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한 세상’이다 - 《당신이 옳다》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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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유영만 한양대학교 교육공학과 교수, 지식생태학자]

냉정한 의학 기능공에서 치유자로 변신하기까지
세상의 책은 두 종류가 있다. 현장에 가지 않고 책상에 앉아서 머리로 쓴 책과 현장에서 부딪치며 몸으로 쓴 책이다. 머리로 쓴 책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이어서 와 닿지 않지만 몸으로 쓴 책은 저자의 치열한 문제의식이 독자의 몸을 헤집고 들어와 감동을 넘어 전율하게 만든다. 노명우 교수가 최근에 김원영의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에 쓴 추천사에도 이와 비슷한 말이 나온다. “이론과 지식으로 쓴 텍스트에는 논리적 엄밀성이 있지만, 머리가 아니라 살갗으로 파고드는 떨림이 없다. 삶을 회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대면한 후에 쓴 텍스트에는 논리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무게와 깊이를 담은 진심이 있다. 논리적 글은 두뇌로 쓸 수 있지만 진심이 담긴 글은 삶으로만 쓸 수 있다.” 말 그대로 《당신이 옳다》는 살갗을 파고든다. 그래서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다. 이 책은 ‘읽는 것’이 아니라 ‘읽어버린’ 책이며. ‘읽어내는’ 노력이 필요한 게 아니라 그냥 ‘읽고 말았다’는 표현이 적절한 책이다. 아니 단숨에 읽어버릴 수밖에 없도록 독자의 심리를 끌어당기는 묘한 블랙홀이 곳곳에 숨어 있다. “공감은 생각과 감정들이 실타래처럼 엉켜서 나도 어쩌지 못하고 있는 그 부위에 미사일처럼 정확하게 꽂히는 치유 나노로봇이다”(138쪽). 저자가 정의한 공감처럼 이 책은 이제껏 잘 못 알고 있었던 공감의 본질과 핵심을 파고들어 진짜 치유가 되기 위해서 기울여야 할 노력이 무엇인지를 명쾌하게 지적해준 치유 나노로봇이다.

심리적 참전이 벌어지는 현장에서 몸으로 건져 올린 언어와 저자의 문제의식으로 새롭게 정의한 개념에는 저자의 뜨거운 신념이 담겨 있다. “스타는 화려하게 시든 꽃”(38쪽)이라고 하거나 “우울은 질병이 아닌 삶의 보편적인 바탕색”(86쪽)이라고 거침없이 선언하는 저자의 신념은 나뒹구는 현장에서 몸으로 건져 올린 신념의 표현이다. “공감은 상처를 드러낼 수 있게 만들고 제대로 드러난 상처 위에서 녹아드는 연고다. 상처 위에 바로 스민다. 상처 부위를 덮고 있는 겉옷 위에 뿌리는 분무제가 아니라 옷을 젖히고 상처 난 바로 그 부위 맨살에 바르는 약이다”(158쪽). 공감을 관념적 언어로 정의하지 않고 저자 자신이 현장에서 직접 공감해본 체험적 깨달음을 갖고 ‘공감은 연고이자 치료제라’는 메타포를 동원해서 정의한다. 공감에 대한 정의에 이렇게 공감해본 적이 없다. 개념에 신념을 추가한 정의(定義)는 세상을 정의(正義)롭게 만든다. 정혜신 치유자가 공감 가는 공감에 대해 자기만의 방식으로 정의를 내릴 수 있었던 원동력은 공감 없는 정신과 의사,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냉정한 의학 기능공에서 숱한 시행착오 끝에 몸으로 깨달은 느낌을 담아냈기 때문이다. 저자 역시 한 동안 진료실에서 사람을 환자로 대하면서 약물치료를 주로 했던 자격증 있는 의사였음을 고백한다. 자격증은 있지만 과연 내가 사람을 치유할 자격이 있는지에 대한 궁극적인 의문이 들면서 진료실이 아닌 현장에서 환자가 아닌 사람을 만나면서 각성 체험을 하게 된 것이다. 각성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치유의 길을 걸어가게 만들었다. 그 깨달음의 결과가 바로 집밥같이 따뜻한 온기를 담았으면서도 고통으로 잠 못 이루는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을 위한 실전 무술 같은 치유법, 적정 심리학을 개발하게 된 것이다.

“일상의 회복이나 일상적 교감에 집중하지 않고 전문가적 치유에만 기대는 행위, 그게 일상의 외주화다”(81쪽). ‘일상의 외주화’는 ‘공감의 외주화’로 이어지면서 문제는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상에서 내가 없어지기 시작했다. 생각은 학원에 맡겨져 있고 몸은 체육관에 가 있고 병은 의사에게 맡겨져 있다 보니 내 감정을 고스란히 내가 느끼고 다른 사람과 교감할 수 있는 기회도 없어졌다. 문제가 생기면 스스로 극복하려는 노력보다 전문가에게 맡긴다. 하지만 대부분의 전문가는 “내 존재에 주목하지 않고 내 아픔에 마음을 포개지 않는 사람”(73쪽)이라서 그 들이 제공하는 어떤 도움도 와 닿지 않는다. 도움이 되는 도움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책상머리에 앉아서 관념적으로 생각하거나 진료실에 앉아서 알량한 지식으로 환자를 치유한다고 착각하는 오판에서 벗어나야 했다. “책상머리나 병원 진료실에서 도출된 이론이 아니다. 숨이 멎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고통의 현장들, 끝없이 이어지는 크고 작은 일상의 상처들 속에서 사람의 속마음을 만나며 그 한복판에서 얻어낸 나의 결론, 나의 경험담, 사례연구집이다. 무술로 치면 품새가 돋보이는 화려한 무술이 아니라 위력이 핵심인 실전 무술이다. 이것으로 사람 목숨도 구하고 늪에 빠진 사람을 건져 올리기도 했다”(314쪽). 숨이 멎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고통의 현장들에서 몸으로 체화시킨 실전 무술이 바로 저자가 정립한 적정 심리학이며 그것의 핵심적인 치유법이 심리적 CPR이다.


공감은 봄을 불러오는 일이다
심리적 CPR(Cardiopulmonary Resuscitation), 즉 심리적 심폐 소생술은 CPR을 사람의 심리적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 저자가 새롭게 조어한 개념이다. “심장 압박을 할 때는 두꺼운 옷을 젖히고 옷에 붙은 액세서리도 다 떼고 정확하게 가슴의 중앙 바로 그 위 맨살에 두 손을 올려놓는다. 심리적 CPR도 ‘나’처럼 보이지만 ‘나’가 아닌 많은 것들을 젖히고 ‘나’라는 존재 바로 그 위를 강하게 자극하는 것이다”(103쪽). 전두엽을 뒤흔들고 심장에 의미가 꽂히는 이유가 저자가 던지는 한 마디 한 마디가 격전의 현장에서 몸을 통과하며 농축된 감정과 느낌을 언어적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단어마다 저자의 숨결이 느껴지고 문장마다 아픈 사람의 절규와 아비규환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머리로 정리한 관념적 파편이 산산이 흩어지는 문장을 만나면 참을 수 없는 인식의 가벼움을 느낀다. 오랜 시간 아픈 사람과 뒤엉켜 지내면서 신체적 감각으로 깨달은 저자의 언어에는 삶과 사람에 대한 깊은 고뇌가 담겨 있다. 어느 하나의 문장도 그냥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 밑줄을 치고 호흡을 멈춘 다음 저자가 겪었을 당시의 현장 모습을 추체험해본다. 피와 땀과 눈물의 언어는 그 자체로 감동이다. 진심이 담긴 문장이 심장을 뛰게 만든다. 진심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몸밖에 없다. 몸이 겪은 진심을 머리로 설명할 수 없다. 몸으로 증거 하는 수밖에 없다. 이 책은 정신과 의사가 창백한 실험실에서 과학적인 검증을 거쳐 재단해낸 논리적 산물이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은 피눈물로 씻어내기 어려운 아픔의 현장에서 고통받는 사람과 같이 생활하면서 땀과 눈물의 합작품이다. 체중이 실린 언어에 저항할 수 없는 힘이 실려 독자에게 전달되는 이유다.

“공감받으면 마음에 봄이 온다. 강물이 꽁꽁 얼었을 때 얼음을 깨겠다고 망치와 못을 들고 나선다면 어리석다. 망치와 못을 들고 나서는 것은 판단, 평가, 설득 같은 계몽을 하는 일이다. 힘만 들지 온 강의 얼음을 다 깰 수는 없다. 봄이 오면 강물은 저절로 풀린다. 공감은 봄을 불러오는 일이다”(169쪽).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 말기 암 선고를 받은 환자의 불안과 공포, 은퇴로 맞닥뜨린 무력감과 짜증, 학교에서 왕따를 당한 아이의 아픔을 공감하기 전에 의학적으로 진단을 내린다. 공감하면 새로운 치유의 길, 얼었던 강물도 녹여 봄이 오게 만들 수 있지만, 봄이 오기 전에 첨단 의학적 진료와 치료가 이루어진다. “우울과 불안을 뇌신경 전달 물질의 불균형이 초래한 우울증 탓으로 돌리는 전문가들을 비정하고 무책임”하다고 일갈한다. 대신 이런 증세들은 “흔하게 마주하는 삶의 일상적 숙제들이고 서로 도우면서 넘어서야 하는 우리 삶의 고비들”(91쪽)이라고 말한다. 똑같은 우울증이자만 저마다 느끼는 아픔과 슬픔의 깊이와 넓이는 판이하다.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횡포이자 위협이 아닐 수 없다. 객관성이라는 이름으로 휘두르는 칼날의 몸과 마음에 상처를 만들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서구 의학의 치명적인 한계와 약점에도 불구하고 내 몸을 의사와 전문가에게 맡겨놓고 치료 대상으로 병원에 던져놓는다. 몸에 생긴 질환(disease)이지만 마음으로 느끼는 질병(illness)에 대한 심리적 충격과 아픔은 제각기 다르다. 그럼에도 몸과 맘에 생긴 모든 아픔을 의학계가 과학적으로 분류한 질환으로 일반화시켜 모든 환자를 질환 유형별로 일반화시켜놓고 치료하려고 한다.


“우울증 진단을 내릴 때 원인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만을 중심으로 하면서, 진단이 확정되면 갑자기 우울증은 생물학적 원인으로 생기는 거라며 약물치료가 전부인 것처럼 말한다(98쪽). 같은 우울증 환자라고 해도 주관적으로 느끼는 심리적 고통의 강도는 다를 텐데 말이다. 《아픈 몸을 살다》의 저자 아서 프랭크에 따르면 질환(disease)과 질병(illness)의 개념적 차이점을 분명히 구분해야 된다고 한다. 질환은 체온, 혈압, 혈당 수치나 피부 상태를 생리학적으로 환원하여 제시하는 의학적인 용어라서 주로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수치로 환산된다. 반면에 질병은 질환을 앓아가면서 환자가 느끼는 공포와 절망, 희망과 낙담, 기쁨과 슬픔처럼 느끼는 주관적 감정이다. 똑같은 질환을 앓고 있어도 그것에 대해 환자가 느끼는 주관적 감정은 천차만별이다. 예를 들어 의학적으로 위암이라는 질환은 한 가지 용어로 지칭할 수 있지만 위암을 앓고 있는 환자의 상태나 병력, 그리고 그것에 반응하는 환자의 자세와 태도에 따라 천차만별의 주관적인 질병을 앓고 있다. 문제는 의사가 환자를 진료할 때 질환으로 구분되는 몇 가지 범주로 나눈 다음 다른 환자도 그 범주에 집어넣어 일반화시켜 효율적으로 관리하려는 데 있다. 의사는 환자를 그동안 쌓은 전문 지식으로 진단하고 약으로 치료한다. 의사는 환자의 몸이나 표정 등 감정상태의 변화보다 병력을 나타내는 데이터에 근거해서 신체적이고 물리적인 변화를 보고 약을 처방해준다. 심지어 어떤 의사는 환자의 얼굴을 보지 않고 컴퓨터 스크린에 나와 있는 데이터만 처방해준다. 의사는 환자 ‘곁’으로 다가가지 않고 ‘옆’에서 약으로 통제하고 조정하며 관리한다.

하지만 똑같은 병명으로 판정되어 비록 같은 질환의 범주에 포함되었다고 할지라도 그 환자가 느끼는 주관적 질병은 같지 않다. 때문에 질환을 범주로 나누고 일반화시켜 치료하는 과정에는 유용하지만 환자 곁에서 그들이 겪고 있는 주관적 아픔을 돌보는 치유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환자가 동일한 질환에 대해서 느끼는 공포나 두려움, 걱정과 불안감은 다른 환자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다. “나는 나의 병을 객관화하지 못하고 대상화하지 못한다. 그러나 젊은 의사는 기어코 나의 병을 객관화하고 대상화하려고 덤빈다. 아마도 나의 병을 대상화시키지 않으면 의사는 나의 병을 손댈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옷을 추켜올리고 의사에게 내 맨몸을 맡길 때, 나는 내 병을 남에게 맡겨야 하는 나의 이 속수무책을 슬퍼한다. 나의 병은 나의 개별적 생명현상인 것이다. 나는 젊은 의사에게 이 운명의 개별성을 설명할 길이 없다“(39쪽). 김훈의 《바다의 기별》에 나오는 말이다. 개별적 생명현상을 이해하는 방법은 그 사람을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로 취급하지 말고 ‘질병’을 겪고 있는 사람으로 대하는 방법이다. 사람을 그 사람의 존재 이유로 다가갈 때 그 사람은 존재감을 느끼며 자신의 곁에 있어도 좋다고 허락한다. 많은 전문가가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 ‘곁’으로 다가서지 못하고 ‘옆’에서 서성이다 쫓겨난 이유도 한 사람이 겪고 있는 아픔을 마음으로 공감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공감하려면 가까이 다가가서 몸으로 반응해주어야 한다.

‘곁’에 다가가지 못하고 ‘옆’에서 서성거리는 이유
김소연의 《한 글자 사전》에 따르면 “‘옆’보다는 조금 더 가까운. ‘나’와 ‘옆’, 그 사이의 영역. 그러므로 나 자신은 결코 차지할 수 없는 장소이자, 나 이외의 사람만이 차지할 수 있는 장소가 곁”(31쪽)이라고 한다. 그 사람이 나에게 도움이 되는 전문가인지 아닌지를 가늠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옆’과 ‘곁’에 관한 거리감이라고 한다. ‘옆’에서 ‘곁’으로 다가가려면 머릿속의 지식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더 넓혀놓는다. 심지어 벽을 만들어 접근 자체가 차단되기도 한다. ‘옆’에서 ‘곁’으로 다가가려면 “상대방의 고통에 눈길을 포개는 섬세한 뜨거움(12쪽)”이 몸으로 전해져야 한다.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이 습득하고 있는 자격증에는 머리로 축적한 지식을 증명할 수 있지만 현장에서 가슴으로 공감한 내력은 증명할 길이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통받는 사람 옆에서 지켜보거나 위에서 관망한다. 전문가도 고통받는 사람 ‘곁’으로 오지 못하고 도움이 되지 않는 도움을 ‘옆’에서 주다가 쫓겨난다. “왜 심리치유 전문가일수록 현장에서 실패하는가”(15쪽). 전문가 자격증은 있지만 위기의 현장에 뛰어들어 정작 문제 자체가 무엇인지, 지금 당장 불타는 집에 뛰어들어 불을 끌 수 없는 똑똑한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고통받는 사람 ‘곁’으로 가지 못하고 ‘옆’에서 서성이며 ‘도움이 되지 않는 도움을 주다가 현장에서 ‘도움이 되는 도움’을 더 이상 제공하지 못하고 쫓겨난다. 상처로 드러난 결과를 치료하기에 급급하다 오히려 상처를 더 아프게 만드는 전문가는 전문적으로 문외한일 수밖에 없다.

“내 상처의 내용보다 내 상처에 대한 내 태도와 느낌이 내 존재의 이야기다. 내 상처가 ‘나’가 아니라 내 상처에 대한 나의 느낌과 태도가 더 ‘나’라는 말이다”(105쪽). 그런데 전문가는 겉으로 드러난 외상(질환)을 치료하기에 급급한 나머지 그 상처와 함께 어떤 아픔과 슬픔(질병)을 온몸으로 느끼며 살아왔는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말 못 할 사연이 사건과 사고 속에 꽈리를 틀고 잠복하고 있다. 사연에 담긴 아픔은 의학적인 치료 대상이 아니라 심리적 돌봄의 대상이다. 그래서 이렇게 묻고 싶다. 자격증이 있는 사람은 과연 자격이 있는가? 자격이 있을지 몰라도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의 아픔을 어루만져주는 인격은 있는가. 자격과 인격에는 쉽게 건널 수 없는 다리가 존재한다. 자격은 있지만 인격이 없는 이유는 공부를 책상에서 머리로 하면서 지식을 쌓았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아픔을 몸으로 체험해보지 않고 책상에서 지식을 축적해서 자격증은 땄지만 격전의 현장에서 뛰어들어 고통을 품어본 적이 없다. 지금까지 자격으로 폼은 잡아보았지만 타자의 아픔을 품어본 적은 없다. 자격증으로 폼 잡는 전문가와 따뜻한 가슴으로 아픔을 품어주는 전문가 사이는 똑같은 전문가지만 격이 다르다. 고통을 마주하면서 겪은 저자의 언어는 묵직한 체중이 실려 있다. 머리로 조제한 단어가 아니라 몸으로 직조한 개념의 향연이 생생한 체험현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문장 위에서 펼쳐지고 있다.


“고통을 마주할 때 우리의 언어는 거기서 벼랑처럼 끊어진다. 길을 잃는다. 그 이상의 언어를 알지 못한다... 사건이 풀리지 않을 때 현장을 다시 찾는 수사관처럼 내 언어가 끊어진 벼랑으로 돌아가 보자. 현장에 가는 이유는 그곳에 해결의 실마리가 있기 때문이다. 벼랑 끝에 선 사람에게 나는 어떤 말을 해줘야 하는가. 결론적으로 해줄 말이 필요치 않다”(107쪽). 충조평판(충고, 조언, 평가, 판단)하려 들지 말고 그로 하여금 말할 수 있도록 물어봐주는 것이다. 대답이 없어도 온몸으로 같이 공감해주어야 한다. “고통에 진심으로 주목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 그것이 치유의 결정적인 요인이다. 말이 아니라 내 고통을 공감하는 존재가 치유의 핵심이다”(108쪽). 눈길, 숨길로 상대를 이불처럼 감싸주며 상대의 고통에 진심으로 눈을 포개고 들어주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고통은 고통 그 자체도 괴롭지만 그것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사람을 미치고 팔짝 뛰게 만든다. 자기가 겪고 있는 것을 제대로 말할 수 없으니 미칠 수밖에 없고 상대가 제대로 알아주지 않으니 팔짝 뛸 수밖에 없다. 미치고 팔짝 뛰면서 더 말을 쏟아내지만 그때마다 그가 느끼는 것은 더 큰 답답함이다. 도저히 말로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다(226쪽). 엄기호의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에 나오는 말이다. 내가 직접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처럼 고통을 직접 체험할 수 없지만 고통을 겪으며 겪었던 외로움과 서러움, 말 못 했던 울분과 분노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그 사람과 함께 감정의 강물을 건널 수는 있다. 그동안 겪었던 고통(苦痛)은 얼마나 견디기 어려웠던 고통(孤通)이었는지를 진심을 담아 들어주고 눈길을 맞추며 가슴으로 느끼는 공감의 연대를 이룰 때 상처 받은 사람은 고통의 나락에서 서서히 현실로 나와 우리 속으로 편입되어 들어온다.


공감자가 아니면 전문가도 아니다
저자가 말하는 핵심은 “‘나’가 흐려지면 사람은 반드시 병든다”(39쪽)는 것이다. 내 삶이 나와 멀어질수록 위험한 이유다. 존재감이 가벼워지거나 무력해질 때 사람은 병들기 시작한다. 이 병을 치유해주는 방법은 자기 존재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것이다. “자기 존재가 집중받고 주목받은 사람은 설명할 수 없는 안정감을 확보한다. 그 안정감 속에서야 비로소 사람은 합리적인 사고가 가능해진다”(45쪽). 상대의 존재를 인정해주는 방법은 공감이다. “그런 마음이셨군요. 그러셨군요.” 온 체중을 실어 깊은 마음으로 전해주는 “당신이 옳다”는 공감이다. “사람은 자기에게 공감해주는 사람에게 반드시 반응한다”(47쪽). 반응(response)하는 사람이 책임(responsibility) 지는 사람이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결국 상대방의 미묘한 감정 변화에도 반응해주며 나는 네 편에서 생각해주는 것이다. 진정한 생각은 혼자 진공관에서 하는 게 아니라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평범한 인간이 악을 저지를 수 있는 근원도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타자가 얼마나 고통을 겪을 것인지를 입장을 바꿔서 생각하지 않는 ‘무사유’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그래서 진짜 생각은 뇌세포의 화학적 움직임과 조합으로 발생하는 과학적 추론이라기보다 뜨거운 가슴으로 타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측은지심이다. “생각은 잊지 못하는 마음이자 가슴 두근거리는 용기다“(20쪽). 신영복의 《담론》에 나오는 말이다. 생각이 마음이고 용기가 되려면 생각은 머리보다 가슴에서 시작해서 가슴으로 끝나야 한다. 그래야 계산을 시작하지 않고 수지타산을 따져 행동의 여부를 판단하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공감자가 되려면 머리로 작성된 처방전을 제공하거나 자신이 만든 정답을 주기보다 진심으로 물어봐야 한다. “누군가의 고통을 덜어주는 공감자가 되기 위해선 그 마음에 대해 ‘그’에게 물어야 한다. 돕는 자로서의 ‘내’ 견해를 말하거나 주장하기보다 ‘그’에게 주목하고 그의 마음에 대해 그에게 물어야 한다. 그의 세세한 속마음은 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전문가가 알 것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비로소 그에게 질문을 시작할 수 있다. 그만이 아는 그의 마음에서 혼돈을 끝낼 그만의 길이 나온다. 당사자가 그것을 속속들이 느끼고 만질 수 있을 때까지 그의 손을 놓지 않는 것이 공감자의 일이고 그것이 치유다”(153쪽). 공감자가 되려면 강 건너에서 크게 소리쳐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주거나 아니면 위급한 상황에서 탈출할 수 있는 해결책을 제시해서는 안 된다. “상처와 혼돈 속에 있는 사람에게 길 건너에서 전문적이고 일방적인 답을 전해주는 사람은 공감자가 아니다. 공감자가 아니면 전문가도 될 수 없다. 그런 방식으로는 상처 있는 사람을 도울 수 없기 때문이다”(151쪽). 마음을 열지 않고 머리에 설명을 쏟아부으면 무거운 머리로 고개를 끄덕일 수는 있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자기 방식으로 해결책을 찾아 나서지 않는다. “사람 마음은 외부에서 이식된 답으로는 절대 정돈되지 않는다. 답은 밖에서 오지 않고 언제나 내 안에서 발견돼야 내게 스미고 적용된다. 자기가 처한 상황의 실체, 자기 마음의 실체를 하나하나 또렷이 보고 느끼면서 자기 상황에 대한 심리적 조망권을 확보해야 마음이 정돈되기 시작한다. 온몸, 온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 진짜 아는 일이며 그렇게 알아야만 혼돈에서 벗어날 길이 보인다”(151-152쪽).


사람은 옳은 말로 변화되지 않는다
“삶을 살아내는 자들은 삶을 설명하거나 추상화하지 않는다. 그는 끝없이 짓밟히고 빼앗기는 일상의 현실을 견딜 수 없는 자이고, 그 야만의 현실에 대해 야만의 방법으로 대항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자이다. 그는 건설하는 자라기보다 거부하는 자이고, 거부함으로써 자신의 삶의 정당한 자리를 확보하려는 자이다. 이념이나 추상이 얼씬거리지 못하는 자리에서, 삶의 구체성은 뒤엉켜 들끓고, 힘찬 무질서들로 생동한다”(46쪽). 김훈의 《바다의 기별》에 나오는 말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나의 기준으로 계몽하고 훈계하지 말고 진심을 담아 반응해주며 공감해주는 길이 소통의 지름길이다. “공감이란 나와 너 사이에 일어나는 교류지만, 계몽은 너는 없고 나만 있는 상태에서 나오는 일방적인 언어다. 나는 모든 걸 알고 있고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들이다. 그래서 계몽과 훈계의 본질은 폭력이다. 마음의 영역에선 그렇다”(294쪽). 우리는 너무나 쉽게 다른 사람의 생각을 내 생각으로 충고, 조언, 평가, 판단한다. 충조평판이 시작되는 순간 소통은 불통으로 바뀌고 상대는 마음의 문을 닫고 문고리가 열리기 않도록 굳게 문을 걸어 잠근다. “누군가의 속마음을 들을 땐 충조평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충조평판의 다른 말은 ‘바른말’이다. 바른말은 의외로 폭력적이다. 나는 욕설에 찔려 넘어진 사람보다 바른말에 찔려 쓰러진 사람을 과장해서 한 만 배쯤은 더 많이 봤다. 사실이다”(295쪽). 바른말은 요즘 말로 하면 꼰대가 아랫사람에게 자기 경험과 지식으로 충고하고 조언하는 말이다. “사람은 옳은 말로 인해 도움을 받지 않는다. 자기모순을 안고 씨름하며 그것을 깨닫는 과정에서 이해와 공감을 받는 경험을 한 사람이 갖게 되는 여유와 너그러움, 공감력 그 자체가 스스로를 돕고 결국 자기를 구한다”(239쪽).


“공감이란 제대로 된 관계와 소통의 다른 이름이다. 공감이란 한 존재의 개별성에 깊이 눈을 포개는 일, 상대방의 마음, 느낌의 차원까지 들어가 그를 만나고 내 마음으로 포개는 일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나도 내 마음, 내 느낌을 꺼내서 그와 함께 나누고 소통하는 일이다”(247쪽). 소통하고 무수한 인간관계를 맺어왔지만 결정적인 한 가지가 빠진 인간관계 위에서 소통을 해왔다, 소통이 된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소통이 되지 못한 이유는 공감 없는 소통이었기 때문이다. 공감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상대방을 깊이 이해할 수 있어야 그 이해를 기반으로 가슴 깊이 공감할 수 있다. 진정한 공감에 이르는 길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그래서 궁금한 점을 진심을 담아 물어봐야 한다. “고름이 가득한 상처를 소독한 바늘로 터뜨리듯이 “그때 네 맘은 어땠는데? “라는 엄마의 질문은 슬픔과 분노로 가득 찬 아들의 마음에서 고름을 터뜨리는 질문일 수 있다. 누르고 눌러놓았던 속마음을 쏟아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엄마의 마음은 애쓰지 않아도 아들 마음에 스미게 된다”(267쪽). ‘고름을 터뜨리는 질문’, 폐부 깊숙이 와 닿은 인두 같은 메시지였다. 질문을 던지고 기다리면 고름이 터지듯 쌓였던 고통의 응어리가 밖으로 튀어나온다.


고름을 터뜨리는 질문으로 상대의 비무장지대를 건드리고 온몸으로 들어주며 공감해주면 닫혔던 마음의 길도 열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되면 “공감은 닿을 수 없는 신기루가 아니라 길목마다 흐르는 현실의 옹달샘이 된다”(249쪽). 그 옹달샘에 이르기 위해서 우리는 너무 먼 길을 돌아왔다. 공감은 누구나 노력하면 만날 수 있는 현실의 옹달샘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공감은 온몸을 갈아가며 자기 성찰을 하는 과정”(236쪽)이기도 하다. 언제나 내 마음을 열어놓고 내 생각도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 위에 상대를 한 세상의 우주로 맞이해야 한다. “한 사람의 힘이 그렇게 강력한 것은 한 사람이 한 우주라서 그럴 것이다. 근사한 수식이나 관념적인 언어가 아니라 마음에 관한 신비한 팩트다. 사람은 그 ‘한 사람’이라는 존재의 개별성 끝에서 보편성을 획득한다. 그러므로 한 사람은 세상의 전부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다. 그래서 누구든 결정적인 치유자가 될 수 있다”(110쪽). 저자는 치유자는 ‘다정한 전사’가 되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공감이 필요한 순간에는 온 체중을 다 싣는 다정한 공감자여야 하지만 공감을 방해하는 사람이나 상황을 마주했을 때는 전사처럼 싸워야 한다”(210쪽). 이런 사람이 바로 ‘다정한 전사’다. ‘다정한 전사’의 ‘다정’은 ‘따뜻한 가슴(warm heart)’으로 상대를 존중해주는 배려이고 ‘전사’는 ‘차가운 머리(cool head)로 과감하게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이라는 생각이 든다.


읽어버렸으니 읽은 대로 쓰고 쓴 대로 혁명을 일으키다
“그들은 읽었습니다. 읽어버린 이상 고쳐 읽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고쳐 읽은 이상 고쳐 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읽은 것은 굽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쓰기 시작해야 합니다. 반복합니다. 그것이, 그것만이 ‘혁명의 본체’입니다”(196쪽).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에 나오는 말이다. 이 책은 읽어버린 이상 다시 읽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내 삶의 무대 위에서 교본으로 다시 읽고 읽은 대로 쓰고 있다. 쓴 대로 내 삶으로 옮겨 나부터 공감 혁명을 일궈나갈 것이다. 독서는 그냥 책 읽기가 아니라 몸으로 읽고 실천하며 나를 바꾸고 주변을 변화시키는 혁명으로 갈 수밖에 없는 위험한 행위다. 책은 사람으로 하여금 위험한 생각을 잉태하게 만든다. 위험한 생각을 품은 책을 읽은 이상 위험한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위험한 행동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지금부터는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심리 치료자나 정신과 의사에게 필요한 공감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모든 관계와 소통 사이에서 반드시 공감에 관한 책이다. 그래서 이 책은 사람이면 누구나 다 읽어야 될 필독서가 아닐 수 없다.

“냉정히 말해서 지식인이란 고통의 곁에 있는 사람이 아니다. 고통의 곁에 잠시 머무르는 사람이다. 지식인들은 고통의 곁에서 연구하며 그 연구가 끝나면 언어를 회수해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 그 언어가 고통의 자리에,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아무리 도움이 된다고 하더라도 지식인의 자리는 고통의 곁이 아니라 자신의 연구실이며 서재이다. 아무리 현장을 누비는 지식인이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다”(290쪽). 엄기호의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에 나오는 말이다. 나는 《당신이 옳다》를 읽으면서 저자가 온몸으로 길어 올린 고통 체험의 교훈이 진료실이나 연구실이 아니라 심리적 참전이 벌어지는 현장에서 나왔음을 여러 번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다시 창백한 진료실로 돌아가지 않고 여전히 심리적 참전이 벌어지는 격전의 현장을 맴돌며 아픔을 치유하는 심리적 CPR을 시행하고 있다. 나는 그동안 너무 안이하게 연구라는 명목으로 현장에 다가갔지만 도움이 되지 않는 도움을 갖고 일방적인 계몽과 훈계를 해오지 않았는지를 반성하고 성찰해보았다. 고통의 곁으로 다가서지 못하고 고통의 옆에서 관찰한다는 명목으로 관망하고 관전해오지 않았는지 연구자로서의 나 자신의 정체성에 자문해보고 있다. 치열한 싸움으로 익힌 저자의 현장 무술에 비하면 여전히 갈 길이 먼 이상적 담론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장에 다가가야 현실을 만날 수 있고 현실 속에서 진실을 캐낼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몸에 아로새긴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서로가 서로에게 연인이자 스승이며 도반이자 반려자인 두 사람이 공감하면서 고통의 현장에서 건져 올린 합작품이기에 더욱 아름다운 감동으로 다가온다.


비가 바람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밀어붙여 나는 퍼부을 테니.

로버스트 프로스트의 「쓰러져 있다」 시의 일부로 에필로그를 대신한다. 한 사람이 비가 되면 또 한 사람은 바람이 되고, 한 사람이 바람이 되면 또 한 사람은 비가 되어 밀어붙이고 퍼부으면서 고난의 동행을 자처하며 만들어낸 아름다운 작품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을 믿고 밀어붙이고 또 다른 사람은 그 사람을 믿고 퍼붓는 아름다운 관계, 그 속에 공감이라는 강이 흘러 우리 모두 바다로 가는 희망과 용기의 연대, 바다에 이르러 손잡고 하늘로 기상하는 수증기처럼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을 꿈꾸는 눈물겨운 공동체가 되기를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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