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낭규(79) 할머니. (사진=고상현 기자)
제주 4.3 당시 수많은 사람이 군경에 의해 무고하게 희생됐다. 현재 국가 차원의 명예회복이 이뤄졌지만, 여전히 소외돼 또 한 번 4.3의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
희생자 신고조차 할 수 없는 배제된 사람들, 평생을 후유장애로 고생했지만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최근 제주4.3연구소 주최로 열린 증언본풀이 마당에서 71년이 흐른 현재까지도 '그늘' 속에 있는 4.3 피해자들이 마음속에 숨겨둔 아픈 상처를 꺼냈다.
◇ 억울하게 총살된 아버지 위패 떼어지며 재차 '고통'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아버지가 마을 일도 열심히 하시고, 학교 선생님으로 일하시면서 마을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는데 왜 그렇게 돌아가셨는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김낭규(79) 할머니는 마이크를 잡자마자 이렇게 말하며 울음을 쏟아냈다.
아버지 고 김대진 씨가 1949년 6월 10일 무장대 근거지인 산으로 피신해 있었다는 이유로 총살된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김 할머니의 아버지는 신촌국민학교 선생님으로 제주시 조천읍의 내로라하는 지식인이었다. 4.3 직전까지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벌이다가 우익에게 눈엣가시가 됐다. 결국 4.3 때 희생됐다.
특히 희생 직후 아버지의 시신은 제주시 관덕정 등 노상에서 전시되면서 당시 10살이던 김 할머니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김낭규 할머니가 4.3의 아픈 상처를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고상현 기자)
또 김 할머니는 아버지가 산으로 도피했다는 이유로 조부모, 어머니가 희생되는 비극을 겪어야 했다.
"어머니는 조천지서 앞 밭에서 총살됐습니다. 젊은 여자니깐 잔인하게 죽였다고 합니다. 동네 사람들이 손을 볼 때 어머니 손톱이 하나도 안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고통스러워서 밭을 막 긁어서…."
김 할머니는 이처럼 4.3 때 억울하게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지만, 국가 사과가 이뤄진 뒤에도 재차 고통을 겪어야 했다. 2017년 4.3평화공원 내 위패 봉안소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떼어졌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사람을 죽이지도 않았고, 나쁜 일 한 게 없는데도 죽여 놓고 또 이러니 우리나라가 나라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도 가슴이 미어지고 수면제를 먹지 않으면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 4.3으로 장애 얻어 평생 고생했지만, 후유장애 '불인정'
강양자(77) 할머니.
강양자(77) 할머니의 몸은 71년 전 7살 때의 크기에 멈춰 있다. 4.3 당시 군경에게 끌려가 행방불명된 외할아버지를 외할머니와 함께 찾아 나섰다가 넘어지면서 큰 부상을 당했기 때문이다.
"넘어진 다음에 정신을 잃었는데 의식을 찾고 나서부터는 등에 콩알만큼씩 뼈가 튀어나오기 시작했어요." 현재 강 할머니의 허리는 심하게 휘어진 상태다. 이 때문에 유년 시절엔 친구들의 놀림도 심했다.
특히 4.3 직후 부모가 일본으로 피신해 강 할머니는 제주시 애월읍 광령리 외조부집에서 자랐지만, 외할아버지에 이어 외할머니마저 마을 소개 과정에서 군경에게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다.
이처럼 4.3으로 몸이 망가지고, 부모와 외조부 없이 살아온 강 할머니의 고통은 4.3 명예회복이 이뤄진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국가가 강 할머니에게 호적상 나이와 실제 나이가 달라 진술이 엇갈린다는 이유로 4.3후유장애를 불인정했기 때문이다.
"지금 와서 구차하게 거짓으로 후유장애를 신고합니까. 국가에서 신고하라고 해서 한 것인데 불인정이다 뭐다 하니깐 정말 야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분명 4.3으로 장애를 얻은 것이 분명한데…."
◇ 12살 나이에 모진 고문으로 온몸 성한 곳 없지만…
정순희(84) 할머니. (사진=고상현 기자)
정순희(84) 할머니는 평상시 4.3 당시 겪었던 고초가 떠올라 한두 시간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다고 하소연한다. 수면제도 별 소용이 없었다.
오빠가 행방불명되자 서북청년단이 서귀포시 강정동에 거주하던 정 할머니를 데려가 "오빠가 어디에 있냐"며 모진 고문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정 할머니의 나이 12살 때의 일이다.
"강정국민학교 옆에 있는 고팡(식량 창고)에 3~4달 동안 가둬놓고 심심하면 와서 전기 고문에 물고문을 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애를 노리개로 삼았던 겁니다."
정 할머니의 고통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고문에서 풀려난 뒤에도 어머니가 눈앞에서 총살되는 모습을 봐야 했다. 이후에도 군경과 서북청년단은 정 할머니의 집 살림살이와 재산을 모두 가져가버렸다.
정 할머니는 4.3 때 당한 모진 고문과 아픈 기억 때문에 현재까지도 몸과 마음에 성한 곳이 없지만, 국가는 정 할머니의 4.3 후유장애를 인정해주지 않았다.
"4.3후유장애로 신청하라고 해서 병원 진단서를 받으러 갔더니 의사가 70여 년 전 진단서를 어떻게 작성해주냐고 합디다. 내 몸은 죽어지는데 후유장애 인정도 못 받고. 한이 맺혀서 말이 안 나옵니다."
증언본풀이 행사를 주최한 4.3연구소 관계자는 "이번 증언자들은 긴 세월 동안 4.3희생자임에도 희생자의 이름에서 배제된 사람들"이라며 "이들의 증언이 슬픔으로 그치는 자리여선 안 된다. 당당하게 희생자의 이름으로 올릴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