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 방 송 : FM 98.1 (18:15~19:55)
■ 방송일 : 2018년 12월 5일 (수)
■ 진 행 : 정관용 (국민대 특임교수)
■ 출 연 : 윤미향 대표 (정의기억연대)
◇ 정관용> 오늘 아침 또 한 분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님이 돌아가셨습니다. 향년 아흔일곱 김순옥 할머님. 어떤 분이셨는지 우리가 무얼 기억해야 할지 좀 들어봅니다. 일본군 성노예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 윤미향 대표 안녕들합니다. 나와계시죠?
◆ 윤미향> 안녕하세요.
◇ 정관용> 마침 오늘 수요일인데 오늘도 수요집회하셨어요?
◆ 윤미향> 네, 날씨가 너무 추웠고요. 날씨가 추운 것도 추운 거지만 또 이렇게 아침에 저희가 할머니 돌아가셨다라는 그 소식을 듣고.
◇ 정관용> 그러게 말입니다.
◆ 윤미향> 사실은 수요시위 조금 무거웠죠.
◇ 정관용> 어떤 분이셨어요, 김순옥 할머니?
◆ 윤미향> 김순옥 할머니는 사실은 평양이 고향이시고요. 평양에서 끌려가셨어요. 평양에서 끌려가셨는데 중국 쪽으로 끌려가셨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대부분 피해자들이 전쟁이 끝나고 전쟁터에서 버려져서 어떤 분의 경우는 스스로 수년이 걸려서 걸어 걸어 집으로 걸어오는 분도 계시고 또 어떤 분들은 미군의 포로가 됐다 귀환조치 당해서 돌아오기도 하고 그랬는데 또 더러 할머니들은 전쟁터에 그대로 버려진 채 위안소가 있는 그곳에 살아오신 분들이 계세요. 김순옥 할머니도 중국 지역으로 끌려가셔서 중국에 그대로 버려졌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는 돈도 없어서 그대로 사셨어요. 그런데 중국과 우리가 수교가 일찍 됐더라면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을 빨리 만들 수 있었을 텐데 우리가 잘 기억하듯이 잘 안 됐잖아요. 2005년에서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만 집도 아니고 사실은 고국이죠.
◇ 정관용> 그럼 2005년 이전에는 계속 중국에 계셨던 거예요?
◆ 윤미향> 네, 그렇습니다.
◇ 정관용> 중국 어느 지역에서 어떻게 사셨는지 혹시.
◆ 윤미향> 중국 흑룡강 주변.
◇ 정관용> 흑룡강에서.
◆ 윤미향> 결국은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그 주변에 머물러 계셨죠.
◇ 정관용> 2005년 한국으로 오신 후에는요?
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제1364차 정기 수요시위에서 이날 별세한 위안부 피해자 김순옥(96) 할머니의 영정이 놓여 있다. 이한형기자
◆ 윤미향> 오신 이후에는 다행히 그래도 고향의 친척들이나 이런 분들을 찾기는 어려웠지만 나눔의 집이 있었기 때문에 오시자마자 바로 나눔의 집으로 들어오셨고요. 오시고 나서 대부분 중국에 머물러 계셨던 분들이 언어라든가 어린 시절에 가셨다가 반 세기 이상을 전쟁터에 머물러 계셨기 때문에 중국 지역에 머물러 계셨기 때문에 아무래도 그분들에게는 중국 문화나 중국 언어가 익숙하죠.
◇ 정관용> 그렇겠죠.
◆ 윤미향> 그래서 돌아오셔서 언어나 이런 부분에 있어서 부족함은 있었지만, 소통에. 수요시위 때마다 나오셨는데, 오셔서 늘 우리에게 밝은 웃음도 주시고 언어는 그렇게 부족했지만 늘 그렇게 우리 옛 노래들 그런 노래 부르시는 것을 즐겨하셨고요. 참 사람을 기쁘게 해 주셨던 분이셨어요, 일상생활 속에서도.
◇ 정관용> 한국에 오신 후에는 항상 함께하면서 힘을 보태주셨군요.
◆ 윤미향> 그러셨습니다.
◇ 정관용> 그런데 끝끝내 일본의 사과 못 받고 돌아가셨습니다. 지금 이제 몇 분 남아계시죠?
◆ 윤미향> 이미 뉴스도 나왔지만 스물여섯 분 살아계시는데 김복동 할머니도 지금 거의 병마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 중이시고요. 오늘 수요시위에도 할머니가 나갈 수 없는 그런 상황이기 때문에 사실은 지금 시간적으로는 굉장히 절박하고 우리가 정말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 이런 것이구나라는 것이 느껴질 정도 그렇게 절박한 그런 시간 속에 살고 있습니다.
◇ 정관용> 그리고 얼마 전 북한 쪽의 위안부 피해 증언하신 분들의 상황이 전해졌는데. 등록된 분이 219명이고 공개 증언하신 분이 52명 계셨는데 그 공개증언하신 52명 할머님들이 전부 돌아가셨다면서요, 북한에서는.
◆ 윤미향>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미 북한 할머니들 그러면 역사 사진 속의 임신한 사진의 박영심 할머니. 박영심 할머니도 2006년에 돌아가셨고요. 그리고 우리가 서울에서 식사를 했을 때 여러 차례 방문을 하시기도 하셨던 할머니들도 다 돌아가셨고 공개 증언한 할머니들이란 어떤 의미를 얘기하냐 하면 증언집에 직접 증언이 수록되고 그리고 국제행사나 저희들과 함께 연대활동을 할 때 얼굴과 목소리를 내셨던 분들 또 북한 TV에 나와서 증언을 하셨던 분들 그런 분들을 의미하거든요. 그러니까 그분들이 다 돌아가셨다는 얘기는 이미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해서 사죄하라, 배상하라고 피해 당사자의 목소리를 내신 분들이.
◇ 정관용> 안 계신다는 거죠.
◆ 윤미향> 다 돌아가셨다는 걸 의미하죠.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가 지난 9월 3일 오전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 앞에서 화해·치유재단 해산을 촉구하며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
◇ 정관용> 지금 정부는 화해치유재단 해산을 선언하고 해산 절차에 들어가기는 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지난 정부에서의 한일 간 합의를 무효화 선언하고 재협상을 요구하거나 그러지는 않겠다고 하고 있어요. 그러면 공식적으로 정부 차원에서는 일본 정부에 공식 사과와 배상을 요구 안 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이거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윤미향> 사실은 안 하고 있죠. 정말 답답한데요. 피해자들은 계속 뭐라고 그럴까요. 새 정부 들어서서 굉장히 중요한 발표들, 선언들을 듣고 있었거든요. 피해자 중심주의에 입각해서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피해자들의 명예와 인권 회복을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다. 화해치유재단 10억 엔 반환도 피해자와 관련 단체들의 의견을 수렴해서 진행할 것이다.
그런데 화해치유재단 해산선언이 거의 뭐 피해자들. 수많은 할머니들이 이미 이별을 많이 한 이후에서야 겨우 발표가 됐고요. 그런데 그것도 우리 김복동 할머니 말씀대로 와르르 와르르 무너져야 그게 화해치유재단이 해산되는 거지 우리가 어떻게 믿겠노. 그 표현이 지금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의 현주소라는 생각이 들어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진행되는 게 없고 그렇다고 요구가 전달되는 것도 없고 일본 정부는 계속해서 부정하고 있고 책임을 회피하고 있고 우리 정부는 일본 눈치를 보면서 여전히 침묵하고 있고. 그런 상황입니다.
◇ 정관용> 한마디로 뭣 좀 할 것처럼 하더니 결국은 아무것도 안 되고 있는 이거네요?
◆ 윤미향> 그런 거죠, 그런 거죠.
◇ 정관용>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슬픈 날 슬픈 내용으로 인터뷰를 마무리하게 되는군요. 고맙습니다.
◆ 윤미향> 고맙습니다.
◇ 정관용> 정의기억연대 윤미향 대표였고요. 아까 우리 김순옥 할머니 노래 부르기 좋아하신다고 했죠. '목포의 눈물' 노래 잘 부르셨답니다. 잠깐 함께 듣죠. (* 노래 음원 '나눔의 집'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