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교과서. (사진=박종민 기자/자료사진)
여론을 조작하는 '못된 짓'이 이명박 정권 때 만의 일은 아니었다.
국가정보원의 불법 대선개입으로 출범한 박근혜 정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청와대와 국정원, 교육부가 조직적으로 여론을 조작한 정황이 드러난 것이다. 바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역사교과서의 국정화 정책이 추진되면서였다.
교육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진상조사위원회(위원장 고석규)가 11일 공개한 박근혜 정권 시절 여론조작의 민낯은 참담하다 못해 황당하기까지 하다.
역사교과서의 국정화에 대한 국민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에서 마구잡이로 작성된 찬성의견서가 '차떼기'로 무더기 접수된 것이다.
그것도 의견수렴 마지막 날 특정 인쇄소에서 똑같은 양식으로 한꺼번에 제작된 찬성의견서였다.
당시 교육부 직원들은 찬성의견서가 담긴 박스가 도착한다는 고위 간부의 말에 따라 늦은 밤까지 대기했고, 이후 계수 작업을 벌인 것으로 확인됐다.
여론조작도 모자라 찬성의견으로 둔갑한 더러운 종이들이 '차떼기'로 교육부 청사에 차곡차곡 쌓였던 것이다.
과거 한나라당 시절 '차떼기'로 불법 대선자금을 모았던 '나쁜 DNA'가 박근혜 정권에까지 그대로 이어져 온 셈이다.
그런데 이 같은 조직적인 '차떼기' 여론조작에도 불구하고 2015년 11월 당시 최종 집계된 의견수렴 결과는 찬성 15만 2천 건, 반대 32만 여건이었다.
반대 의견이 찬성 보다 두 배 이상 많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박근혜 정권은 국민의 반대 의견을 무시하고 44억 원의 국민 혈세를 들여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강행했던 것이다.
고석규 국정역사교과서 진상조사위원장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박종민 기자/자료사진)
더욱이 진상조사위가 공개한 찬성의견서를 보면 두 눈을 의심할 만큼 황당 그 자체다.
개인정보란에는 친일파인 이완용을 비롯해 박정희 전 대통령, 심지어 박근혜 당시 대통령의 이름도 적혀 있다.
그리고 이완용의 주소는 대한민국 경성부 조선총독부로, 전화번호는 010-1910-0829로 쓰여 있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일을 뜻하는 숫자다.
박정희의 전화번호는 1979년 10월 26일 사망했다는 의미에서 010-1979-1026으로 적혀 있다.
그런가하면 이름과 주소란에 '개소리', '미친 짓' 등과 같은 비속어가 기재된 찬성의견서도 나왔다.
현재 교육부 문서보관실에는 찬반 의견서가 담긴 박스 103개가 쌓여 있는데, 진상조사위가 이 가운데 우선 26개를 확인한 내용들이다.
진상조사위는 이날 김상곤 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에게 검찰이 수사에 착수하도록 의뢰해 줄 것을 공식 요청했다.
국민의 의견을 수렴한다면서 이뤄진 황당한 여론조작을 보며 '정말로 이게 나라냐' 싶다.
그런데도 지금껏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관련해 잘못을 뉘우치거나 책임을 지는 사람은 없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국정 역사교과서 폐지를 지시한 것은 당연지사였다.
국정 역사교과서를 비롯해 현재 한일 위안부 합의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대한 진상규명 작업이 진행 중에 있다.
앞으로 또 얼마나 충격적인 내용이 드러날지 관심이다.
진상규명은 결코 과거에 대한 집착이나 정치보복이 아니다. 진상이 밝혀져야 적폐를 청산할 수 있고 새로운 출발도 가능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