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당했다." 한국 사회에서 불감증에 가까운 성폭력 인식이 '#미투'(Me too) 운동으로 크게 나아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옵니다. 개인이 희생을 감내하는 폭로 방식에 기댈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목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보다 평등하게 살아갈 세상, '#미투' 너머를 짚어봤습니다. [편집자주][글 싣는 순서]
① "예쁘다"는 말도 성폭력일 수 있어요② 女문인에게 "00선생님이랑 술 먹는데 올래?"③ 방송작가 '미투'…"동료 아닌 기쁨조였다"<끝>
(사진=자료사진/스마트이미지 제공)
"젊은 여성 문인이나 작가 지망생에게 어떤 문인 그룹 인사가 밤에 전화를 걸어 말한다. '지금 00선생님이랑 술 먹는데 올래? 인사시켜 줄게.' 해당 여성은 거절하기 힘들다. 안 가면 찍히니까."
지난 1년여 동안 문단 등 문화예술계 성폭력 문제에 매달려 온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이선경 변호사는 "(문화예술계 성폭력과 관련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전했다.
"술자리에 불려 나간 여성 문인에게 옆에 앉아 있던 유명 작가가 갑자기 키스를 하려 든다. 일단 뿌리치고 나온 뒤 나중에 함께 있던 문인들에게 '00선생이 이랬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 문인들이 '나는 못 봤다'고 답한다."
이 변호사는 "여성 문인은 '내가 환각을 봤나?'라고 자기를 의심하게 된다"며 "특별한 일이 아니다. 문단에서 수십 년 동안 지속돼 온 것"이라고 말했다.
젠더 문제를 깊이 연구해 온 한림대 사회학과 신경아 교수는 "어느 영역에서든 성폭력 사건이 수없이 많았는데도 제대로 이야기 되지 못해 온 것은 검경·대학·문단·언론 등 주류 권력이 여전히 남성들에게 쏠려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최근 들어 많이 달라지고는 있지만, 여전히 '성희롱'을 범죄로 인식하지 않는 측면이 있다. 얼마 전까지 여성학자들이 성희롱을 성폭력에 포함시켜 이야기하면 '성폭력은 강간 또는 강간에 준하는 폭력이잖나' '성희롱이 왜 범죄냐'라고 가볍게 여기는 분위기였던 게 사실이다."
신 교수는 "여기에는 성희롱이든 성추행이든 성폭행이든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폭력이 발생했을 때 그것을 문제적 행위로 인지하지 못하는 인식이 작동한 것"이라며 특히 여성이 그 대상일 때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여성혐오라는 문화적 코드를 깔고 있다"고 진단했다.
"최영미 시인 등이 이야기한 것처럼, 성폭력 가해자가 엄연히 존재하고 더욱이 그것을 수십 명의 사람이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문단은 이 문제를 애써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여자에게는 그 정도 해도 되는 것 아냐?'라는 비뚤어진 인식이 배어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여성혐오다."
◇ "참아라? 덮어라? 자존감마저 훼손시키는 성폭력 피해, 결코 안 잊힌다"
지난해 3월 8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3·8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열린 조기퇴근 시위 '3시 스톱(STOP)'에 참가한 여성노동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박종민 기자)
결국 "성폭력과 권력이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는 점을 인지하는 과정은 대단히 중요한 전환점"이라는 것이 신 교수의 지론이다.
"성적인 발언으로 상대방이 고통을 느꼈다면, 그 말을 한 사람이 '선의의 표현이었다'고 아무리 항변하더라도 선의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표현에는 권력을 지닌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 수직적이고 위계적이고 폭력적인 다양한 메시지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피해자가 느끼는 고통 역시 복합적일 수밖에 없다."
신 교수는 "주변에서는 피해자에게 '그때 이야기하지 그랬어' '덮어 버려' '참아라' 등의 말을 쉽게 하는데, 피해자 입장에서는 결코 잊히지 않는 것"이라며 "단순히 성적인 메시지를 넘어 자신이 몸담은 조직이나 영역 안에서 굉장한 무력감을 느끼도록 만들고, 스스로를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여기게 되는 식으로 자존감마저 훼손시킨다는 데 문제의 본질이 있다"고 분석했다.
활동가로서 수십 년째 성폭력 피해자들을 끌어안아 온 한국성폭력상담소 이미경 소장은 "성폭력이란,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경제적이든 자신보다 못하다고 여기는 사람에게 가하는 모든 성적인 언행"이라며 "이러한 본질을 보면 결국 성폭력은 권력 문제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고 규정했다.
"성폭력 사건을 대하는 우리네 시각은 몹시 이중적이다. 텔레비전에서 보는 성폭력 문제에는 공분하지만, 정작 자기 주변 누군가가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될 경우에는 굉장히 달라진다. 관계의 밀접도에 따라 당장에 피해자를 의심하면서 돌아서고, 오히려 가해자를 옹호하는 것이다."
이 소장은 "이러한 문제에서는 누구 하나도 비껴갈 수 없다고 본다"며 "'저런 짓은 괴물들이나 하는 것이지 나와는 상관 없어' '저런 나쁜 놈들은 반성해야 돼'라는 생각에 몇몇 가해자를 솎아 내는 것으로는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이 점에서 지금 각계각층으로 번지는 '미투' 운동은 그동안 성폭력 문제를 대하던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그 연장선상에서 민변 이선경 변호사는 서지현 검사, 최영미 시인 등이 용기를 내 폭로한 성폭력 피해 사실마저도 선정적으로 활용하는 데 급급한 언론 행태를 꼬집었다.
◇ 진보 진영조차 빈약한 성평등 감수성…"'미투' 운동, 또 하나의 고비"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 1주기인 지난해 5월 17일 서울 신논현역 인근에서 열린 추모 문화제에서 참가자들이 강남역 방면으로 행진하는 도중 묵념을 하고 있다. (사진=이한형 기자)
이 변호사는 "용기를 내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는데, 언론에서 폭로자의 피해 사실에 집착하거나 몇몇 기라성 같은 문인들 신상 밝혀내는 데 힘을 소비하면 달라지는 것이 없다"며 "폭로 그 자체나 사생활 캐기가 아니라, '그러면 성폭력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시스템이 만들어져야 하는가'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림대 사회학과 신경아 교수는 지금 확산되는 '미투' 운동을 두고 "또 하나의 고비"라는 표현을 썼다. 여기에는 이른바 진보 진영의 빈약한 젠더 감수성을 향한 뼈아픈 비판이 담겼다.
"진보도 어떠한 측면에서의 진보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과거, 그러니까 지금 (한국 사회 주류인) 386세대가 민주화운동을 하던 1970, 80년대 이슈는 정치적 민주화, 계급 불평등 해소를 위한 노동운동 등이었다. 정치적이거나 계급적인 문제에 대해서만 진보적인 의식을 가졌던 것이다."
신 교수는 "당대는 여성이 공적 영역에 들어가기 훨씬 어려운 환경이었기에 진보 진영 지식인이나 사회운동 리더 역시 남성이 주류를 이뤘다"며 "그들은 스스로 문제의식을 지닌 (정치적 민주화, 계급 불평등 해소 등) 분야에서는 확실히 진보적이었지만, 이른바 일상의 영역이나 젠더 영역에 관한 문제의식은 희박했다"고 진단했다.
"당시에는 젠더 영역 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더라도 파묻혀 버렸고, 진보 진영 안에서조차 성폭력 문제를 공론화하기에는 더욱 더 어려웠다. 여성운동계에서 그러한 문제를 제기하기라도 하면 오히려 '분리주의다' '전선을 약화시킨다'는 식으로 커다란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는 "진보 진영 안에서 성불평등, 성폭력 등 젠더 이슈를 본격적으로 제기한 것은 2000년 '영페미니스트'(Young feminist)들이었다"며 "그때부터 진보 진영에서도 젠더 감수성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게 됐고, 급기야 지금 '미투' 운동으로 번지기까지 20년 가까이 걸렸다. 지금 또 하나의 고비를 맞고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영페미니스트 앞에 'young'이 붙은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 이들의 저항은 사회적으로 '진보 운동권에 들어간 일부 젊은 여성들의 문제제기' 정도로 규정되고 인식됐다. 결국 사회 전반 혹은 진보 진영 전반의 각성까지는 이르지 못한 셈이다."
신 교수는 "지금 '미투' 운동은 지난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문화예술계 성폭력 고발 등을 거쳐 최근 서지현 검사·최영미 시인 등의 폭로로 쭉 번져 왔다"며 "이제 전문 영역 여성들이 피해 사실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만큼, '미투' 운동은 노동 영역 전반에서 성폭력으로 생계마저 위협 받는 여성들의 문제 제기를 돕는 변곡점을 지나고 있다"고 역설했다.
['#미투' 너머 ③]에서 계속
CBS노컷뉴스 이진욱 기자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