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금융실명제가 실시되자 오히려 차명계좌를 크게 늘리고 금융계열사를 사금고처럼 이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차명재산의 출처에 대해서는 다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박찬대 의원이 금융감독원으로부터 받아 30일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이 회장이 금융실명제의 실명의무를 위반해 금감원의 제재를 받은 계좌는 모두 1021개에 이른다.
1987년부터 2007년 사이에 개설된 차명계좌로 조준웅 삼성특검이 2008년 발견한 1199개의 차명계좌에 포함되는 것들이다.
이 불법차명계좌를 개설 시기별로 분류해보면 1987년부터 금융실명제 실시 전까지는 20개에 불과했으나 금융실명제가 실시된 뒤 2007년까지는 무려 1001개에 이른다.
금융실명제는 1993년 8월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대통령 긴급명령을 통해 도입됐다. 금융실명제가 도입되자 이 회장의 불법차명계좌가 오히려 급증한 것이다.
이같은 상황은 금융실명제가 입법으로 제도화된 뒤 확대됐다. 정부는 1997년 금융실명거래에 관한 긴급명령을 폐지하고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금융실명법)을 입법했다.
그러자 이 회장의 차명계좌가 더욱 늘어났다. 1997년까지 이 회장의 차명계좌는 163개였으나 금융실명제가 입법된 뒤 1998년부터 2007년까지 개설한 차명계좌는 5배가 넘는 858개에 이른다.
“실명에 의한 금융거래를 실시하고 그 비밀을 보장해 금융거래의 정상화를 꾀함으로써 경제정의를 실현하고 국민경제의 건전한 발전을 도모한다”는 금융실명법의 목적 중 비밀 보장의 과실만 챙기고 실명 의무는 간단히 무시한 셈이다.
이 회장의 차명계좌가 가장 많이 개설된 금융사가 삼성증권이라는 사실은 금융계열사가 사실상 이 회장의 개인 사금고로 이용됐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금감원 자료에 따르면 이 회장이 삼성증권에 개설한 차명계좌는 756개이다. 금감원으로부터 제재를 받은 1021개의 계좌 중 74%가 삼성증권에 집중된 것이다.
이 회장은 1993년 처음으로 삼성증권에 6개의 차명계좌를 개설하면서 삼성증권을 애용하기 시작했다. 2004년 한 해에만 141개의 차명계좌를 개설했다.
앞서 삼성은 1992년 11월 국제증권을 인수해 그룹에 편입했다. 증권사를 인수한 이듬해에 금융실명제가 전격 도입되자 믿을 만한 금융계열사를 사금고처럼 이용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그런가 하면 정치권에서는 차명계좌에 보관됐던 재산의 성격에 대한 의문이 다시 제기되고 있다. 당초 조준웅 삼성특검은 2008년 이 회장의 차명계좌 1199개와 차명보유재산 4조5373억원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조준웅 특검은 이 차명재산이 대부분 이병철 회장으로부터 상속받은 것이고 삼성생명과 삼성전자 주식이 대부분이었던 상속 재산이 주가 상승에 따라 급증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병철 회장이 숨진 1987년 1개 불과했고 한동안 큰 변동이 없었던 이건희 회장의 차명계좌가 금융실명제가 도입된 이듬해인 1994년부터 급증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정말 상속재산이 맞는냐는 말이 나오고 있다.
이와는 별도로 이 회장의 차명계좌 가운데 2004년 이후 개설한 증권계좌의 경우 상속세 및 증여세법(상증세법)에 따라 증여세를 부과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상증세법은 주식처럼 등기나 명의개서가 필요한 재산의 실제 소유자와 명의자가 다른 경우 명의자가 그 재산을 실제 소유자로부터 증여받은 것으로 간주해 증여세를 부과하도록 하고 있다.
자신이 소유한 주식을 다른 사람 명의로 등기함으로써 재산을 은닉하고 조세를 포탈하려는 행위를 규제하고자 하는 취지로 2004년부터 시행된 상증세법의 명의신탁재산의 증여의제 조항에 따른 것이다.
이와 관련해 박찬대 의원은 “이 회장 차명계좌에 증여의제를 적용한 증여세 부과가 전혀 없었다”며 “사기 등 부정한 행위가 있는 경우 증여세 부과는 최장 15년까지 가능하므로 2004년 이후 개설된 증권계좌에는 증여세를 부과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