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덕담이 오가는 민족 대명절 추석.
하지만 이런 말을 건넬 수 없는 이들이 있다. 바로 지난 4월 발생한 강원 동해안 산불 탓에 여전히 조립식 주택에서 불편한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는 피해 이재민들이다.
◇ 이재민에게 '서러운' 명절…"오겠다는 자녀 만류했다"산불로 마을 곳곳이 불구덩이에 휩싸여 큰 피해를 본 고성군 토성면 용촌리 마을.
현재 고성군에는 모두 285동(252세대)의 조립식 주택이 있는데, 이중 용촌리 마을이 86동(73세대)으로 가장 많다. 이재민들은 지난 7월부터 조립식 주택에 입주해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용촌 2리에서 만난 어춘화(75) 할머니는 취재진과 만난 지 몇 분 지나지 않아 서러운 눈물을 끊임없이 쏟아냈다.
지난 4월 발생한 강원 동해안 산불로 잿더미가 된 고성군 마을(왼쪽)과 박만호(72) 할아버지가 머물고 있는 7평 남짓한 조립식 주택(오른쪽). (사진=박종민 기자, 유선희 기자)
"대구에 사는 딸이 추석 때 온다고 하기에 오지 말라고 했어요. 집이 7평 남짓으로 너무 좁아 딸이 와도 편하게 잘 수 없는데, 왔다 가면 내 마음이 안 좋을 것 같다고요. 그런데 말하면서 마음이 너무 안 좋으니까 수화기를 붙잡고 한참을 울었어요. 나도 울고 딸도 울고... 마음이 너무 아파."
어춘화(75) 할머니가 머물고 있는 7평 남짓한 조립식 주택으로, 수납 공간이 없어 각종 구호품이 구석에 쌓여 있다. (사진=유선희 기자)
어 할머니는 "하도 울어 말라붙었다고 생각한 눈물이 명절이 다가오니 새삼 다시 흘러내린다"며 주름진 손으로 하염없이 눈물을 닦아 냈다.
특히 어 할머니는 며칠 전 증조할아버지 기일이었음에도 제대로 제사상을 차리지 못했다면서 죄스러운 마음에 또 울먹였다.
"이 공간에서 제사를 어떻게 지내나요, 못 지내지. 제사상 차릴 수 없으니까 그냥 술 한 병 들고 산소에 찾아갔어요. '오늘도 그렇지만 추석에도 제사 못 지내니까 그런 줄 아시라고. 이거라도 달게 받고, 설에는 제대로 잔 올리겠다고...' 그렇게 혼자 이야기하다 왔어요. 살아 있는 사람들 현실이 이렇게 딱한데 어떻게 하나요... 마음이 참 답답해."◇ 임대아파트서 이재민 1명 사망…마을 분위기 '뒤숭숭'
고성군 토성면 마을 곳곳에서 여전히 화마가 할퀴고 간 흔적을 볼 수 있다. (사진=유선희 기자)
이런 가운데 용촌리 이재민들은 최근 한 주민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숨진 주민은 산불이 발생하기 전 한동네에서 함께 살았던 이웃이었다.
용촌리 주민들과 경찰 등에 따르면 지난 16일 오후 6시쯤 속초시의 한 임대아파트에서 A씨(47)가 숨진 채 발견됐다. 가족과 연락이 두절된 지 이틀 만이었다.
공사장에 나가 일하던 A씨는 평소 혈압이 높아 약을 먹고 있었으며, 사망 당시 집에는 술병 등이 나뒹굴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A씨는 좁은 조립식 주택보다는 아파트가 낫다고 판단, 홀로 임대아파트에서 지내왔던 터였다.
이에 주민들은 "산불이 발생하지 않았더라면 A씨가 아무도 없는 곳에 혼자 나가서 지낼 일도 없지 않았겠느냐"며 "같은 마을에라도 함께 있었으면 연락이 안 됐을 때 직접 방문해 들여다봤을 텐데 정말 가슴이 아프다"고 안타까워했다.
또 주민들은 "살겠다고 나간 건데 우리 동네 사람들한테 쓰라림만 주고 갔다"며 "산불 발생 이후 일상생활로의 복귀가 점점 늦어지면서 혹시 또 사각지대에서 비슷한 소식이 들리지 않을까 걱정이 많다"고 뒤숭숭한 마을 분위기를 전했다.
◇ 산불 복구 수습도 안 됐는데…태풍 피해로 '두 번 눈물'
지난 7일 태풍 '링링'으로 속초시 장천마을에서 벼 도복이 발생했다. (사진=속초시청 제공)
속초지역에서 산불 피해를 가장 크게 본 장천마을은, 지난 7일 태풍 '링링'으로 벼가 쓰러지는 손해까지 입어 더욱 우울한 추석을 보낼 처지에 놓였다.
장천마을 조립식 주택에서 만난 박만호(72) 할아버지는 예전과 다른 추석맞이에 착잡한 마음이지만, 무엇보다 1년 내내 애써 가꿔온 벼농사마저 타격을 입어 두 번 눈물을 흘리고 있다.
특히 박 할아버지는, 산불로 농기계까지 다 타버려 직접 농협 등에서 기계를 임대해 힘들게 벼농사를 지어 왔었다.
박 할아버지는 취재진과 만나 "만 여 평정도 벼농사를 지었는데 그중 천평 정도 도복(벼 쓰러짐)이 됐다"며 "산불 때문에 추스르지 못한 마음에 논까지 저렇게 되니 아픔이 두 배가 된 것 같다"며 헛헛한 마음을 내비쳤다.
이어 "추석 명절이 오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을 하잖아요. 한가위가 온다고 하면 곡식이 익어서 풍성할 때란 말이에요. 풍족한 마음에 그런 말이 생겼을 텐데, 올해는 뭐 산불에 이어 벼농사까지 망치면서 참.. 말로 표현하기 힘든 기분"이라고 말했다.
박 할아버지가 머무는 조립식 주택의 한 벽면에는, 산불이 발생하기 전 그가 무려 46년 동안 살았던 집을 찍어둔 사진이 붙어있어 더욱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박만호(72) 할아버지가 예전에 살던 집을 찍어둔 사진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사진=유선희 기자)
◇ 기어코 아무런 진척 없이 맞게 된 추석…이재민 '분통'추석 전에는 일상으로 복귀가 가능할 것으로 믿었던 이재민들은 정작 추석에도 조립식 주택에서 머물게 되자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산불과 관련한 수사결과 발표 역시 경찰이 당초 약속한 날짜를 훌쩍 넘기면서 이재민들은 그저 답답해할 뿐이다. 현재 경찰은 수사 진행상황과 관련해 입을 꾹 다물고 있다.
이에 이재민들 사이에서는 '한국전력공사에 대한 경찰의 눈치 보기 아니냐', '이미 검찰로 사건을 송치했는데 말을 안 해주고 있다' 등 의혹만 부풀어진 상황이다.
지난 4월 고성에서 발생한 산불이 점점 번지고 있다. (사진=박종민 기자)
한편 한전은 손해사정 실사조사를 마친 고성 지역 피해민들에게 100억원 규모의 금액을 우선 지급하기로 했지만, 일부 이재민들은 "한전이 정해놓은 피해범위에 피해민들을 가두어 놓으려는 고도의 전력"이라며 맹비난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이재민들은 한국손해사정사회에서 진행한 손해사정 실사금액이 턱없이 부족하다며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 실사금액에는 육체·정신적 피해는 포함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하나 뚜렷하게 보이는 것이 없는 상황에서 산불 피해 이재민들은 그 누구보다 서럽고 우울한 추석을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