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버스 앞에 고급 승용차와 승합차가 줄줄이 서 있다.
스승의 날이었던 지난 5월 15일, 이른 아침이지만 빨강, 파랑 옷을 입은 사람이 웃으며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든다. 잠시 후 버스가 떠났다. 손을 흔들던 이들도 행동을 멈추고 재빨리 차에 올라타 어디론가 사라졌다. 선거운동 중인 괴산군 예비 후보자였다.
충북 괴산군 괴산읍 중심에 붙어 있는 군수 예비후보의 현수막.
서울에서 승용차 거리로 두 시간가량 떨어진 충청북도 괴산군.
현직이던 나용찬 전 괴산군수가 선거법을 위반해 최근 직위를 상실했다. 덕분에 괴산은 6차례의 지방선거에서 4명의 군수를 뽑았다. 하지만 4명 모두 예외없이 처벌을 받았거나 현재 재판이 진행중이다.
군의 중심은 괴산읍 가운데 있는 '시계탑 사거리'이다. 공식선거운동기간 전이지만 시계탑 사거리 주위에 웃고 있는 예비후보자 현수막이 걸려있다.
근처 약국에 들어가 봤다.
"약사님, 괴산이 선거법 위반으로 군수 4명이 처벌받았는데요. 이번 선거는 어떨 것 같으세요?"
웃으며 약을 건내 던 약사 김모씨(남‧57)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 약국 밖으로 걸음을 옮긴 김씨는 지나가는 차를 바라보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했다.
"정책이나 공약 차이도 없고... 조그마한 동네에서 네 편, 내 편 싸움이 되다 보니 선거만 하면 갈기갈기 찢껴져 앙심만 남게 됐네요. 사실 괴산이 외부에서 보는 것처럼 크게 비리의 온상이진 않아요"
이곳에서 30년 넘게 약국을 운영한 김씨는 그동안 괴산에 있었던 군수 선거 뒷이야기를 시작했다. 인구 3만 8000명의 괴산군은 한 집 건너 한 집 사람을 다 알 만큼 작은 군이다. 지인과 친인척이 대부분인 만큼 민심도 좋았다. 1995년 지방자치제가 시작되면서 지역 분위기가 달라졌다.
선거 때가 되면 사람들이 편으로 나뉘어 선거운동을 했다. 선거가 끝나도 서로 앙금이 가라않지 않았다. 지역 인구 대부분이 연세가 많은 노인인 만큼 화해도 쉽지 않다. 작은 군에 선거는 반복됐고 지금은 민심이 완전히 갈라졌다.
"괴산이 사람도 순하고 인심 좋은 동네였는데 지금의 그렇지 않아요. 지금의 선거는 지역 발전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웃기는 이야기지만 이런 선거는 없애야 해요"
김씨는 농담처럼 웃으며 말했지만 얼굴 한편에는 씁쓸함이 가득했다. 그는 지금같은 인기투표식 선거가 이어져 또다른 '불명예' 군수가 나올 것을 걱정했다. 김씨는 이번 선거에는 꼭 깨끗한 사람이 당선돼서 잘못된 고리를 끊어 줄 것을 바랐다.
젊은 사람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시계탑 사거리를 돌아다녔다. 한 시간이 지나도록 20~30대를 만나기 힘들었다.
괴산읍의 중심인 시계탑 사거리 앞 대로. 한시간 가량 서 있었지만 거리에서 젊은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근처 가게를 둘러보니 젊은 자영업자 김모씨(여‧43)가 눈에 들어왔다. 조심스레 인사하며 그에게 방문 목적을 밝혔다. 김씨는 자신이 느끼는 괴산 군수선거의 현실을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지역에 오래 있던 사람이 계속 비리를 일으키는 거 같아요. 차라리 인지도가 많지 않지만 이 지역에 오래 있지 않은 외부 사람이 더 깨끗하고 잘 할 것 같아요"
괴산의 젊은 인구는 턱없이 부족했다. 김씨 역시 젊은축에 속한다고 했다. 그러다보니 정책도 어르신에게 맞춰졌다. 선거는 어르신들의 지인 선거가 됐고 새로 뽑힌 군수는 계속 비리를 저질렀다. 젊은 사람들은 지금의 선거 분위기 속에는 어떤 기대도 하지 않았다.
"도시에서 살다 이곳에 왔는데 선거 문화가 달랐어요. 이곳은 정책 선거가 아닌 지인 선거예요. 그래서 전 오히려 이 지역에서 오랫동안 활동하지 않은 사람을 군수로 뽑으려고 해요"
괴산 군민들은 모두 '제발 깨끗한 사람'을 원했다.
(사진=네이버 지도)
괴산에서 승용차로 약 2시간 30분 떨어진 전라북도 임실군.
읍 주변에서 여러 공사가 한창이었다. 인근에는 군부대, 호국원, 환경연구원, 농공단지 등이 있어 괴산군과는 분위가 사뭇 다르다.
임실군 역시 지방자치제도가 도입된 이후 그 동안 5명의 군수를 배출했지만, 전원이 처벌을 받은 곳이다. 이 곳 역시 괴산군처럼 '군수들의 무덤'으로 꼽히는 곳이다. 임실군 심민 군수도 선거법 위반으로 처벌받았지만 직위상실형은 겨우 면했다. 심 군수는 이번 선거에서 다시 출마한 낸 상태다.
임실군의 중심은 시외버스터미널 앞으로 뻗은 '운수로' 일대다.
지역 분위기를 알기 위해 한 군수후보 사무실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지역에 오래 계신 어르신 한분을 만났다. 김모씨(남‧88세)는 산전수전 다 겪은 임실군수 선거 뒷이야기를 해줬다.
"도시형과 시골형은 선거 운동방법이 달라요. 도시는 홍보 책자만 보고 사람을 선택할 수 있지만 시골은 농민과 부딪히고 오랜 세월을 같이한 사람을 선호합니다. 그래서 선거 후에도 갈등이 오래 가요. 좋은 것으로 1등 하면 좋은데 군수 낙마로 늘 이름이 오르내리니 부끄럽네요"
이야기를 풀어가던 김씨가 갑자기 대화 주제를 바꿔 자신있게 말했다.
"그래도 임실이 전국에서 치츠로 제일 유명합니다"
전현직 군수 4명이 선거법 위반으로 처벌 받은 임실군. 현수박을 건 임실군수 예비 후보들은 '깨끗함'을 강조했다.
임실은 괴산군보다 젊은 사람이 눈에 자주 띄었다. 식당에 들어가 사장님께 군수 선거 분위기를 물었다.
"부끄러워 죽겠어요"
TV를 보며 식사 중이던 박모씨(남‧52)가 답답한 마음을 드러냈다.
"지인들에게 내 고향이 임실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부끄러우니까"
김씨는 요즘 임실에서는 친구끼리도 어떤 사람을 뽑았는지 서로 말하지 않는다고 털어놓았다. 비리를 일으키면 뽑은 사람이 욕을 먹는 분위기였다.
"이곳 어르신들, 선거로 갈등이 심해요. 젊은 사람들? 군수 선거 기대도 안 해요. 뽑을 사람이 없어요. 그냥 제발 임기만 잘 채워주고 문제만 일으키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50대가 이곳에서 젊은 축이라는 김씨는 임실에 부임할 예비 군수에게 부탁 아닌 부탁을 했다.
시장에서 만난 이모씨(여‧60)의 반응도 비슷했다. 그녀는 "겉으로는 모두 잘 지킨다면서 뒤로는 다 그렇지 않았다"며 "이제는 제발 깨끗한 사람이 와서 군민 마음을 좀 편하게 해줬으면 좋겠다"고 속마을음 털어놓았다.
임실 군민들은 모두 '제발 깨끗한 사람'을 원했다.
군수 비리가 4번 이상 발생해 처벌 받은 군 지역.
1995년부터 6월 27일 1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실시된 이후 현재까지 비리로 사법처리를 받은 군수는 총 66명이다.
충북 괴산군, 전북 임실군, 경북 울릉군, 경북 청송군 등 4곳은 전‧현직 군수 중 4명 이상이 비리로 처벌받았다.
최수일 경북 울릉군수는 처벌을 받았지만 가까스로 직위상실형은 면했다.
그밖에 임창호 경남 함양군수, 차정섭 경남 함안군수는 현직 군수 신분으로 구속돼 재판중이다. 강진원 전남 강진군수, 임광원 경북 울진군수, 한규호 강원 횡성군수는 구속되진 않았지만 조사나 재판 이뤄지고 있다.
취재중 만난 괴산과 임실의 군민들 반응은 비슷했다.
지역 유권자들은 지금의 선거 방식이 지역사회 현실과 맞지 않다고 평가했다. 지역사회가 좁다 보니 특별한 정책 선거가 이뤄질 수 없다고 보고 있다.
후보자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상태에서 건전한 토론 문화도 없어 상대후보를 음해하는 이야기도 끊이지 않았다. 선거제도를 없앨 수도, 투표를 하지 않을 수도 없다. 군민들은 그저 이번은 그러지 않기를 바랄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