지인이 '다테이와'라 부르는 거대한 암석. 4·3 수장 학살 희생자 매장지는 다테이와 바로 옆 해안에 있다. (사진=고상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