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우동 영화의전당에서 '뉴 커런츠' 심사위원을 맡은 서영주 화인컷 대표를 만났다. (사진=김수정 기자)
부산국제영화제(이하 '부산영화제') 3회째였던 1998년부터 부산영화제에 방문했다. 심사위원단으로 참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오랜 시간 봉준호 감독의 '괴물',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 이창동 감독의 '시', '오아시스' 등 한국의 내로라하는 작품을 해외 시장에 배급한 업계 베테랑 입장에서는 너무 늦은 제안이 아니었을까. 현답이 돌아왔다. 본업이 있기에 심사를 매년 할 수는 없다고.
부산영화제 4일째였던 지난 6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우동 영화의전당에서 '뉴 커런츠' 부문 심사위원이 된 서영주 ㈜화인컷 대표를 만났다. '뉴 커런츠'는 아시아 영화의 미래를 이끌 신인 감독들의 첫 번째 혹은 두 번째 장편으로 구성된 경쟁 부문으로, 최우수 작품 2편에 상을 준다.
서 대표는 뉴 커런츠 부문 공식 기자회견이 있었던 4일부터 하루에 영화를 2~3편씩 보는 강행군 중이었다. 그는 '오리지널리티'를 보여줄 수 있는 신인 감독을 찾고 있었다. 또한, 심사위원단의 판단과 선택으로 '베스트 필름'이 정해지는 만큼, 어느 때보다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고 전했다.
◇ 부산영화제 심사위원단은 처음이지만…
부산영화제는 처음이지만, 서 대표는 그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탈린영화제 등 다수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을 한 경험이 있다. 꾸준히 해 오지 못한 이유는 역시 본업 때문이다. 한국영화의 해외 마케팅과 배급을 담당하는 '화인컷'의 대표로서 워낙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기에. 다행히 올해는 기회가 닿아 제안을 받아들였다. 서 대표는 "매년 그렇게 할 순 없지만, 제가 도움이 된다면 하면 좋다. 저도 배우는 게 있어서 하는 것이고"라고 말했다.
올해 뉴 커런츠 부문에는 11개 국가의 영화 14편이 올라왔다. '노마드 선생'(감독 모하마드레자 키반파르), '잭푸르트'(감독 라우컥 후앗·베라 첸), '디아파종'(감독 하메드 테라니), '에듀케이션'(감독 김덕중), '하이파 거리'(감독 모하나드 하이얄), '#존 덴버'(감독 아덴 로드 콘데즈), '그냥 그대로'(감독 키슬레이 키슬레이), '럭키 몬스터'(감독 봉준영), '나의 정체성'(감독 스즈키 사에), '69세'(감독 임선애), '소년과 바다'(감독 쑨 아오치엔), '봄봄'(감독 리 지), '롬'(감독 짠 탱 휘), '달려라 소년'(감독 밀란 압디칼리코프)이 그 주인공이다.
주어진 시간이 짧기에 하루에 최소 2편 이상의 영화를 봐야 한다. 인터뷰 당일에도 벌써 두 편을 보고 왔다는 게 서 대표의 설명이었다. 오전 10시 반부터 시작해 저녁 6시까지 계속 이어지는 일정 가운데, 심사위원단은 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벌써 좀 친해졌다고. 올해 심사위원단은 영화감독인 마이크 피기스 심사위원장, 카를 오크 예술감독, 개막작 '말도둑들. 시간의 길' 주연 배우 사말 예슬라모바, 말레이시아 배우 리신제, 서 대표까지 5명이다.
서 대표는 "동료들의 스페셜리티(강점)가 다 다르니까, 영화에 대한 시점을 달리해서 분석하게 된다. 좋은 영화냐, 안 좋은 영화냐 하는 생각은 비슷하지만, 전문적으로 들어가면 자기 스페셜리티가 나온다고 할까"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좋은 영화'란 무엇일까. 서 대표는 "상 이름도 '베스트 필름'(best film)이지 않나"라고 웃으며 "결국 심사위원이 뽑아야 '좋은 영화'로 뽑히는 거다. 그래서 되게 조심스럽기도 하다. 열네 편 중 좋은 영화, 이건 좀 언급하고 싶다는 영화를 뽑게 되지 않을까"라고 귀띔했다.
지난 4일 오전,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 '뉴 커런츠' 심사위원단 공식 기자회견이 열렸다. 전양준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 카를 오크 예술감독, 배우 사말 예슬라모바, 마이크 피기스 심사위원장, 리신제, 서영주 화인컷 대표 (사진=부산국제영화제 제공)
◇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독창성'서 대표는 지난 4일 열린 부산영화제 뉴 커런츠 부문 심사위원단 공식 기자회견에서 신인 감독의 '오리지널리티'와 '관객들과 소통하는 지점'을 눈여겨보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독창성이라는 게, 정말 새로운 이야기가 있을까 싶다. 그런 걸 찾는다기보다는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독창적인 작품이 있을 것 같다"라며 "이야기는 한 줄로 쓰면 심플할 수 있어도 내러티브 방식이 새로울 수도 있고, 정말 슬픈 얘기인데 영화 속 배우들은 다 웃기만 하고 그래서 더 슬플 수도 있다. 비주얼적인 구도나 캐릭터들의 감정을 쌓아가는 방식이 다를 수도 있고. 형식적, 구조적인 것, 메시지 전달 방식이 새로울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이어, "주제가 곧 오리지널리티인 건 없을 것 같다. 리메이크를 하더라도 그걸 하는 감독이 독창성을 부여할 수 있다. 영화를 풀어나가는 시각과 감각이, 뭔가 (다른 사람에게서) 배운 듯한 게 아니라 날것이지만 본질적인 것을 보여줄 그런 감독들을 찾고 싶다. 그래야 같은 영화를 해도 다른 얘기로 들릴 수 있다"라고 부연했다.
'날것'을 발견한 적이 있는지 묻자, "가끔 있다"고 답한 서 대표는 "그런데 공부를 너무 많이 한 분들은 기존의 감독들이 잘했던 걸 염두에 두더라. 그러면 자기의 생각을 가릴 수 있다. 그걸(이전의 좋은 것) 수용하면서도 자기 것을 찾는다면 정말 대단한 감독이 될 수 있는데, 보통은 비슷한 방식으로 가더라"라며 "기본 트랙을 다 배우고 그다음에 자기 집을 지을 때, 비로소 본인 능력이 판가름 난다는 생각이 든다"라고 밝혔다.
◇ 해외로 배급하는 영화 수명, 길면 20년까지뉴 커런츠 부문 심사를 다 마치지도, 수상 결과가 확정되지도 않았기에 보안을 위해 모든 이야기를 전부 들을 순 없었다. 대화 주제는 자연히 서 대표의 본업인 영화 해외 배급에 관한 것으로 넘어갔다. 국내 배급과 해외 배급의 가장 큰 차이점이 무엇인지 묻자, 서 대표는 해외 배급 시 가장 중심에 두는 것을 '보편성'이라고 답했다. 특정한 나라 한 곳에만 세일즈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 대표는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해외 마켓에 나가고 각 나라 박스오피스를 비교하며 칸국제영화제에서 발간하는 애뉴얼 리포트를 참고하는 등 여러 방식으로 트렌드를 챙겨왔다. 매년 정리된 결산이 모이면 일정 기간의 전체적인 흐름을 읽는 힌트가 된다. 서 대표는 "물론 지금은 새로운 게 많이 들어와서 변수가 너무 많다. 영화 한 편이 될까 안 될까에 베팅한다기보다는, 여러 변수 중 몇 개 안에 들 수 있는지를 판단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 뉴 커런츠 부문에 선정된 영화는 총 14편이다. (사진=부산국제영화제 홈페이지)
그러면서 "'이 영화가 너무 좋으니까 잘 팔 수 있어' 하는 건 본능에 의지하는 건데, 처음엔 그렇게 할 수 있겠지만 이제는 바이어와 영화제 프로그래머들에게 의견을 듣는다. '난 이런 거 찾는데 이런 거 있어?'라고 물으면, '내년엔 이런 영화가 나오면 잘되겠구나' 하는 판단도 할 수 있고"라고 덧붙였다.
해외 배급은 수개월이나 1년 안에 끝나는 것이 아니고, 장기적인 계획을 따르기 때문에 더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 서 대표의 설명. 서 대표는 "우리는 10년 동안 배급을 한다고 봐야 한다. (국내 배급은) 한 영화당 일 년 안에 모든 것을 끝내지만, 해외 배급은 만들어지기 전부터 만들어진 다음, 판 다음 나라마다 개봉 스케줄이 달라서 10년에서 20년까지도 간다. 2000년 영화를 지금도 판다"라고 밝혔다.
서 대표가 처음 영화 일을 시작했을 때인 1990년대 후반만 해도 한국영화가 뭔지도 모르는 이들이 많았다. 독립 섹션 없이 아시아영화로 묶이는 게 일상이었던 한국영화는 2000년대가 되어서야 칸국제영화제 전 부문에 출품할 수 있었다. '한국영화에 대한 해외 시장의 달라진 태도'는 이미 20년 전에도 서 대표가 들었던 질문이라고. 중요한 건 영화의 국적이 아니라, '재미'다.
서 대표는 "'올해 한국영화에 재밌는 게 얼마나 있지?'를 본다. 영화에 국기를 달고 보는 게 아니다. 좋은 영화냐를 보는 것이지. '배드 지니어스'는 영화가 너무 좋으니까 (태국이 해외 영화 시장에서) 익숙하지 않은 나라임에도 널리 알려졌다. 동남아시아에서도 좋은 영화가 많이 나온다. 그전에는 일본영화가 1등이었고, 한국영화가 많이 올라오니 주춤했다. 지금은 동남아시아에서 좋은 감독들이 막 올라오고 있다. 해외에서 상 탄 영화도 있고, 박스오피스도 잘 된다"라고 말했다.
이어, "(제가 배급하는 게) 한국영화라는 걸 자꾸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라며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웰 메이드(well-made, 우수한) 영화를 가급적 많은 나라에서, (우리와) 정서가 다른 관객들도 볼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 그걸 제가 한다는 것이다. 제가 (한국영화를) 어떻다고 판단하고 싶진 않다"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신작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로 갈라 프레젠테이션 부문에 초청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국내 작업을 할 때도 '일본영화'를 만든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해외 올 로케이션으로 찍은 이번 작품에서도 '프랑스영화'를 찍는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답변은, 서 대표의 의견과 비슷한 요지였기 때문이다.
◇ 올해 한국영화계의 '소중한 발견'㈜화인컷은 올해 부산영화제에서 '어서오시게스트하우스'를 비롯해 '양자물리학', '장사리 : 잊혀진 영웅들', '유열의 음악앨범', '우리집' 등 개봉작, 개봉을 앞둔 '버티고', '나를 찾아줘' 등을 들고나왔다. 출품 경향을 묻자, 서 대표는 "지금 제가 볼 때는 두루두루 팔리는 영화보다는, 어떤 지역에서 잘되는 그런 영화 편수가 많아진 것 같다"라며 "저는 편수를 늘리기보다는 저희가 물 주고 가지치기해서 잘 가꾼 영화를 소수만 가져도 행복하다"라고 답했다. 이내 "내년에는 그런 영화들이 더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영화가 많으면 뭐가 문제겠나"라며 웃었다.
그렇다면 올해 한국영화계에서 인상적이었던 경향은 무엇일까. 서 대표는 "저는 올해는 약간 다음 해를 위한 휴지기로 본다. 어떤 움직임이 꿈틀꿈틀한다기보다는"이라고 말했다. 한국영화가 태동하고 산업화하기 시작한 1998년부터 약 20년간의 흐름을 보면, 해마다 '업 앤 다운'이 있었다고. '휴지기'라는 건 부정적인 평가가 아니었다. 서 대표는 "제작하고 감독하는 사람들이 자극을 받아서 준비해서 그다음 해가 좋아지더라. 20년 사이클을 볼 때 그랬던 것 같다"라고 덧붙였다.
(사진=화인컷 홈페이지)
서 대표는 "앞으로 다가올 내년, 내후년을 대비하기 위해 쉬어가는 해인 것 같다. 이때가 오히려 중요한 것 같다. 올해는 상업적인 성공이 많이 나오지는 않았다. 그래서 숨 고르기 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라면서도 '소중한 발견'이 있었다고 밝혔다. 제작비 규모에 상관없이 빛나는 성취를 보여준 작품이 등장한 것이다.
그는 "올해 괄목할 만한 것들은 최근에 '아워 바디'도 그렇고 여성 감독님들의 작품이 제대로 가치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벌새'의 경우도 옛날 같으면 '작은 영화 나왔네'라고만 했겠지만, 이제 15만 명도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소중한 발견을 할 수 있었다. 큰 사이즈 영화들이 숨 고르기 할 때 작지만 보석 같은 영화로 숨을 쉴 수 있는 거다. 영화산업은 이렇게 스스로 자정과 자생이 되는 면이 있는 것 같다"라고 부연했다.
하루에 영화를 3편 이상 보는 일정을 마치면, 서 대표는 좋아하는 바다를 볼 예정이다. 영화제의 분위기를 느끼면서도, 스스로를 위한 시간을 갖고 싶다는 서 대표의 '부산영화제 즐기기 계획' 안에는 모래밭을 맨발로 걷는 것이 포함돼 있다. 당신이 부산에 있다면 바람을 쐬며 여유를 즐기는 서 대표를 우연히 만날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