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오후 찾은 서귀포시 정방폭포. 4.3 당시 인근에서 서귀포 주민 248명이 희생됐다. (사진=고상현 기자)
4.3 당시 248명이 단기간에 학살당한 제주 정방폭포. 아름다운 풍경 때문에 해마다 많은 사람이 찾지만, 현재 그날의 비극을 기록하는 안내판은 어디에도 없다. 어린이와 여자 가릴 것없이 무고한 사람이 학살된 자리에는 중국과의 수교를 기념하기 위한 서복전시관이 '궁궐'처럼 들어서 있다.
◇ 단란한 가정 파괴한 4.3…학살 고아는 "폭도새끼"로 놀림지난 16일 오후 서귀포시 정방폭포에서 만난 오순명(76)씨는 4.3 당시 아버지가 희생당한 정방폭포를 가리킨 후 속상한 듯 곧바로 뒤돌아섰다. 화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폭포수는 오씨에겐 수십 년 간 '보기만 해도 가슴이 찢어지는' 트라우마의 상징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오씨의 아버지는 오씨가 5살이던 1948년 11월 초순 서귀포시 하효동 자택에서 아무런 죄도 없이 군경에게 끌려갔다. 당시 오씨의 집에는 오씨와 친할머니, 어머니, 아버지 네 식구가 있었다. 이날 후로 단란했던 한 가정이 파괴됐다.
그렇게 끌려간 아버지는 현재 정방폭포 인근에 있었던 감자 전분공장에 수용됐다가 11월 말 정방폭포 위에서 총살된 뒤 폭포수와 함께 밑으로 떨어졌다. 앞서 11월 중순에는 수용소로 끌려간 남편을 면회하러 가던 중에 어머니도 군경이 쏜 총탄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오순명(76)씨가 4.3 당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뒷배경으로 정방폭포와 소남머리가 보인다. (사진=고상현 기자)
"무슨 죄를 지으셨길래 부모님이 그렇게 희생당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4.3 이후로 11월 보름날 어머니 제사를 지내고, 15일 뒤엔 아버지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11월만 되면 가슴이 아픕니다…."
부모님이 목숨을 잃은 뒤엔 오씨는 6개월여 동안 인근 외할머니 집 감자 구덩이에서 생활했다고 했다. 혹시 군경이 오씨를 잡아갈까봐 하는 우려에서다. "4.3이 좀 진정상태에 접어들어서 부모님 집에 돌아갔는데, 마을 사람들이 '폭도 새끼'라고 놀려서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했습니다."
특히 연좌제로도 오씨는 오랜 세월 고통을 겪어야 했다.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 어렵사리 교육대학을 졸업했지만, 부모님이 4.3 당시 희생됐다는 이유로 발령이 안됐기 때문이다. 관광객에게 멋진 사진 배경인 정방폭포, 오씨에겐 4.3의 아픔 그 자체다.
◇ 서귀포 주민 대규모 수용...어린이·여자 가릴 것 없이 학살
4.3 당시 현 정방폭포 인근인 서귀리는 면사무소와 서귀포경찰서가 있는 한라산 이남 지방의 중심지였다. 1948년 11월 계엄령과 함께 중산간 지역 초토화 작전이 시작되면서 2연대 1대대가 주둔했다. 또 악명 높았던 서북청년단의 사무실도 있었다.
정방폭포 인근에 위치한 서복전시관. 4.3 당시 이 자리엔 전분공장이 있었고, 이곳에 서귀포 주민들이 대규모로 수용됐다. 현재 그 자취는 남아 있지 않다. (사진=고상현 기자)
이 때문에 수용소로 쓰였던 인근 감자 전분공장, 단추공장에는 무장대로 오인 받은 서귀포시 중문면, 남원면, 안덕면, 대정면 주민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이들 대부분이 오씨의 아버지처럼 1948년 11월부터 1949년 1월까지 정방폭포 주변에서 즉결 처형됐다. 그 수만 248명에 달한다.
당시 인근에 살았던 마을 주민은 어린이, 여자 할 것없이 학살이 자행됐다고 증언한다. 이날 만난 강모(89‧여)씨 역시 서슬퍼렀던 4.3의 비극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강씨는 취재진에게 "무장대도 아닌데 억울하게 끌려가서 죽창으로 처형됐다. 어린애들도 부모 등에 업힌 채로 죽었다"며 "무서운 시기였다"고 말했다.
총살 또는 죽창에 처형돼 절벽 밑으로 떨어진 희생자 중 100여구가 수습되지 못했다. 희생 직후 파도에 쓸려갔기 때문이다.
이 날 만난 해녀 허모(81‧여)씨는 "20년 전만해도 물질 하다보면 폭포 앞 해초 사이로 뼈 같은 게 발견되곤 했다"며 "4.3 때 희생된 사람들의 유해인줄도 모른다"고 말했다.
◇ 대규모 학살터엔 안내판도 없어…서복전시관만 대규모로 조성
정방폭포 안내판. 안내문 어디에도 4.3 당시 비극을 설명하는 글귀는 없다. (사진=고상현 기자)
이처럼 단기간에 많은 수의 사람이 희생됐는데도 현재 정방폭포와 그 주변엔 4.3의 비극을 설명하는 안내판은 그 어디에도 없다. 정방폭포를 설명하는 안내판에도 폭포와 인근 서복전시관을 설명하는 글귀만 있을 뿐이다.
특히 4.3 당시 정방폭포 인근 지역에서도 가장 많은 사람이 희생된 '소남머리' 위에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찾아 제주도를 방문했던 서복을 소개하는 서복전시관이 들어서 있다. 서복전시관은 중국과의 수교를 기념하기 위해 지난 2003년 지어졌다.
서복전시관 터는 주민 학살뿐만 아니라 수용소로 쓰였던 전분공장도 있었던 곳이어서 4.3 역사를 알리는 장소로 제격이지만, 현재에는 서복 동상과 중국풍의 전시관, 공원만이 대규모로 조성돼 있다.
4.3 당시 정방폭포 인근에서도 가장 많은 사람이 희생된 소남머리엔 현재 서복전시관이 들어서 있다. 사진은 중국 건축 양식의 전시관 입구. (사진=고상현 기자)
이 날 서복전시관을 함께 찾은 오씨 역시 이 때문에 분통이 터진다고 했다. "4.3의 전국화, 세계화를 부르짖으면서 정작 대규모 학살터인 이곳에는 4.3 안내판도 없고, 중국 전시관이 들어서 있습니다. 이게 우리나라가 4.3을 기억하는 방식입니다. 어이가 없고, 화가 납니다."
제주에서도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정방폭포. 수많은 관광객이 사진을 촬영하는 폭포수는 4.3 희생자와 유가족에겐 71년이 지난 지금도 눈물처럼 떨어진다.
정방폭포 매표소 입구. 16일 오후 많은 관광객이 정방폭포를 찾았다. (사진=고상현 기자)
※ 제주 4.3 당시 수많은 사람이 군경의 총칼 앞에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제주 땅 곳곳이 이들의 무덤으로 변했습니다. 현재 관광지로 변한 그 무덤엔 4.3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많은 이가 제주에서 즐거운 추억을 남기지만, 71년 전 아픔을 기억하는 이들은 얼마나 될까요? CBS노컷뉴스는 매주 한차례씩 제주의 대표적인 관광지이자 4.3 학살터를 소개하며 4.3의 비극을 기억하겠습니다. 세 번째로 4.3 당시 248명의 서귀포 주민이 학살돼 핏빛으로 물들었던 제주 정방폭포를 찾았습니다.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