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팔라완 해변 전망대에서 바라본 카펠라 호텔. (사진=이한형 기자/자료사진)
지난해 6월 12일 오전 9시(현지 시간) 싱가포르 센토사섬 카펠라호텔.
왼쪽 복도에서 들어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오른쪽 복도에서 들어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회담장 입구에서 만나 12초간 악수를 나눴다. 70년 적대관계 청산을 향한 여정의 첫 걸음을 뗀 역사적 만남이었다.
그리고 두 정상은 ▶새로운 북미관계 수립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6ㆍ25전쟁 미군 유해 수습 및 송환 등 4개항이 담긴 6ㆍ12 북미정상회담 공동성명에 합의했다.
우여곡절 끝에 지난 2월 28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2차 북미정상회담이 열렸지만 두 정상은 돌연 예정됐던 업무오찬과 공동서명식을 취소한 채 빈손으로 돌아섰다.
북한 비핵화 범위와 제재완화를 둘러싼 양측의 간극이 확연한데 따른 것으로 '핵시계'는 싱가포르 합의 이전으로 되돌아간 뒤 100일이 지나도록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하노이 회담에 성과를 기대했던 북한은 충격에 휩싸였고 40여 일간의 침묵 끝에 미국에 내놓은 요구는 '새로운 셈법'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지난 4월 12일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한 번은 더 해볼 용의가 있다"면서도 시한을 올해 말까지로 못박고 미국에 새로운 계산법을 가지고 나올 것을 촉구했다.
지난 4일 발표한 외무성 대변인 담화에서도 북한은 "미국이 지금의 정치적 계산법을 고집한다면 해결 전망은 어두울 것이며 매우 위험할 것"이라며 새로운 계산법을 내놓을 것을 거듭 요구했다.
(사진=자료사진)
3월 29일 로이터 통신 보도에 따르면 하노이 회담 당시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에게 건넨 문서에는 핵무기와 핵폭탄 연료를 미국으로 넘길 것과 모든 핵시설, 탄도미사일, 생화학무기 프로그램을 해체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북한이 강력히 거부해온 비핵화의 '리비아 모델'로 북한은 영변 핵시설 폐기를 '조미 양국의 현 신뢰수준에서 볼 때 현 단계에서 내짚을 수 있는 가장 큰 보폭의 비핵화 조치'로 내세우고 '부분적인 제재해제'를 요구했었다.
반면에 미국은 하노이 회담 이후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보좌관의 발언권이 강해지는 등 오히려 강경기조가 득세하기도 했다. 빈손 회담으로 오히려 트럼프 대통령의 국내 정치적 입지가 굳어진 결과였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북한 외무성 대변인의 4일 담화 발표 직후 "북한이 제재완화를 원한다면 핵무기를 폐기해야 한다는 미국의 입장은 북미 대화가 본격화된 이래 줄곧 명백했다" 완전한 비핵화 전 제재완화는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새로운 계산법'과 '선(先) 완전한 비핵화'로 대치하는 동안 양측은 5월 들어서는 상대에 대한 압박 수위를 한층 높이는 전략도 구사하고 있다.
북한은 지난달 4일과 9일 잇따라 단거리 미사일을 발사했고 미국은 9일 북한 화물선 '와이즈 어니스트' 압류 조치로 맞섰다.
북미대화가 중단되면서 한국의 중재역할도 시험대에 섰다.
한국은 이 달말 예정된 한미정상회담 이전에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켜 북미대화의 돌파구를 마련한다는 전략이었지만 북한이 호응하지 않으면서 물건너갈 공산이 커졌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도 10일 이달 중 남북정상회담 개최 가능성에 대해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사진=박종민 기자/자료사진)
정부는 또 개성공단 기업인 방북 승인, 국제기구를 통한 800만 달러 인도적 지원 결정에 이어 대북 쌀지원을 검토하고 있지만 북한은 시큰둥하다.
북한 매체들은 정부의 인도주의적 지원을 '비본질적, 부차적인 겉치레'로 규정하며 남한 당국이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이 4월 12일 시정연설에서 "오지랖 넓은 중재자, 촉진자 행세를 할 것이 아니라" "민족의 이익을 옹호하는 당사자가 되어야 한다"고 한 입장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문제는 이같은 교착국면을 타개할 묘수가 아직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미국 정치권이 하반기부터 내년 대선 국면에 본격 접어들면 북미관계 이슈는 후순위로 밀리고 북미대화 동력도 더 떨어질 우려가 제기된다.
트럼프 대통령이 새로운 계산법 없이 북한의 핵 미사일 실험 중단을 외교 치적으로 계속 강조할 경우 김정은 위원장이 ICBM발사 등을 통해 대미 압박 수위를 높일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것도 같은 맥락이다.
다만 북미 대화가 중단된 현 상황이 지속될수록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 모두에게 부담이 가중될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하반기 북미정상회담이 재개될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다.
북미가 압박수위를 저강도로 유지하는 가운데 상대 정상에 대한 비난은 자제하고 있는 것도 톱다운 형식에 의한 교착국면 타개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요인이다.
김용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두 지도자가 대화의 문을 열어놓고 인내를 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라며 "이달말 한미정상회담 이후 10월쯤 3차 북미정상회담이 열릴 수 있다"고 전망했다.
그는 또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 가능성이 중요한데 미국내 경제상황이 호조를 보이고 있고 높은 지지세가 유지되고 있어 정치적 부담이 없기 때문에 외교적 성과를 거두기 위한 행보에 나설 수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