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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새', 실은 진짜 재밌는 영화… 깨알 유머를 심어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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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컷 인터뷰] 영화 '벌새' 김보라 감독 ②

지난달 20일 오후, 서울 동작구 사당동 메가박스 아트나인 카페에서 영화 '벌새' 김보라 감독을 만났다. (사진=박종민 기자)

 

※ 영화 '벌새' 내용이 나옵니다.

교문 앞에서 기다리는 남자친구 지완(정윤서 분)은 은희(박지후 분)에게 사랑의 밀어랍시고 "너는 사슴 같아"라고 말한다. 지완과 첫 키스를 할 때 은희는 아무 거리낌 없이 '혀도 넣어볼까?'라고 말한다. 어떻게 알았는지 둘째 오빠 대훈(손상연 분)은 은희에게 "너 아까 그 새끼 누구냐?"라고 묻고 "부모님 망신시키지 말라"며 충고한다.

담임 교사는 아직 중2밖에 안 된 아이들에게 하루를 어떻게 쓰냐에 따라 미래가 달려있다며 겁을 주고, 날라리 2명 이름을 적어내라고 한다. 여기서 날라리는 '공부 안 하고 연애하는', '노래방 가는', '담배 피우는' 애들이다. 가부장적인 은희 아빠(정인기 분)는 우등생 대훈이 2년 연속 회장을 해야 한다며 "우리 식구들 다 기도해!"라고 말한다.

정작 당사자는 웃음기 하나 없이 진지하고 솔직한데, 이런 장면을 보는 관객들은 어떤 형태로든 웃음이 비집고 나오는 상황을 마주한다. 1994년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사는 열다섯 살 중학생 은희의 성장기를 그린 '벌새'(감독 김보라)는 사실, 이렇게 '웃기는' 영화다.

영화 개봉을 앞두고 지난달 20일 오후 서울 동작구 사당동 메가박스 아트나인 카페에서 만난 김보라 감독은, 영화에서 폭소와 실소가 나오는 장면이 꽤 등장했다는 감상을 전하자 무척 반가워했다. 김 감독은 "저 진짜 유머가 중요한 사람"이라며 "깨알 같은 유머를 심어놨다"고 말했다.

◇ 스릴러 같은 첫 장면이 등장한 이유

'벌새'는 초인종을 누르는 단발머리의 뒤통수에서 시작한다. 문은 잠겨있는 듯하고, 안에서 아무 반응이 없자 문을 쾅쾅 두드리는 은희. 알고 보니 1002호에 가야 하는데 한 층 내려가 엉뚱한 집 문을 두드리며 애타게 엄마를 외쳤던 거였다. 긴 복도형 아파트는 사실 정확히 기억하지 않으면 여기가 몇 층인지 헷갈릴 법한, 획일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다. 멀어지는 카메라, 성냥갑 같은 아파트의 풀샷이 나온다.

다급하게 문을 두드리는 은희의 손놀림과 연신 '엄마!'하고 부르는 외침. 알고 보니 층수를 착각했다는 싱거운 이야기였으나, 긴장감과 공포감이 느껴지는 강렬한 오프닝이었다. 김 감독은 제대로 집을 찾아가지 못하는 은희의 모습으로 '부유하는 느낌'을 주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오프닝에서는 질문을 던지잖아요. 엔딩에서는 초반에 던졌던 질문이 대답 되는 것이 극영화의 전형적인 플롯이라고 한다면, '은희는 어떻게 될까?' 하는 질문이 던져지는데, 굉장히 불안에 떨고 있는 은희 얼굴이 나오죠. (엔딩에서는) 그 질문에 답을 하듯이 홀로 남았지만 편안해진, 무리 안에서 자기 자리를 찾은 듯한 은희를 보여줌으로써 관객을 안심하게 해요. 모두가 은희를 떠났지만 혼자 같지 않은 단단해진 느낌을 관객들도 받아서 기뻤던 것 같아요."

'벌새'의 스틸 (사진=에피파니&매스 오너먼트 제공)

 

은희는 집과 학교 밖에서 훨씬 자유로운 아이다. 가장 아늑해야 할 것 같은 공간이 은희에게는 편치 않다. 혹이 나서 수술, 치료받느라 병원에 있을 때 집보다 편한 것 같다고 한 말은 과장이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집에서는 오빠의 폭력에 노출돼 있다. 은희는 그저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린다. 대훈은 다른 가족이 보는 앞에서도 제 분을 못 이겨 손찌검을 하고, 은희는 고막이 나갈 만큼 크게 다친다.

"오빠한테 맞았다는 친구가 한두 명이 아니었다. 그게 일상이었던 것 같다"라고 말을 꺼낸 김 감독은 대훈을 '제2의 가부장', '쁘띠 가부장'으로 설정했다고 설명했다. 은희 가족 장면에서 가장 자주 나오는 식사 자리에서도 서열이 나뉘어 있다. 아빠는 가운데에 앉고 그 옆쪽에는 아들 대훈과 엄마가 있다. 딸인 수희와 은희는 맨 가장자리다.

김 감독은 "그 당시 굉장히 만연한 폭력이었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런 폭력과 억압에도 불구하고 은희가 어떻게 자유를 찾고 사랑이라는 걸 발견하게 되느냐 하는 거였다. 대비의 목적으로 폭력이 하나의 요소로 쓰인 거다. 폭력을 고발한다거나, '피해자'로서의 주인공을 부각하려고 하지 않았다. 어떻게 은희가 주체성을 가진 인간으로 태어나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 은희를 은희 자체로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유일한 어른, 영지

그러나 은희가 늘 외롭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한문 교실에 같이 다니는 단짝 지숙(박서윤 분), 먼저 호감을 표하며 X를 맺자고 다가온 후배 유리(설혜인 분), 만난 지 며칠인지 기념일을 셀 만큼 좋아하는 남자친구 지완(정윤서 분) 등 나름대로 자기만의 관계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어른들이 채우지 못한 자리를 또래 아이들에게 기대며 지낸 것이다.

우연히 만나게 되는 한문 교실의 새 선생님 영지(김새벽 분)를, 은희는 처음에 좀 이상한 사람이라고 여긴다. 학원 창밖으로 담배를 피운다거나, 아이들에게 존댓말을 쓴다거나, 자기소개를 하면서 아이들에게도 자기소개를 시킨다거나. 아이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 과장된 살가움을 보이던 사람들과 달리 묵묵하지만, 실은 은희를 존중하고 은희가 어떤 마음을 가졌는지 살펴보려고 노력하는 어른이다.

김 감독은 "본질이 아닌 관계들 속에서 영지와는 뭔가 처음으로 제대로 된 관계를 맺는다. 본질로서 소통하는 관계의 맛을 봐서 꿈결 같았을 것 같다. 굉장히 이상적인 관계를 만나면 큰 변화를 겪는다고 생각했고. 제게도 영지 선생님 같은 분이 있었고 그 만남이 제 삶의 무늬를 바꾸고 제 삶의 가치를 아름답게 가꿔준 것 같다. 그걸 영화로 보여주고 싶었다"라고 밝혔다.

이어, "그렇지 않은 관계의 사람들을 비난하는 게 아니"라며 "이 영화 안에서 사람들이 많이 모자라고 부족해 보일지라도 (그들이) 나쁘거나 잘못된 게 아니라 인간 삶 안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어떤 판단을 하거나 분별하고 싶진 않았다"라고 부연했다.

은희와 '본질적인 관계'를 맺는 영지 선생님 역은 배우 김새벽이 연기했다. (사진=에피파니&매스 오너먼트 제공)

 

"저는 성인이 된 지금도 한 인간을 대할 때 무엇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정말 이 사람의 본질적인 걸 보려고 되게 노력을 많이 해요. 물론 저도 세상의 때가 많이 묻으면서 나도 모르게 배경으로 판단하고 분별하는 순간이 와요. 그러지 않고 인간을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존중하고 대할 수 있느냐가 항상 매일의 큰 숙제 같아요. 가족이나 선생님과 제자 사이에서 너무나 비본질적인 소통만 있었던 게 저는 모두에게 상처인 것 같고요. '얼굴을 아는 사람은 많지만 마음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많으냐' 하는 건 제가 영화 속에서 하고 싶은 말 중 하나였고, 살면서 제가 항상 생각하려는 문장이죠. 우리는 어느 대학, 어느 직장 등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에 너무나 많이 치중하는 삶을 살았고 그게 과열되는 상황 같아요. '벌새'에 담고 싶었던 건 많은데 인간이 집을 찾아가는 여정과, 본질로서 소통하고 사랑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가 중요했어요. 홀로 남겨졌지만 여전히 희망적인 얼굴을 한 은희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은희 역을 연기한 박지후는 1차 때 자기는 '볼매'(볼수록 매력 있는 사람)라며 또 오디션에 불러 달라고 김 감독에게 말했다. 김 감독은 이때 일화를 전하며 "은희 캐릭터 자체가 그렇게 좀 맑고 투명한 욕망도 있고 욕심도 있다. 직접 자기 욕망을 드러내는 모습이 되게 멋있어 보였다"라고 전했다.

김새벽 캐스팅 계기를 묻자, 김 감독은 '전망 좋은 방'의 감독이자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각본을 쓴 제임스 아이보리의 말을 우선 옮겼다. 전형적이지 않은, 정상성 범주에서 벗어난, 그래서 일상에서도 매력이 있는 사람을 캐스팅하라는. 김 감독은 "일상의 매력이 스크린 밖으로도 튀어나오기 때문이라는 건데, 새벽 씨가 그 말에 되게 부합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라고 답했다.

아역은 주로 오디션으로, 어른 역은 좋아하는 배우에게 배역을 제안했다는 김 감독은 "'벌새' 캐스팅할 때도 일상의 매력이 있고 제가 같이 지내고 싶은 위주로 캐스팅한 게 있다. '정말 별로야' 하는 마음이 들면 솔직히 나의 배우를 사랑할 수 없지 않나. 배우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컸다. 삶에 면모에서도 제가 좋아하는 부분이 있어서 그런 철학을 갖고 캐스팅했던 것 같다. 어떤 역할이건 다 너무 앙상블이 잘 맞는 것 같아서 배우들에게 감사하다"고 밝혔다.

◇ 극중 유머는 모두 의도한 것… "실은 진짜 재밌는 영화"

언제나 인터뷰 시간은 부족하게만 느껴져서, 영화의 세세한 장면까지 연출의 의도를 전부 물을 순 없었다. 다만, 다른 여자애와 만나며 바람을 피우다가 다시 쭈뼛대며 돌아온 지완을 은희가 왜 받아주었는지는 안 물어볼 수 없었다. 김 감독의 답변은 명쾌했다. "주인공도 모자란 구석을 보여주자! '어이구, 답답한 것!'이라고"

김 감독은 "스토리를 위해서 지완이는 다시 등장한 거다. 나중에 '좋아한 적 없다'고 하기 위해. 저 같아도 '왜 받아줘?' 이랬다. 여자 스태프들도 지완이를 왜 받아주냐고들 했다. 근데 은희가 너무 잘나고 똑똑하기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가끔은 바보 같고 맹추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게 은희를 연민하게 한다고 생각했다. 은희의 바보 같은 실수를 보여주지 않으면 그 아이가 왜 그런 상황에 있는지 충분히 안 느껴지니까. 정말 사랑을 원하고 사랑이 고픈 아이기 때문에 그런 실수도 하는 거다. 애처로운 은희가 변하면서 관객을 안도하게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왼쪽부터 '벌새' 김보라 감독, 각각 은희와 영지 역을 연기한 배우 박지후와 김새벽 (사진=엣나인필름 제공)

 

김 감독은 또한 영화 곳곳에 담긴 '웃긴' 장면을 "완전히 의도하고" 썼다고 밝혔다. 그는 "저 진짜 유머가 중요한 사람이다. 저 진짜 웃기고 싶었다. 트위터에 '벌새' 관련된 표현을 보면 너무 좋고 재밌더라. 너무 부럽고 나도 그러고 싶고. 노잼 캐릭터는 싫지 않나"라고 반문했다.

이어, "사람들이 이 영화를 너무 진지하게 보시는데, 실은 진짜 재밌는 영화다. 제가 개그에 대한 욕심이 있다. 시나리오에도 욕심을 부려서 쓴 거다. 그래서 (의도한 장면에) 웃어주면 기쁘다. 반창고가 생리대 모양 같다거나, 아빠가 춤 연습하다 은희한테 들키니까 테니스 연습한다고 하는 것 등 깨알 같은 유머를 심어놨다"고 부연했다.

김 감독의 첫 장편영화 '벌새'를 비롯해 8~9월에는 여러 여성 감독 작품이 관객들을 만났거나 만날 준비를 하고 있다. 이와 관련한 소감을 묻자, 김 감독은 "여성들이 자기를 작게 두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능성도, 우리가 나눠야 할 이야기가 많으니까 여성들끼리 힘을 모아서 좀 새로운 물결을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최근에 '밤의 문이 열린다', '우리집', '아워 바디', '메기' 등 여성 감독의 영화들이 많이 나오고 있죠. 너무너무 기뻐요. 같이 뭔가를 해나갈 수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되게 감사하고, 여성 감독들의 영화가 한꺼번에 개봉하는 것에 관객들도 좋아하는 게 보여요. 이런 해에 제 영화를 한다는 게 뜻깊고요. 다들 정말 잘되기를 응원하고, 함께 물결을 바꾸는 그런 해가 됐으면 좋겠어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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