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금강산관광지구를 둘러보고 있다. (사진=조선중앙통신 캡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금강산 관광지구 내 남측시설 철거를 전격 지시함에 따라 남북 경제협력은 물론 남북관계 전반이 중대 기로에 서게 됐다.
노동신문 등 북한 매체들은 23일 김 위원장이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빠지는 너절한 남측시설들을 남측의 관계부문과 합의하여 싹 들어내도록" 지시했다고 보도했다.
김 위원장의 언사에는 남측에 대한 격한 감정이 묻어난다.
그는 "건축물들이 민족성이라는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범벅식"이라거나 "무슨 피해지역의 가설막이나 격리병동처럼 들여앉혀 놓았다", "건축미학적으로 심히 낙후할 뿐 아니라" 등의 험구를 늘어놨다.
이는 김 위원장이 주요 치적사업으로 야심차게 시작한 원산 갈마지구 관광 개발이 미국 등의 제재에 가로막혀 있는 사정과 관련 있다. 이와 인접한 금강산 지구가 10년 넘게 폐가처럼 방치되는 현실에 분노를 표출한 셈이다.
그는 특히 올해 신년사에서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의 '조건과 대가 없는 재개'를 제안했음에도 남측이 한미공조를 이유로 여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초강수 압박이 필요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우리의 명산인 금강산에 대한 관광사업을 남측을 내세워 하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남측에 의존하는 남북경협을 철회하고 독자개발로 선회하겠다는 원칙을 밝힌 셈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금강산관광지구를 현지지도하고 금강산에 설치된 남측 시설 철거를 지시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23일 보도했다.(사진=연합뉴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막연히 남북경협이 재개되기를 기다리지 않고 자신들이 주도해서 금강산 등을 개발하겠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를 위해 김 위원장은 선대 지도자인 김정은 국방위원장의 실책까지 거론하는 결기를 드러냈다.
그는 "국력이 여릴 적에 남에게 의존하려 했던 선임자들의 의존정책이 매우 잘못되었다고 심각히 비판했다"고 북한 매체들은 전했다.
이미 2017년 신년사에서 스스로 능력 부족을 인정하고 자책함으로써 '수령 무오류' 원칙이 깨지진 했지만 북한체제에서 선친이기도 한 전임자를 비판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금강산 남측시설 철거 지시가 단순한 엄포가 아니라 남북경협을 비롯한 남북관계의 근본 틀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상의 최후통첩인 셈이다.
김연철 통일부 장관은 이날 더불어민주당 한반도비핵화대책특별위원회 초청 정책간담회에서 "(김 위원장이) 선대의 정책에 대해서 사실상 비판하는 형식을 취했기 때문에 진짜 정책 전환인지, 아니면 다른 시그널인지 좀 더 분석해봐야 한다"면서도 "현재 남북관계 상황은 엄중하다"고 말했다.
북측의 이런 태도로 볼 때 우리 측이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남북경협의 또 다른 상징인 개성공단으로까지 불똥이 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현대아산 전 관계자는 "금강산 관광 중단은 관광객 피살사건이라는 북측 잘못이 크지만, 개성공단은 우리가 일방적으로 폐쇄한 것이어서 (개성공단에 대한 조치는) 오히려 금강산보다 더 쉬울 수 있다"고 말했다.
남북은 2013년 8월 133일 간 중단됐던 개성공단 정상화에 합의하며 "어떠한 경우에도 정세의 영향을 받음이 없이" 정상적 운영을 보장하기로 했지만 2016년 2월 박근혜 정부는 일방 폐쇄를 결정했다.
따라서 북측 입장에선 주력 전차부대까지 후방 배치하고 내준 개성공단을 기약 없이 놀려둘 수는 없다는 이유로 남측 시설을 접수, 독자 운영하는 것을 다음 카드로 내밀 수 있다.
김 위원장은 다만 남측시설 철거를 지시하면서도 '남측의 관계부문과 합의'라는 단서를 달았다. 최소한의 협상 여지는 남아있는 셈이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 교수는 "선대의 유훈이기도 한 남북협력사업의 상징을 일방적으로 철회하는 것은 민족대단결과 우리민족끼리, 남북정상선언 정신에 위배된다"며 북측의 제고를 촉구하는 한편 정부에 대해서도 남북 고위급회담이나 특사단 상호교환방문 등을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