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서울 을지로 국립중앙의료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단역배우 두 자매 빈소에서 한 조문객이 벽면에 붙은 추모 게시물을 보고 있다. (사진=이진욱 기자)
굵은 빗줄기가 다소 잦아든 28일 오후 3시쯤, 서울 을지로에 있는 국립중앙의료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단역배우 두 자매 빈소에는 조문객들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었다. 애써 미소 띤 얼굴로 조문객 한 명 한 명에게 "고맙다"고 전하는 어머니 장연록씨 눈가는 젖어 있었다.
9년 만에 치러지는 장례식이었다. 어머니 장씨는 "(두 딸이) 갑자기 떠나버리고 내가 쓰러지는 바람에 장례식을 못 치르고 지금까지 왔다"고 말했다.
앞서 지난 2004년 드라마 촬영 현장에서 만난 단역배우 반장 등 관계자 12명에게 성폭력을 당한 큰딸은 5년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6일 만에 둘째까지 세상을 등졌다. 동생의 권유로 접했던 드라마 단역배우 아르바이트였다. 가해자들의 끊이지 않는 협박과 경찰 수사 과정에서 2차 피해를 입은 큰딸은 '죽음만이 살길'이라는 유서를 남겼다.
어머니 장씨는 장례식 전날 전화통화에서 "오늘 하루가 엄청 길다"고 했다.
"9년 전 오늘 우리 애와 하루 종일 함께했던 때가 생각나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어요. 오늘, 엄청 긴 하루네요…."
이날 빈소에 놓인 영정 속 두 자매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조문객을 맞이하는 공간 벽 한 켠에는 자매를 추억하도록 돕는 사진과 학생증, 장학증서 등이 걸렸다.
추모글을 적는 공간은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이제 당신들을 기억하게 되어 너무 미안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더 이상 침묵하지 않겠습니다"라는 조문객들의 다짐으로 빼곡했다.
두 딸에게 보내는 어머니 장씨의 글도 눈에 띄었다. "그동안 우리 딸들의 엄마여서 행복했고, '엄마'라고 불러줘서 고마웠고 감사했습니다. 편히 천국에서 잘 지내렴. 훗날 엄마 만나면 늙었다고 못 알아보면 안 됩니다. 잘 가라. 잘 가라. 우리 딸들."
단역배우 두 자매 빈소에 조문객들의 추모글이 붙어 있다. (사진=이진욱 기자)
두 자매의 발인은 이튿날인 29일 오전 7시다. 장씨는 "장례식이 끝나면 다시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에요. 장례식에 많은 사람들이 와서 방명록에 서명하면 그 힘을 바탕으로 다시 싸워야죠. 경찰서에도 가고, 가해자 집·회사 앞에 가서 1인 시위하면서 유인물도 돌리고 계속 싸울 겁니다."
그는 "지금, 딸들과 함께했던 모든 순간이 떠오른다"며 한숨지었다.
"무엇보다 '엄마' 소리를 많이 듣게 해 줘 고맙죠. 그때는 '엄마'라는 말이 그렇게 좋은 말인지 왜 몰랐을까요…. 딸들아, 내가 갈 때까지 편안하게 잘 있다가, 내가 따라가면 못 알아보지 말고 기쁘게 맞이해 주거라."
자식 잃은 부모의 상처를 다시 한 번 들춰내는 듯해 '죄송하다'는 말을 건넸지만, 장씨는 오히려 "괜찮다. 고맙다"고 답했다.
"나 혼자 가슴속에 묻고 싸워 왔는데…. 이제는 사건을 알게 된 사람도 많이 생기고, 많은 이들이 추모해 주니 딸들도 천국에서 조금은 더 편안하게 지낼 수 있을 거라 믿어요. 꼭 그래 줬으면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