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서 영화 '배심원들' 홍승완 감독을 만났다. (사진=CGV아트하우스 제공)
※ 이 기사에는 영화 '배심원들' 스포일러가 상당 부분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를 본 후 읽기를 추천합니다.국민참여재판이라는 아이템은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법적 지식을 가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전문가의 의견을 구하지 않고는 단 몇 줄의 시놉시스도 쓰기 어려웠다. 그래서 꾀부리지 않고 파고들었다. 로스쿨에서 강의를 들었고, 판결문 540여 건을 참조했으며, 국내에 배심원제 도입을 주장한 김상준 전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를 비롯해 다수의 법조인을 만났다.
2014년 9월에 초고가 나오고 나서도 2015년 말까지 계속 고쳤다. '비법조인인 배심원들은 감정적으로 판결할 가능성이 높다'는 세간의 고정관념을 본인 영화에서도 답습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더 애썼다. 그렇게 나온 작품이 지난 15일 개봉한 '배심원들'(감독 홍승완)이다.
지난 1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홍승완 감독은 "배심원제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배심원들이) 감성적으로 재판한다고 비판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 실제로 그렇지도 않고"라며 "모든 것들을 굉장히 법리적으로 충실하게 만들었다"고 강조했다.
일문일답 이어서.
▶ 2008년 처음 도입된 국민참여재판 사건을 모티프로 각색한 것으로 안다. 실제 사건을 어느 정도 가져오고 또 변형했는지.실제 모티프가 된 사건은 첫해(2008년) 12월에 나온 사건이다. 국민참여재판의 첫 번째 사건은 강도 상해 사건이었다. 제가 모티프를 가져온 건 그해 12월에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렸던 존속살인 사건이었다. 그게 그해에 굉장히 의미있는 사건으로 남았다. 실제 내용을 노골적으로 가져올 순 없어서 '존속살인 사건'이라는 설정만 가져왔다. 나머지는 제가 영화를 준비하면서 채웠다.
1심-2심 유무죄가 엇갈린 판결의 판결문 540건을 다 신청해서 받은 다음에, 그 안에서 실제 사례를 잘 섞었다. 실제로 2008년 12월에 있던 존속살인사건은 불을 질러서 어머니를 죽인 것이었는데, (영화에서는) 추락사로 바꾸면서 추락사와 관련된 사건 80여 건을 찾아서 법리에 벗어나지 않게끔 만들려고 했다.
국민참여재판과 배심원제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배심원들이) 감성적으로 재판한다는 식의 비판을 많이 했다. 가장 우려했던 부분이다. 감성적으로 판단한다는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 실제로도 (배심원들은) 안 그런다.
(※ 편집자 주 _ 2008년 시범 도입된 국민참여재판은 판사 판결과 배심원 평결 일치율이 90%에 이르자, 강력 형사 사건에만 제한됐던 것에서 벗어나 2012년부터는 전 형사재판으로 확대됐다)제가 잘못 만들면 감성만 건드린다는 느낌이 들어서, 살해 사건 공방과 유무죄가 바뀌는 이 모든 것들을 굉장히 법리적으로 충실하게 만들었다. 약간 과장된 부분도 있고 '저런 게 가능해?'라고 상상하게끔 하고 싶었지만, 그 밑에 흐르는 사건 유무죄를 다투는 것은 법리에 잘 따랐다고 생각한다. 실제 사례를 가져왔기 때문에.
'배심원들' 배우들과 함께한 홍승완 감독의 모습 (사진=반짝반짝영화사 제공)
추락사에서 자살 가능성은 유무죄를 다투는 가장 큰 쟁점이다. 80여 건의 사건에서도 자살 가능성에 대한 언급이 있다. 그럼 (영화 속) 재판부는 왜 염두에 두지 않았나? 그 많은 판결문에도 그런 경우가 많지만 피고인이 자백을 하면 기본적으로 수사를, (피고인에게) 무죄 가능성을 열어두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범행을 했다고 하니까.
피고인은 가난해서 법률적 조력을 제대로 받지 못해 국선(변호사를) 받았고, 자백했고 목격자도 있고 시체도 딱 떨어져 있으니 더 이상 생각할 여지가 없었던 사건이었다. 그러니 (재판부는) 자살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배심원들은 신중했던 것 같다. 그런 맥락에서 열심히 하다 보니까 (제출된 증거와 피고인의) 필체가 다르다는 것을 안다.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유죄가 아닐 가능성을 찾아낸 거다.
판사가 (배심원들) 얘기를 들었을 때도 굉장히 법리적으로 타당하니까 받은 거다. 제가 너무 말을 너무 많이 하는지 모르겠지만… (웃음) 이 영화를 준비하면서 가장 좀 많은 깨달음을 얻었던 게 있다. 로스쿨 청강하면서 김상준 전 부장판사님한테 들은 말이다. "법은 사람을 처벌하지 않기 위해 만든 것"이라는. 저한테는 굉장히 신선한 말이었다.
이런 걸 접하기 전의 저, 법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저는 법은 굉장히 차갑고 논리적으로 딱딱해서 증거 있으니 유죄, 이런 것으로 생각했다. (영화를) 하고 나서는 법은 한마디로 굉장히 따뜻한 이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감성과 굉장히 다른 거다. 우리 영화는 따뜻한 이성을 실현하려고 하는데, 그게 저는 사법의 본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법정을 배경으로 한 작품인 만큼, 시나리오 쓰고 고치는 과정이 꽤 까다로웠을 것 같다.이 아이템(국민참여재판) 처음 들은 다음에 시놉시스를 쓰려는데 쓸 수가 없겠더라. 제가 모르니까. 공부하는 것만 한 6개월 걸렸다. (로스쿨) 한 학기 청강하고 그사이에 대법원에 판결문 신청해서 받고. 그게 1주일 걸리는데 540건을 한 거다. (웃음) 너무 오래 걸리더라. 용어도 너무 낯설고… 판결문 보면 말이 안 끝난다. (웃음)
피고와 피고인도 다르다. 민사 사건에서는 피고/원고다. 형사 사건은 수사 단계에서는 피의자이고, 법정으로 넘어오면 피고인이 되더라. 영화사와 계약하기 전에 시나리오를 1년가량 썼고, 초고는 2014년 9월에 나왔다. 2015년 말까지 거의 계속 고쳤다. 제가 몇 고까지 쓰다가 제 동기 차성덕 감독이 각색하면서 서로 작업했다.
나중에 반짝반짝영화사 갔을 때 (영화사가) 하겠다고 해서 좋아했는데 그다음부터 오래 걸렸다. (웃음) 투자와 캐스팅 과정을 겪는 과정에서 시나리오 계속 고치고… 그게 한 1년 반, 2년 걸렸다. 우여곡절이 많았다.
'배심원들'에는 법원장, 우배석판사, 좌배석판사, 공판검사 등 다양한 법조인들이 나온다. 윗줄 왼쪽부터 배우 권해효, 태인호, 이영진, 두 번째 줄 왼쪽부터 태인호, 문소리, 권해효, 이해운. 맨 밑 사진은 국민참여재판이 열리는 법정의 모습 (사진=반짝반짝영화사 제공)
▶ 법을 가장 가까이서 다루고 사람들의 유무죄를 가르고 형량을 정하는 법조인보다, 극중 "법에 무지한 일반인"으로 표현되는 배심원단이 법을 적용하고 집행하는 데 더 조심스럽고 신중한 모습을 보인다. 두 집단의 대조가 돋보였다.기본적으로 저는 관료 사회에 대한 그런 언급도 하고 싶었다. 이 영화는 결국에는 모두가 초심을 찾아가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판사 김준겸(문소리 분)은 사법부 안에서 분명히 주류가 아니다. 18년간 법과 원칙에 충실하게 형사 사건만 한 사람은 권력욕이 없는 거다. 다들 법원 행정처 같은 곳으로 가려고 하지. 그런데 그런 그(김준겸)조차도 자기도 모르게 첫 마음을 잃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
판사들이 나쁜 사람이라는 건 아니다. 그들은 오랜 경험과 연륜이 있다. 모든 것이 확실하니까 신속하고 정확하게, 판단을 빠르게 하려는 거다. 그런 얘기도 있지 않나.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는. 신속하게 (판결)하는 것도 정의를 만들어가는 하나의 과정이다. 오랜 연륜과 경력을 바탕으로 빠르게 해야 하는데, 배심원들은 모든 것이 처음이다 보니까 증거 하나 정황 하나 사건기록 하나 모든 걸 새롭게 본 거다. 새로운 눈으로.
그렇게 꼭 (사법부) 비판의 의미가 있었던 건 아니고 두 쪽의 차이를 보여주고 싶었던 거다. 배심원들은 다 새롭게 보는 과정에서 유죄가 아닐 가능성, 진실을 발견했던 거다. 판사는 놓쳤던 초심을 생각하고. 마지막에 (김준겸이) 무조건 배심원들을 따르는 게 아니라 그 얘기 들었을 때 스스로 마지막까지도 고뇌하고 흔들린다. 그러다가 자기 임관할 때 썼던 문구("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를 보면서 초심을 되찾은 거다. 모두 다 같이 '사법의 본질'을 이뤄낸, 모두의 승리 드라마가 아닌가 싶었다.
▶ 장기백(김홍파 분)과 법의학자를 대조시킴으로써, '전문가'란 무엇인가, '발언의 권위와 신뢰는 어디서 기인하는가'를 묻는 것 같기도 하다. '배심원들'은 이렇게 한국 사회가 가진 편견을 등장인물의 대사와 행동으로 보여주고 이를 뒤집는 방식을 쓰는데. 연출한 배경이 궁금하다.우리 사회엔 계급, 빈부격차, 분단 등 어떤 병폐들이 있다. 개인적으로 제가 끌리는 병폐는 엘리트 사회인 것 같다. 전 세계에서 100위 안에 들지 못하는 대학이지만 모두가 거기에 가기 위해 그렇게 애를 쓰는 걸 보라. (웃음) 굉장히 엘리트 중심의 사회라는 생각이 든다. 좋은 권력을 다 가진 사람들이 엘리트이기도 하지만, 심지어 사회를 변화시키는 사람조차 진보라는 분들도 엘리트다. 그래서 저는 (한국 사회가) 엘리트 사회란 생각이 드는데 어… 저는 그런 거를 좀 깨고 싶은 마음이 있다. 진짜 변화는 사실 밑에서부터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음…너무 정치적으로 얘기하나? (웃음)
지난 15일 개봉한 영화 '배심원들' (사진=반짝반짝영화사 제공)
▶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장기백은 법의학자의 의견을 정면 반박하고, 법정에서 소란을 피웠다는 이유로 퇴장한다. 원래도 그렇게 빨리 빠지는 것으로 계획된 건가.예정돼 있었다. (웃음) 한국 사회가 가진 여러 가지 문제들을 배심원들의 토론 안에서 보여주고 싶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그 동네는 무서워서 못 지나간다고 한다거나, 민주주의 사회에서 다수결이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거나. '대충주의'도 있고. 그리고 요새는 인싸(인사이더 Insider, 외향적이고 최신 트렌드에 밝은 사람을 의미함)가 되게 좋은 말이지 않나. 예전에는 '아웃사이더'(Outsider)가 멋있는 말이었는데 요새는 '아싸'('아웃사이더'의 준말)가 이상한 말로 치부된다. 엘리트주의뿐 아니라 한국 사회에 담긴 여러 가지 문제들이 그냥 튀어나오길 바랐다. 우리들끼리도 얘기하다 보면 막 튀어나오듯이.
한국 사회가 너무 거기(엘리트주의)에 의존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저는) 그것에 대한 반감이 있었던 것 같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는 별것 아니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은 전문가나 엘리트에서 나온다고 하지만 결국 저는 그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내 하루하루 경험이 별거 아닌 것 같아도, 평범한 사람들의 하루하루 경험과 생각과 태도가 모여서 어떤 한 사람 인생을 구원할 수 있는 게 아니냐고. 그래서 그 평범한 사람들, 당신들의 삶이 결코 작지 않고 굉장히 훌륭한 삶이라는 걸 보여줌으로써 스스로 좀 뿌듯해지는 경험을 하게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스마트폰을 보여주며) 저는 너무 고마웠던 말이 있다. 어제도 무대인사 다니면서 영화 어떻게들 봤나 평을 열심히 찾고 있다. 그중에 '하늘향기'라는 분이 평해주신 게 있다. "나는 작지만 나의 소신이 누군가에겐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었어요. 나는 그런 큰 사람임을 일깨워 주었어요." 이 말이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인데, 그걸 느끼신 것 같아서 너무 뿌듯했던 것 같다.
▶ 다시 한번 곱씹게 만드는, 인상적인 대사가 많았다. 가장 좋아하는 대사는. 박형식은 아마도 "처음이라 잘하고 싶어서 그래요"를 꼽을 거라던데.
아, 그런가. (웃음) 저는 '싫어요!'. 시나리오에서도 (관계자들을) 많이 설득해야 했다. 이게 뭔 상황이야? 어쩌자는 거야? 이게 무슨 의미야? 이래서. 근데 저한테는 의미가 있다. 전달은 안 되지만. (웃음) 보면 (남우에게) '맞아요? 안 맞아요?'를 여러 번 물어보지 않나, 최영재(조한철 분)가. 여기에 제 나름대로 숨겨진 의미가 있다. 질문의 프레임을 바꾸고 싶었다. 감성과 이성의 판단이라기보다는,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문제인 만큼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고 봤다. 그러니 쉽게 판단하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싫어요'라고 말한 거다.
▶ 마지막에 늦깎이 법대생이었던 1번 배심원 윤그림(백수자 분)이 국민참여재판에 들어가는 판사로 등장한다. 혹시 '배심원들'을 시리즈로 만들 생각은 없나.없다. (웃음) 이 영화가 가장 큰 의미를 갖는 건 '처음'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첫 배심원이 첫 국민참여재판을 처음 한다는 게 이 영화의 굉장한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처음이라서 만들어 낸 힘이 있다고 본다. 그러니 시리즈로 나오는 건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저는 이 단 한 편으로 남는 게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끝>
'배심원들' 홍승완 감독 (사진=CGV아트하우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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