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사법농단 의혹과 관련해 직권남용 등의 혐의를 받는 박병대(왼쪽), 고영한 전 대법관이 6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출석하고 있다. 이한형기자
'재판거래' 등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으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이 모두 구속을 면했다.
검찰이 이들의 신병 확보에 실패하면서 이번 사태의 정점으로 꼽히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 대한 수사가 차질을 빚을 것이란 우려가 나오고 있다.
박 전 대법관에 대한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을 진행한 임민성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부장판사는 7일 구속 사유와 필요성을 심리한 뒤 이날 새벽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임 부장판사는 "범죄혐의 중 상당부분에 관해 피의자의 관여 범위 및 그 정도 등 공모관계의 성립에 대해 의문의 여지가 있는 점, 이미 다수의 관련 증거자료가 수집돼 있는 점, 피의자가 수사에 임하는 태도 및 현재까지 수사경과 등에 비춰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피의자의 주거 및 직업, 가족관계 등을 종합해 보면 현단계에서 구속사유나 구속의 필요성 및 상당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기각사유를 설명했다.
박 전 대법관은 2014년 2월부터 2016년 2월까지 법원행정처장을 지내면서 양승태사법부가 박근혜 정권과 재판을 거래하는 데 개입한 혐의를 받는다.
그는 △일제 강제징용 소송 △옛 통합진보당 의원 지위확인 소송 △박근혜 전 대통령 비선의료진 특허소송 등에 개입한 것으로 검찰은 보고 있다.
박 전 대법관은 2014년 10월 김기춘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 공관에서 회동할 당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낸 민사소송의 방향을 논의한 것으로 파악됐다.
검찰은 박 전 대법관이 이미 구속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상급자로서 더 큰 결정 권한을 행사한 만큼 엄정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특히 관련 혐의를 대부분 부인하고 하급자들과 진술이 상당히 엇갈리는 점도 구속 수사가 필요한 이유로 꼽았다.
전날 함께 구속영장이 청구된 고 전 대법관도 구속 위기에서 벗어났다.
고 전 대법관에 대한 영장실질심사를 진행한 명재권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부장판사는 "본건 범행에서 피의자의 관여 정도 및 행태, 일부 범죄사실에 있어서 공모 여부에 대한 소명 정도, 피의자의 주거지 압수수색을 포함해 광범위한 증거수집이 이뤄진 점, 현재까지의 수사진행 경과 등에 비춰 현 단계에서 피의자에 대한 구속 사유와 필요성, 상당성을 인정하기 어렵다"라며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박 전 대법관 후임으로 법원행정처장을 역임한 고 전 대법관은 부산 법조비리 재판,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재판, 각종 영장 재판 등에 개입한 의혹을 받는다.
2016년 '정운호 게이트'가 불거질 당시에는 검찰 수사가 법관들로까지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수사기밀을 빼내는 데 관여한 혐의도 받는다.
고 전 대법관은 전날 열린 영장실질심사에서 자신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나 박 전 대법관과 달리 주도적으로 사법행정권을 남용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내놨다.
특히 청와대를 상대로 한 재판거래 의혹에 연루되지 않고 자발적으로 한 점이 없으며 양 전 대법원장과 임 전 차장 사이에서 배제된 측면이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신이 맡은 역할 등에 비춰봤을 때 구속될 정도의 사안이 아니라는 취지다.
다만 고 전 대법관은 사실관계가 명백한 지난 2016년 '부산 스폰서 판사' 비위 의혹에 개입한 의혹 등 일부 혐의는 인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편 법원이 박 전 대법관 등에 대한 구속 수사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아 영장을 기각했지만, '꼬리 자르기', '방탄 법원'은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검찰은 영장 기각과 관련해 "이 사건은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철저한 상하 명령체계에 따른 범죄로서 큰 권한을 행사한 상급자에게 더 큰 형사책임을 묻는 것이 법이고 상식"이라며 "하급자인 임종헌 전 차장이 구속된 상태에서 직근 상급자들인 박병대, 고영한 전 처장 모두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한 것은, 재판의 독립을 훼손한 반헌법적 중범죄들의 전모를 규명하는 것을 막는 것으로서 대단히 부당하다"고 반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