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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동 할머니가 소녀상 각별하게 여긴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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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원 밝힐수 없는 할머니 돌아가시고 이제 스무분 생존
김복동 할머니, 14살에 일본군에 끌려가 22살에 돌아와
할머니 영화를 통해 사회에 대한 길잡이, 메시지를 찾길
28년간 일 사죄, 역사 배상 주장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단순한 피해자 너머 여성 운동가 평화 애호가로서 읽어내야
일본 정부 거짓말로 삶이 부정된다는 분노가 강했던 할머니
소녀상, 학생들과 상호 교감하는 매개로 여기신 듯
청소년들이 더 나은 세상에서 살기를 간절히 바래
식민지 범죄 청산 과정 갖지 못해 역사 갈등 존재
불꽃처럼, 뭔가를 태워서 발화하신 분
해고자, 일본 지진피해자, 내전 여성들에게 따스했던 분

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 방 송 FM 98.1 (1820~1955)
■ 방송일 2019년 8월 5일 (월요일)
■ 진 행 배종찬 (인사이트 케이 소장)
■ 출 연 송원근 감독(뉴스타파), 윤미향 대표(정의기억연대)

영화 <김복동> 포스터

 


◇ 배종찬>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그리고 여성 인권운동가로 살다 가신 김복동 할머니의 생전 육성 잠깐 들어봤는데요. 김복동 할머니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김복동이 이번 주 목요일 8월 8일에 개봉합니다. 이 영화를 연출하신 뉴스타파의 송원근 감독 그리고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문제해결을 위해 김복동 할머니와 함께 꾸준히 싸워보신 분이죠. 정의기억연대의 윤미향 대표 두 분을 오늘 스튜디오에 모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 윤미향> 안녕하세요.

◆ 송원근> 안녕하세요.

◇ 배종찬> 영화 이야기 하기 전에 또 착잡한 뉴스가 전달돼서 마음이 무거운데요. 윤미향 대표님, 주말 사이에 피해자 할머니 한 분이 또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나왔는데. 지금 장례 중이신 거죠?

◆ 윤미향> 그렇습니다. 일요일날 오전에 서울에 계시는 한 분이 돌아가셨고요. 가슴 아프게도 이분은 성함도 얼굴도 아무것도 밝힐 수가 없는 가족이 원하지 않아서 그런 상태로 우리 곁을 떠나셨고요. 오늘 이틀째여서 내일 발인을 하는 그런 일정으로 진행을 하고 있습니다. 대부분 할머니들이 상황이 좋지 않아서.

◇ 배종찬> 이제는 연세도 많으시고. 계속 한 분, 한 분 돌아가시는 게 너무 안타까운데. 피해자 할머니분들이 지금 몇 분 정도 생존해 계시나요?

◆ 윤미향> 이제 사실은 스무 분 생존해 계시는 상태인데요. 그런데 생존해 계신 스무 분도 내일 어떻게 될지 잘 확신할 수 없는 그런 분들이 대부분이세요. 제가 오랫동안 요양병원 신세를 지고 계신 분들, 병상에서 남의 도움으로 그냥 살고 계신 분들. 이런 분들이 대다수셔서. 우리가 흔히 김복동 할머니처럼 그렇게 언론과 방송에 비쳐서 자기 목소리를 내실 수 있는 분들. 그런 분들은 불과 다섯 명도 안 되는 그런 상황입니다.

◇ 배종찬> 생전에 일본의 제대로 된 사과 한번 받아보겠다는 게 할머니들의 소원이신데요. 영화 이야기를 좀 해 볼까요. 김복동 할머니께서 살아서 문제를 해결하시겠다 이런 말씀을 많이 하셨던데요. 송 감독님께서 김복동 할머니의 생애를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들어야 되겠다 생각하게 되신 특별한 계기가 있으신가요?

◆ 송원근> 평소에 할머니께서 이렇게 윤미향 대표님이나 아니면 미디어몽구가 있습니다. 어쨌든 할머니께서 이렇게 살다가 돌아가셔버리면 이게 그냥 지워져버리는 것 같은 그런 삶이 너무 좀 허망하지 않느냐 그런 면에서 내 삶이 기록으로 남아서 두고두고 후세들이 내가 활동하고 싸워온 이야기를 좀 담아서 이렇게 계속 오래도록 새겼으면 좋겠다라는 말씀을 이분들과 많이 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제가 작년 10월쯤 이렇게 만나봬서 전해듣고 김복동 할머니라는 한 피해자면서 이 피해자를 넘는 어쨌든 이런 활동을 하셨던 분의 생을 한번 잘 담아서 관객들에게 소개를 잘 해 보고 싶다,그런 생각이 있었습니다.

◇ 배종찬> 누군가 역사는 기록이라고 하던데요. 저도 예고편을 봤는데 김복동 할머니의 생전의 육성 그리고 모습이 많이 담겼는데 이게 다 어디서 구하신 겁니까?

◆ 송원근> 이게 다 저희가 정의기억연대하고 같이 작업을 하면서 박물관 한켠에 파일이름으로만 남겨져 있었던 어떤 CD라든가 파일들입니다. 저희가 그 영화 제작을 위해서 그것들을 꼼꼼히 들었는데 그 안에 이제 지금 옆에 계시는 윤미향 대표와 김복동 할머니가 1992년 3월에 만나서 어떻게 끌려갔는지, 어디로 끌려갔는지, 가서 어떤 활동을 했었고 했는지에 대해서 20대 후반의 젊은 간사가 묻고 60대 후반의 김복동 할머니가 그것에 대해 서로 대화하는 이런 부분들까지 이렇게 좀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 배종찬> 지금 송원근 감독께서 처음 우리 윤미향 대표께서 김복동 할머니를 만나게 된 그 장면을 설명을 해 주셨는데 처음에 어떻게 만나시게 된 겁니까? 왜냐하면 피해자 할머니들은 이게 상당히 난감한 일인 거거든요, 본인의 과거를 밝히는 것이. 처음에 어떻게 인연이 되셨습니까?

◆ 윤미향> 제가 1992년 1월부터 정대협의 간사로 활동을 했는데요. 그때가 제가 28살이었어요. 사실은 28살에 할머니들이 당신들이 겪었던 참혹했던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가 않았어요. 그런데 1991년 8월 14일에 김학순 할머니가 기자회견을 통해서 내가 피해자였다라고 밝히신 이후에 정대협이죠, 지금 정의기억연대 전신인 한국정신대문화대책협의회가 피해자들이 이렇게 살아 있구나. 이렇게 목소리를 더 다른 분들이 낼 수 있겠다라는 조금 용기를 얻어서 신고 전화를 한 달 후 9월 18일에 개설을 합니다. 그런데 그 신고전화에 여러 분들이 신고를 하시기 시작했어요, 몇 분들이. 그런데 여전히 그때 한국 사회는 얼마나 못됐는지 저희들에게 저희 사무실에 전화를 해서 그게 뭐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떠드느냐. 우리 수치고 오히려 부끄러움을 드러내는 일을 떠들지 마라, 자랑하지 마라 이런 전화도 있었어요, 신고전화에. 그런데 부산의 다대포에 그런 할머니가 계신다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무작정 그냥 용기를 내서 연락했고 찾아가도 좋으냐라고 했을 때 처음에는 뭐할라꼬, 딱 굉장히 우리 할머니 무섭거든요, 처음에. 그런데 뭐할라꼬 딱 그렇게 말씀을 하셔서 그다음에 제가 뭐라고 말을 해야 될지 이게 말문이 막혀 버렸어요.

◇ 배종찬> 경상도 사투리로 억세게 뭐할라꼬라는 이야기를 하셨다는 것은 만나기 전에 그 삶이 고단하셨을 텐데 어떤 삶을 사셨던 것으로 기억을 하십니까?

◆ 윤미향> 할머니는 불과 만 14살에 끌려가셔서 집에 돌아오셨을 때도 22살이었는데. 사실은 그 당시 한국 사회가 22살 여성이 홀로 생활을 경제적인 것부터 생활을 한다라는 것에 대해서 따뜻한 시선은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바닷가에서 장사부터 공사현장이 열리면 머리에 짐보따리를 싸들고 가서 그 공사현장에 함바집이라고 불렀는데 식당을 쫙 펼쳐서 음식 장사를 하기도 하고 이런저런 쌀을 팔아서 또 다른 물건을 떼어와서 또 물건을 팔기도 하고 장사로 농사로 할머니가 해방 이후에 삶을 살아내셨다라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그런데 무엇보다도 담배와 술이 할머니에게는 외로움을 달래는 굉장히 중요한 것이었구나 하는 것을 알았어요.

◇ 배종찬> 담배와 술을 하셨군요.

◆ 윤미향> 제가 첫 할머니 집을 그렇게 어렵게 뭐할라꼬 그 목소리를 넘어서 그래도 약간의 외로움, 고독함, 삶의 피곤함을 느껴서 그래도 찾아뵙고 싶다라고 간절하게 말씀을 드렸고 할머니가 문을 열어주셨는데. 부산 다대포의 그 한 아파트 현관문을 열었을 때 방 안에서 나오는 담배냄새, 담배연기, 그리고 할머니 집의 그 벽을 둘러싸고 있는 담배연기가 만드는 누런 벽. 이런 것이 할머니의 인생을 느끼게 했다고 할까요. 그래서 처음에는 사실은 굉장히 죄송스러워서 할머니의 그 증언, 경험을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어요. 그냥 제 이야기에 대해서 저도 할머니 남해 출신이에요 그러면서 일부러 경상도 사투리를 꺼내기도 하고 제 할머니도 그런 삶을 피하려고 굉장히 고생했대요라는 이야기도 꺼내고. 그렇게 해서 다가왔습니다.

◇ 배종찬> 사실 김복동 할머니는 그래도 알려지신 분이시잖아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김복동 할머니의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드셨는데 다시 한 번 이런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든 그런 또 의미가 있다면 우리가 어디에서 뭘 찾을 수 있을까요.

◆ 송원근> 사실은 할머니께서 굉장히 노력하시면서 강인한 삶을 살아오셨다고 하더라도 그게 어쨌든 돌아가시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쉽게 잊힌다라고 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김복동이라는 이름 석 자에 담긴 그런 의미를 어쨌든 영화가 충분히 보여줄 수 있다라고 생각을 했고 그 뜻이 무엇인지 우리 오늘을 사는 우리가 오히려 그 영화를 통해서 좀 새길 수 있다면 이게 그냥 단순한 영화로써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회의 길잡이, 좀 메시지를 던지는 그런 역할을 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영화 <김복동> 스틸컷 (사진=엣나인필름 제공)

 


◇ 배종찬> 또 우리가 성노예 피해자를 다룬 이런 이야기를 가지고 사회 일각에서는 감성팔이다, 선동적이다 이런 이야기 나오는데 또 주전장이라고 하는 다큐멘터리도 극장에서 상영 중인데. 김복동을 제작하시면서 지금까지 나왔던 유사한 작품들과는 내가 달라야 되겠다. 어디에 가장 차별점을 두고 계십니까?

◆ 송원근> 일단 가장 중요한 건 김복동이라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개인적인 삶에만 국한시키지 말자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게 어쨌든 27년간의 여정이 분명히 있는 거고 27년간의 여정이라는 게 굉장히 오랫동안 공식 사죄, 법적 배상, 역사교육을 주장해 왔지만 단 한 번도 제대로 이뤄진 적이 없거든요. 일본은 아예 모든 게 지금 거꾸로 돌아가고 있는 상황이고. 그런 어쨌든 일련의 역사 과정 속에서 김복동이라는 사람이 언제 어떻게 움직였는지 이때 어떤 목소리를 냈는지. 이런 부분들이 제대로 짚어주는 것이 어쨌든 다른 다큐멘터리나 극영화나 이런 부분들과 차별점을 가지려고 했고 그 과정 속에서 단순하게 어떤 피해자가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어서 운동가, 여성운동가,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 이런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 때 오늘 지금 이 시기를 사는 우리가 김복동이라는 사람을 통해서 얻어갈 수 있는 것이 있다. 얻을 것이 있고 배울 것이 있고 우리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길잡이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 배종찬> 송 감독님께서 지금 강조를 해 주셨듯이 김복동, 영화 김복동. 그리고 김복동 할머니를 이야기할 때 우리가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라 이걸 뛰어넘어서 여성운동가로서의 역할을 해 주셨거든요. 또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해서. 그런데 사실은 연로하시고 또 어떤 경우에는 자기의 상처를 끄집어내기가 힘들 텐데 또 암, 암까지 가지고 계셨는데 이런 에너지가 윤미향 대표님, 어디에서 나오신 겁니까?

◆ 윤미향> 원래 우리 김복동 할머니께서 갖고 있는 천성적인 기질이라고 그럴까요. 그것도 굉장히 큰 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 제가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고 그때 만났을 때 할머니, 다음에 우리가 서울에서 아시아연대회의가 있는데 아시아연대회의에서 할머니 증언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을 때 그건 두 번 주저하지 않았어요. 내가 해야지. 저 일본 정부가 저렇게 거짓말을 하는데 내가 해야지라고 하셨고. 그리고 사실은 신고를 하실 그때도 큰언니도 반대하고 가족이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당신 자신의 결정으로 신고를 하시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거 보면 본인의 어떤 정의를 향한 기질이 해방 이후에도 있었고 그 전에도 있었다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고요. 무엇보다도 할머니가 이 운동을 하면서 약 28년 동안 활동을 하면서 일본 정부의 어떤 거짓말 그리고 당신의 삶이 부정된다라는 것에 대한 그런 어떤 분노가 굉장히 강했던 것 같아요. 그럼 나는 일본 정부가 그러지 않았으면 그럼 내 인생은 누가 이렇게 나를 짓밟았나.

◇ 배종찬> 그 분노.

◆ 윤미향> 그렇죠, 그 분노가 굉장히 할머니의 삶을 저렇게 불타게 했고 그리고 활동가로 나서서 인권운동가로 나서시면서 할머니가 또 어떤 것을 배우게 되셨냐면 우리 사회에 세계에 나와 같은 피해자들, 나와 같이 힘이 없어서, 배경이 없어서 당한 여자들이 참 많구나. 그럼 내가 저 사람들에게 또 어떤 용기를 줘야 될까, 어떤 희망이 돼야 될까. 또 거기에 또 새로운 기질이 끄집어내졌었어요.

◇ 배종찬> 성노예 피해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여성문제를 다루신 거네요.

◆ 윤미향> 그렇죠.

◇ 배종찬> 여성 이야기를 하면 우리가 영화 김복동에서도 키워드를 하나만 배 소장이 꼽는다면 저는 소녀상이었거든요. 그런데 지금 일본에서 트리엔날레를 보더라도 소녀상 전시가 중단되는 사태까지 있었습니다. 독일의 나치수용소 기념관에 있던 고작 10cm짜리 소녀상도 일본 정부의 항의로 전시가 중단됐다고 하는데. 이 소녀상이 영화 김복동에서 가진 의미는 뭔가요, 송원근 감독님?

◆ 송원근> 할머니께서 저희가 어쨌든 이 기록들을 쭉 보면서 이 영화를 제작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할머니께서 유독 소녀상, 평화비에 관심을 많이 보이신다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걸 할머니의 어떤 변화의 상징 같은 건데 단순하게 김복동이라는 사람이 소녀상으로만 변화되는 게 아니라 소녀상 때문에 온 학생들을 보면서 김복동이라는 어떤 운동가가 또 거기서 감화를 하게 되고 또 이 감화를 받은 할머니를 보고 또 다른 학생들, 또 다른 사람들이 오게 되고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서로 상호교감하는 어떤 매개 같은 그런 걸로 할머니가 생각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중간중간 소녀상뿐만 아니라 소녀상이 계기가 돼서 어쨌든 계속 할머니의 활동이 좀 이렇게 해외로도 뻗치고 다른 쪽으로도 뻗치는 그런 느낌을 저희가 제작을 하면서 받았었거든요.

◇ 배종찬> 세대를 넘어서는 매개, 또 국가를 넘어서는 매개로 바로 소녀상이 있는데 유난히 우리 김복동 할머니께서 청년들을 좋아하셨어요. 아이들을 좋아하셨어요. 이것도 우리 김복동 할머니의 의미가 있을 텐데 할머니에게 젊은이들 그리고 소녀상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 윤미향> 할머니는 그런 청년세대, 청소년 세대를 빼앗겼잖아요. 그래서 늘 안타까워하셨고 내가 빼앗겼던 소녀 시절, 청년 시절을 이 아이들이 똑같이 살면 안 된다 하는 말씀을 늘 하셨거든요. 그래서 그 청년세대 또 그 소녀 아이들, 청소년 아이들이 수요시위에 오거나 할머니를 찾아오거나 해외에서도 마찬가지 오게 되면 할머니의 삶을 그 아이들에게 투영하시는 것 같아요. 그래서 너희들만큼은 우리보다 좀 더 좋은 세상에서 살았으면 좋겠다라는 것이었고.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희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늘 할머니께서는 내가 너희들 때문에, 너희들 위해서 내가 아직 이 거리에 선다라고 하셨는데 돌아가시기 전에 확신을 하셨던 것 같아요. 이제 내가 죽어도 이 아이들이 이 청년들이 이 청소년들이 김복동이가 돼서 계속해서 내 목소리를 내주겠구나, 나를 기억하겠구나 하는 것 때문에 사실은 암이 걸린 이후에는 더 그 청년세대를 좋아하셨던 것 같아요.
(왼쪽부터) 송원근 감독 (뉴스타파), 윤미향 정의기억연대 대표 (사진=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제공)

 


◇ 배종찬> 잃어버린 소녀 시절을 생각하면서 소녀상에 대해서 더 애착이 갔다. 정말 가슴 뭉클하게 만드는 이야기인데요. 결국 이 김복동 작품이 우리 사회에 일본군 성노예 문제 해결을 위해서 이 영화를 보고 난 분들은 어떤 역할을 또 할 수 있다. 또 이 영화가 그 역할을 어떻게 할 수 있다. 그 말씀을 해 주신다면요.

◆ 송원근> 사실 저 같은 경우에도 영화를 이렇게 제작하기 전까지는 그냥 취재하는 사람의 그런 입장이었습니다, 저의 직업이 프로듀서니까. 그냥 안다고 생각했고 이 정도쯤은 나도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했는데 김복동이라는 한 사람의 삶을 쭉 들여다보면서 내가 알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게 굉장히 부끄러워졌습니다.

◇ 배종찬> 어떤 점에서요?

◆ 송원근> 그런 구석구석이 실제적으로 할머니가 어떤 생각을 했었고 이런 움직임이 이런 이유들 같은 것들은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그런 이유들이 보여지면서 굉장히 이게 가슴 속 깊은 데서 뜨거움 같은 게 올라오는 그런 느낌을 받았었거든요. 그런 뜨거움 같은 것들이 우리 국민들, 많은 우리 영화를 좀 보고 싶어하는 많은 관객분들한테 그런 뜨거움이 전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뜨거움이 전해져서 그런 마음을 가져야 지금 현재 어쨌든 현재 우리 사회에서 지금 이 역사를 부정하려고 하는 이런 일본 정부나 이런 사람들에게 싸울 수 있는 제대로 또 대항할 수 있는 그런 힘을 만들어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 배종찬> 우리 영화를 보면 이제 스포를 하면 안 되겠습니다마는 구체적으로 김복동 할머니의 어떤 모습에서 그런 끓어오르는 뜨거움이 느껴지셨는지. 구체적인 사례가 있으시다면요?

◆ 송원근> 저는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제작을 하면서 처음 눈물을 흘렸던 장면인데. 조선학교 학생들에게 할머니께서 장학금을 전달을 하십니다, 일본의 도쿄에 말기 암으로 돌아가시기 6개월 전입니다, 작년 6월달에. 할머니가 이 학생들을 보면서 갑자기 눈물을 흘리시는데 이 할머니가 평생을 사시면서 돌아가실 날 얼마 남겨놓지 않은 상황에서도 무엇을 찾고 싶어했구나라는 것을 굉장히 좀 마음으로 느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부분들이 저희가 느꼈던 부분을 다른 분들도 같이 좀 느꼈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으로.

◇ 배종찬> 할머니의 마음은 이런데 왜 소녀상에 침을 뱉는 청년들은 왜 그런 생각을 할까요.

◆ 윤미향> 그게 저는 단순한 현상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전후 74년 동안 우리 사회가 제대로 식민지 범죄가 청산되는 그런 과정을 우리가 회복하지 못했고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도 그런 역사의 갈등이 존재하고 있고 어느 연구자들은 위안부들이 스스로 그렇게 매춘부가 되었다라고 비난하기도 하고 어느 또 연구자들은 일본 정부는 여러 번 사과를 하려고 했지만 피해자들이 거부했다고 하고 이런 논쟁들이 계속되어 왔잖아요. 그 사이에서 또 다른 한편은 우리 사회가 그 역사의 가치라든가 인권이라든가 정의,평화보다는 대학을 들어가기 위해서 역사를 배우고 또 출세하기 위해서 공부를 하고 이런 사회가 계속되어 왔죠. 그래서 공부 못하는 아이들은 그냥 도태되고 방치되고. 그러니까 저는 그런 소녀상에 침을 뱉고 피해자들을 혐오하고 희롱하는 이런 모습들이 전반적으로 우리 사회가 왜 자기 자신의 부족함을 혹은 자기 자신의 피해의식을 약자들을 향해서 소수자를 향해서 이런 여성들을 향해서 혐오하는가 돌아볼 수 있는 또 그런 계기가 되지 않았나. 그래서 교육과 문화와 정책이 한꺼번에 이렇게 만들어져야 우리 아이들은 서로 존중하는 사회가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돼요.

◇ 배종찬> 정말 김복동 할머니 영화 김복동을 보면 좀 더 우리가 알고 있었던 김 할머님을 더 가깝게 알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데요. 김복동 할머니, 우리 사회에 어떤 분으로 기억이 되면 좋을지 한 단어로 한번 이야기를 해 주시면 좀 인상적인 그런 또 기억이 될 것 같은데 먼저 송원근 감독님, 한 단어로 한 번 좀.

◆ 송원근> 한 단어요?

◇ 배종찬> 김복동 할머니. 이런 돌발질문이 나올지는 미리 예상을 못하셨죠?

◆ 윤미향> 김복동.

◆ 송원근> 저는 할머니가 불꽃 같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어쨌든 자신이 계속 뭔가를 태워내기 위해서 계속 부딪혀서 스스로 이렇게 발화하려고 했던 어쨌든 그런 불꽃 같은 저는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 배종찬> 윤 대표님은 어떠십니까?

◆ 윤미향> 저는 불꽃 이면에 따스함.

◇ 배종찬> 따스함.

◆ 윤미향> 할머니는 그 누구보다도 저희 활동가들 참 힘들거든요. 특히 피해자와 함께한 활동가 얼마나 힘든지 몰라요. 활동가들에게도 참 따스한 분, 노동자들에게 해고된 노동자들이 길거리에 섰을 때도 따스한 분. 일본 지진 때 피해를 입은 분들에게도 일본 국민으로 보지 않고 피해를 입은 사람으로 따스함으로. 콩고와 우간다, 이라크 내전에서 성폭력 피해를 입은 여성들을 향해서도 따스한 온정으로 공감으로 그렇게 이해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배종찬> 불꽃과 따스함. 바로 김복동 할머니의 모습을 8월 8일 개봉입니다. 영화 김복동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알게 되실 텐데요. 영화 좀 많이 보러 가주시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말보다는 실천이거든요. 우리 김복동 할머니의 불꽃과 따스함을 반드시 가슴에 새기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윤미향> 고맙습니다.

◆ 송원근> 고맙습니다.

◇ 배종찬> 8월 8일에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김복동을 연출하신 송원근 감독 그리고 정의기억연대의 윤미향 대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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