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17일(현지시간) 한-이탈리아 정상회담에서 국제사회의 대북제제 완화 필요성을 다시 한번 언급하면서 7박9일 일정의 이번 유럽 순방 목적 가운데 한 가지가 명확해졌다.
이탈리아를 공식 방문중인 문재인 대통령이 17일(현지시간) 이탈리아 총리궁 공식 환영식에서 쥬세페 콘테 총리와 함께 서 있다. (사진=청와대 페이스북)
문 대통령은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쥬세페 콘테(Giuseppe Conte) 총리와 취임 후 첫 정상회담에서 "영변 핵시설이 폐기될 경우 비핵화는 상당 부분 실질적 진전이 이뤄지는 만큼 북한이 비핵화를 계속하도록 국제사회의 격려 및 유인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국제사회의 격려 및 유인조치'라고 표현했지만 사실상 영변핵시설 폐기를 전제로 대북 제재 완화 필요성을 공론화한 셈이다.
문 대통령의 이같은 언급은 지난 15일 엠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북한 비핵화가 되돌릴 수 없는 단계에 왔다는 판단이 서면 유엔 제재 완화를 통해 비핵화를 촉진해야한다"고 언급한 것에서 한 발 더 나간 것으로 평가된다.
유럽순방 출발 직전 영국 유력 방송 BBC와의 인터뷰에서도 "비핵화가 되돌릴 수 없는 상태까지 간다면 제재도 완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역시 이보다 구체적인 대북제재 완화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문 대통령은 같은 날 피에트로 파롤린(Pietro Parolin) 교황청 국무원장이 성베드로대성당에서 집전한 '한반도 평화를 위한 특별미사' 직후 연설에서도 "한반도에서의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체결은 지구상 마지막 냉전체제를 해체하는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엠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대화를 나누는 문재인 대통령 (사진=청와대)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을 평화적인 방법으로 구현한다는 우리 정부의 목적을 유럽에서 연일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문 대통령이 연일 대북 제재 완화 필요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수십년간 진행된 북한의 핵무장을 일거에 해제하는 과정 자체가 까다로운 것은 물론, 북한의 핵무장 상대국인 미국의 정책변화 등의 변수도 부담으로 작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특히 유럽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미소 냉전시대에 대륙 곳곳에 핵무기 배치와 철수 과정을 겪은 경험이 있는 만큼, 지구상 마지막 남은 냉전 국가 해체 과정에 과거의 유연성을 십분 활용해달라는 호소도 담겼다.
미국을 제외한 유럽 국가 대부분이 비핵화 중재에 적극 나서는 모양새를 만들어, 비핵화 과정 자체를 '되돌릴 수 없는' 프로세스로 공고히 만들기 위한 차원으로도 풀이된다.
문 대통령은 19일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 참석차 벨기에 브뤼셀을 방문하는 기간에도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고 대북제재 완화 필요성을 언급할 것으로 보인다.
영국 역시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다.
또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도 취임 후 두 번째 정상회담을 여는데, 독일은 안보리 상임이사국은 아니지만 유럽 내에서 발언권이 높다는 점에서 '중재외교의 판'을 키우는 데 적극 활용할 것으로 예상된다.
문제는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를 전제로 한 대북제재 완화에 대한 미국의 반응이다.
'최종적이고 완전히 검증된 비핵화(FFVD, final, fully verified denuclearization)'를 주장하는 미국 정부가 문 대통령의 대북 제제 완화 지형 넓히기에 과연 동의할 수 있느냐다.
미국 정부의 FFVD에는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Irreversible dismantlement)가 포함된 개념이지만 해석 기준을 놓고 우리 정부와 미묘한 온도차가 감지된다.
문 대통령은 평양 남북공동선언에서 합의한 대로 '미국의 상응조치'가 동반되면 북한 핵개발의 심장부인 영변 핵시설 영구 폐기가 이뤄질 수 있고, 이 지점이 '되돌릴 수 없는 단계'이기 때문에 대북제재 일부 완화를 통해 더욱 속도감 있는 완전한 비핵화가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이미 개발된 핵탄두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등의 완전한 폐기 등을 '되돌릴 수 없는 단계'로 보수적으로 해석해 한미간 견해 차이가 존재한다는 우려가 끊임없이 제기된다.
2차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최근 "(북미간) 많은 좋은 일들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한다"면서도 "다만 그것(북한 문제)은 복잡하다"고 언급한 것도 강력한 대북 제재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는 점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해석됐다.
평양 남북정상회담으로 북미간 대화 교두보가 다시 확보돼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방북했지만, 이후 10일이 다되도록 스티븐 비건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가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과 대화조차 시작하지 못한 점도 미국 입장에서는 불만인 것으로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