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오전, 서울 마포구 연남동에 있는 왕민철 감독의 작업실에서 왕민철 감독(왼쪽)과 김정호 수의사(오른쪽)를 만났다. (사진=이한형 기자)
청주시립미술관에서 공연 기획을 하다가 하나의 프로젝트로 청주동물원을 찍게 된 왕민철 감독은 그동안 잘 노출되지 않았던 동물원의 조금 더 깊숙한 곳을 담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장편 다큐멘터리를 구상하게 됐다. 개봉까지 염두에 둔 촬영을 할 땐 당연히 장소와 그 장소에 있는 이들의 동의와 협조를 구해야 할 터.
'동물, 원'의 주인공 중 한 명인 김정호 수의사는 청주동물원의 뒷모습을 가감 없이 담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수락했다고 했다. 왕 감독은 독립 다큐멘터리를 극장에서 본 적 있냐고 물으며 "어차피 많이 안 본다고 하고 설득했다"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또한 개봉을 앞두고 상영관을 잡는 게 너무 힘들었다고도 전했다.
지난 3일 오전, 서울 마포구 연남동에 있는 왕민철 감독의 작업실에서 왕 감독과 김 수의사를 만났다. 개봉 이틀 전 기분이 어떤지 묻자 왕 감독은 "많은 분이 보시면 좋겠지만 관수가 적게 잡혔다"라며 "이 직업으로 먹고사는 건 불가능한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라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 개봉을 맞이하는 기분
인터뷰하던 날은 개봉 이틀 전이었다. 그동안 영화제에서 공개된 적은 있지만, 개봉해 더 많은 관객에게 선보이게 되는 기분이 남다르지 않냐고 묻자, 왕 감독은 "많은 분이 보시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관수가 적게 잡힌 데다가… 독립영화가 일단 개봉을 하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기도 한데, 예상보단 상영관이 적게 잡혀서 현실적으로 많은 관객을 만나는 건 쉽지 않을 것 같다"라고 멋쩍게 웃었다.
왕 감독은 "예전엔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봤던 것 같은데, 제 영화를 걸려고 하니까 이게 이 정도구나 했다. 이 직업으로 먹고사는 건 불가능한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라며 웃었다. 그러면서 "나름 평도 나쁘지 않고 좋게 보셨다고들 하는데, 그런데도 이 정도면 저희(독립 다큐멘터리)도 야생동물같이 보호해줘야 할 것 같다. 야생으로 가서 살 수 없으니"라고 뼈 있는 말을 덧붙였다.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동물, 원'의 스크린 수와 상영횟수가 가장 많았던 날은 개봉 날인 지난 5일이었다. 그마저도 25개 스크린에서 32회 상영된 게 전부였다. 그 후로 개봉 8일째였던 지난 12일까지 20개도 채 안 되는 스크린에서 20회 전후로 관객들을 만났다. 어제(12일)는 12개 스크린에서 15회 상영됐다. 더 큰 제작비가 들어갔다고는 하지만, 상업영화들이 1천 개 전후의 스크린을 가져가는 것과는 완전히 딴판이다.
지난 5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동물, 원' (사진=케플러49 제공)
언론 시사회 당시 인상적이었던 반응이 있었냐는 물음에 왕 감독은 "어떻게 보셨는지 잘 모르겠다. 보고서 기립박수를 치거나 하진 않아서"라고 답해 웃음을 자아냈다. 제일 앞자리에서 꼬마와 같이 본 한 관객이 '아이들과 이런 걸 생각할 기회가 된 것 같다'고 말해준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동물원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이다 보니, 동물원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관객들이 시사회 때마다 한두 명씩 온다고 한다. 왕 감독은 "수의사나 사육사라는 직업 자체가 폐쇄적인 면이 있어서 그런가, 객관적인 자료가 부족한 것 같더라. 그런 분들이 꼭 오셔서 김정호 수의사님께 진로 상담을 하기도 한다"라며 웃었다.
김 수의사는 "이쪽이 덜 열린 직업군이긴 하다. 저희가 동물원 수족관협회 종 보존 분과라고 있는데 전국 수의사들이 모여봐야 열다섯 명에서 스무 명밖에 안 된다. 작은 동물원은 상주하는 수의사가 거의 없다"라며 "(이쪽 정보를) 접할 기회가 없다 보니까 소위 말해서 카더라 소식을 많이 접하는 것 같다. 발품을 직접 팔아서 수의사, 사육사분들 만나보고 환경을 직접 보고 이해하는 게 중요하지 않나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이어, "이쪽 일을 하는 분들은 수는 적지만 자긍심이 높은 분이다. (일과 관련해) 추측하지 말고 직접 확인하고 도움을 구하길 바란다. 몇 안 되는 숫자가 일하다 보니까, 미래의 동료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아마 적극적으로 도와줄 것"이라고 조언했다.
◇ 다큐멘터리-공공 동물원과의 만남왕민철 감독은 독일에서 영화 공부를 했다. 졸업 작품으로는 극영화를 찍었고, 그 후로는 다큐멘터리를 두세 편 찍었다. 2012년쯤 한국에 들어와서 '노무현입니다'를 만든 이창재 감독의 '목숨' 조감독과 편집 등을 맡는 등 촬영감독으로 일했으나, 다큐멘터리 쪽은 일거리가 너무 부족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왕 감독은 "독립 다큐멘터리는 품앗이하듯이 일하는 편이다. 또, 돈이 생기면 잠깐 쓰고 이런 식이라, 촬영감독으로 살기가 너무 힘들더라. 이런저런 일을 하다가 연출을 하게 됐다"고 밝혔다.
왕 감독은 "우리나라는 독립 다큐멘터리에서 액티비즘이 셌다. '영화'보다는 '기록'에 방점을 찍은 분들이 한국 독립 다큐를 끌어온 면이 있다. 지금 나오는 다큐멘터리는 영화 쪽에 방점이 찍혀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극영화에는 딱히 욕심이 없지만, 기회가 된다면 찍어볼 마음도 있다. 왕 감독은 "고레에다 히레카즈 감독은 취재를 매우 열심히 하지 않나. 다큐멘터리의 장점을 극영화에도 굉장히 잘 살리고. 저도 그런 극영화라면 찍어보고 싶다"라고 전했다.
다큐멘터리 '동물, 원' 스틸 (사진=케플러49 제공)
김 수의사는 임상(환자를 진료하거나 의학을 연구하기 위해 병상에 임하는 일) 쪽으로 진로를 정할 때 이상하게 야생동물 쪽이 끌렸다고 말했다. 야생동물을 전공으로 하는 교수님 밑에서 대학원을 다녔고, 이후 야생동물 보존 쪽으로 유명한 시드니대학교로 유학 갈 마음을 품었다. 학비를 버느라 호주에서 차 닦고 있을 때 걸려온 국제전화 한 통이 그의 계획을 바꿨다.
청주동물원에 자리가 하나 났는데, 그게 야생동물 수의사였다고. 김 수의사는 "그땐 진짜 야생동물인 줄 알고 갔다. 학생 때라 잘 몰랐다. 동물원 동물과 진짜 야생동물은 많이 다르더라"라고 말했다. 2001년부터 일했으니 올해로 18년이 됐다. 순환할 수 있는 위치라 다른 데로 갈 수 있었지만, 내키지 않아서 계속 청주동물원을 지켰다.
◇ "100% 만족"하는 '동물, 원'을 추천한다면
'동물, 원'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장면을 골라 달라고 하니 김 수의사는 "저는 100% 만족한다"고 답했다. 김 수의사는 "아쉬운 건 진짜 없다"라며 "영화 완성도가 정확히 어떤 걸 표현하는지는 몰라도, 저는 (동물원의 모습이) 알려지고 변화의 기회와 계기를 마련하는 것만으로 좋은 일이라고 본다. 100% 만족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왕 감독 역시 "저도 불만은 없다"며 웃었다. 이어, "아쉬운 점이라면 이게 영화로서, 이야기로서 만드는 거라, 주제가 안 맞아 뺀 얘기들이 있다. 예를 들면 인적 구성에 관한 것. (일하는) 젊은 친구들은 다 기간제다. 그 안에도 고용불안이 굉장히 있는 거고. 동물원에서 일하는 분들은 순환직이다 보니까 전문성 확보가 안 되고. 각각 시청에 속한 게 아니라, 산림청 같이 동물/생물 종을 아우르는 단체가 있어서 체계적으로 관리해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했다. 이런 얘기가 담기면 좋겠지만 이건 저널리즘에 더 어울리는 주제라고 봤다"라고 말했다.
'동물, 원'을 기다리는 관객들에게 한마디 부탁하자 왕 감독은 주저 없이 "많이 봐 달라. 두 번 봐 달라"라고 말했다. 그는 "사실 환경 관련 기사는 그런 걸 안 봐도 될 만큼 잘 아는 사람들이 끝까지 본다고. 저희 영화는 실내 동물원에 가거나, 아이들을 데리고 가는 분들이 봐주셨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김 수의사도 "저도 많이 보셨으면 좋겠다. 어쨌든 관심을 가져야 안 좋은 부분은 개선되고 잘하는 부분은 격려를 받아 더 잘할 수 있는 부분이 있으니까. 기재부, 환경부라든지 정책 결정하는 분들이 많이 보시면 동물에 대한 자세가 달라질 것 같다. 그래서 실질적인 변화를 일으켜줬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동물, 원'을 연출한 왕민철 감독(왼쪽)과 '동물, 원'에 등장하는 김정호 수의사가 2일 CBS노컷뉴스를 만나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이한형 기자)
마지막으로 동물원을 찾는 관람객들에게 '이것만을 하지 말아주세요' 하는 주의사항을 물었다. 김 수의사는 동물들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소리에 민감하다는 점을 짚어줬다.
"과자나 먹을 걸 주면서 (관람객들은) 잠깐이나마 동물을 조종하는 느낌을 받아요. 재미있는 거죠. 그래도 요새는 뭘 주면 안 되는지 많이들 아시더라고요. 생각보다 야생동물들이 훨씬 예민해요. 청각이 굉장히 좋아서 스라소니는 60~70m 반경에 있는 쥐가 지나가는 소리까지 들어요. 인간이 발생시키는 소음이 생각보다 더 많은 스트레스를 줘요. 소리 지르는 건 말도 못 하고요. 가만히 있으면 산새 소리, 바람 지나가는 소리 같은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요. 거기에 좀 더 집중하셨으면 좋겠어요. 시끄럽게 얘기하는 건 동물 없는 곳에서도 할 수 있으니까요. 동물을 이해하면 그렇게 할 수 있겠죠. 아직은 그런 정보가 부족해요. (널리 알리지 못한) 저희의 책임이기도 하고요. (동물원 안 동물들은) 적응하는 능력이 있긴 하지만, 이왕이면 스트레스를 덜 주면 좋겠죠. 이해하면 배려할 수 있어요." <끝>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