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tvN 제공)
"미디어는 사회의 공기(公器)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tvN 월화드라마 '아르곤'의 박호식 책임프로듀서(CP)는 드라마 기획 의도를 설명하면서 "대학 신문방송학과 새내기 시절 첫 수업에서 들은 담당 교수님의 인상적인 말이었다"며 위 물음을 소개했다.
"그때 나온 (학생들의) 대답이 '공공의 그릇이다' '에어(Air)처럼 여러 의견을 절충해야 한다' 등 굉장히 많았죠. 교수님은 마지막으로 '모두 맞다. 미디어가 제 역할을 다해야 한다.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이 앞으로 그러한 일을 했으면 좋겠다'고 하셨는데, 굉장히 인상 깊어서 아직도 기억에 또렷이 남아 있습니다."
박호식 CP는 "이후 미디어 분야에 발을 들이면서 (미디어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현실을 왕왕 봐 왔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새로운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그 정권에 맞춰가는 언론 현실을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아르곤 마지막화 말미에 주인공 김백진(김주혁 분)이 '기자는 사실을 말할 뿐이다. 기자는 영웅도 아니고 선동가도 아니다. 그 사실에 대한 판단은 듣는 사람들이 해야 하는 것'이라는 취지의 말을 하는데, 이것이 '아르곤'을 기획한 의도입니다. 사실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 그 사실이 잘못됐다면 정정보도 등을 통해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충분히 판단할 수 있도록 정보를 최대한 주는 것, 이것에 충실한 언론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죠."
◇ "드라마 '아르곤', 솔직히 뒷북 아닐까 걱정했다"
박호식 CP(사진=tvN 제공)
8부작으로 지난 26일 막을 내린 드라마 '아르곤'은 촛불혁명 이후 공정언론을 향한 국민들의 열망과 맞물리면서 남다른 사회적 반향을 불러왔다.
박 CP는 최근 CBS노컷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 정도 반향이 있을 것이라고는 섣불리 예상하지 못했다"며 설명을 이어갔다.
"이미 우리는 현실에서 언론으로 인해 세상이 변하는 것을 목격했잖아요. (언론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보도로) 대통령이 실각하는 것까지 봤기에, 미디어가 얼마나 끈질기게 팩트를 쫓아가느냐에 따라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촛불집회에 참여하는 등) 실천으로 옮길 수 있다는 것을 봤기에 솔직히 (드라마 방영 시점이) 뒷북은 아닐까 걱정했습니다."
박 CP는 그러면서도 "그간 기자 세계를 다룬 드라마의 경우 진실에 다가가려는 기자들의 이야기가 중심이었다면, '아르곤'에서는 기자들뿐 아니라 그 옆의 작가, 편집자, 가족의 이야기를 비중있게 녹여내고 싶었다"며 "시청자들이 이 점에 공감해 주신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아르곤'이 언론사 시용기자, 프리랜서 작가 등의 실상을 깊이있게 녹여낸 점은 여타 언론을 다룬 드라마와 구분되는 지점으로 꼽힌다. '익숙한 드라마 문법에서 벗어난, 다소 도전적인 접근법에 대한 우려는 없었나'라는 물음에 박 CP는 "드라마를 받아들이는 시청자들의 성숙해진 자세를 믿었다"고 답했다.
"드라마적으로 이런 이야기를 할 때는 기자 김백진 등을 영웅시하거나 그가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는 이야기를 하는 게 일반적으로 잘 먹히는 것은 맞습니다. 제가 보통 1년에 네다섯 작품을 하는데,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하죠. 그런데 그렇지 않은 이야기에 대한 시청자들의 성숙도가 높아졌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개인적인 생각을 말하면, 예전에 집회를 할 때 누군가 주도했던 것과 달리, 지난 촛불집회 당시에는 익살스러운 깃발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여러 사람들이 입장을 표현하려고 했잖아요. 스스로 자기 얘기를 하려고 하는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이제는 드라마를 대하는 시청자들도 많은 인물, 의견, 플롯에 대해 조금 더 집중하고, 공감할 수 있는 수준이 되지 않았나 생각했죠."
결국 촛불혁명 등을 통해 높아진 시민들의 사회적 감수성이 드라마 등 대중문화 콘텐츠를 대하는 자세에도 변화를 가져왔다는 진단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박 CP는 "주요인물의 이야기를 따라가던 기존 드라마와 달리 요즘에는 '멀티 플롯'이라고 해서 다양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추세가 강화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멀티 플롯을 통해 보다 많은 캐릭터들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시청자들 각자가 조금 더 응원하고 싶은 이야기를 골라 보는 취향의 변화를 느끼고 있어요. 우려감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죠. '아르곤'을 기획하면서 대중적으로 인기 끌 만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극중 사회적 약자 캐릭터가 있을 때 그들 역시 뚜렷한 주관·가치관을 갖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면 시청자들도 충분히 공감하면서 응원해 주시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 "시스템 위에서 이분법으로 갈등 조장하려는 사람 직시해야"
(사진=tvN 제공)
사실 '아르곤'의 김백진 캐릭터는 상명하복과 같은 수직적인 위계질서가 여전히 힘을 발휘하는 현실의 한국 사회 조직에서는 배척되기 십상이지 않나라는 목소리도 있다. 사회파 드라마 성격이 짙은 '아르곤'이 리얼리티를 억누르면서까지 상징성 강한 김백진 캐릭터를 부각시킨 이유가 있을 법하다.
이에 대해 박 CP는 "극중 김백진은 일을 해 가면서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라는 물음표를 끊임없이 던지는 인물"이라며 "이러한 캐릭터를 일부러 끄집어내고 싶은 측면이 강했다"고 전했다.
"CP로서 저 역시 비슷한 측면이 있는데, 40대 중반 나이인 제 또래의 입지는 회사에서 어느 정도 인정받고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도 지녔잖아요. 이러한 인물들은 과거 뚜렷했던 자기 목표에 어느 정도 여백이 보일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여백은 함께 일하는 사람들, 뭔가를 더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일 겁니다. 김백진 캐릭터가 다소 판타지적이기는 하지만, 현실의 조직에도 분명히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봐요. 막상 당장에 실천하고 있지는 못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마음만 지니고 있다면 언제든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점을 김백진 캐릭터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죠."
공교롭게도 '아르곤'이 첫 방송된 지난 4일은 KBS와 MBC가 공영방송 정상화를 외치며 5년 만에 동시 총파업에 들어간 첫날이기도 했다. 시청자들이 현실의 언론개혁 맥락 안에서 이 드라마에 다가서고 이해하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박 CP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KBS와 MBC 총파업 첫날과 겹쳐서 사실 굉장히 놀랐다"고 했다.
"가장 우려했던 것은 (배우 천우희가 연기한 이연화 캐릭터를 가리키는) '시용기자'라는 용어 때문에 (시청자들이) 특정 언론사를 떠올리게 되지는 않을까라는 점이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용어를 쓴 것은, 시스템을 내려다보면서 그 안에 있는 기존 기자들과 시용기자들 사이 반목을 조장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을 얘기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시스템 안에서 구성원들을 이분법으로 나누려는 사람들, 그들을 넘어서는 방법은 결국 모두 같은 처지에 있는 동료로 서로를 받아들이려는 노력이라고 봅니다. 이는 비단 언론계뿐만이 아니겠죠. 사회 모든 분야로 확대 해석해도 무리가 없을 겁니다."
이 점에서 "현실이 굉장히 힘들더라도 자신이 맡은 바를 명확히 하고, 이를 존중하는 동료들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다는 것이 '아르곤'의 중요한 메시지 가운데 하나"라고 박 CP는 강조했다.
"현실에는 특정 시스템을 이용해 헤게모니를 잡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때 그 시스템 안에 있는 사람들은 헤게모니의 본질을 직시할 필요가 있겠죠. 구성원간에 갈등과 반복을 조장하는 누군가가, 마치 그 갈등을 해결해 주는 척하면서 권력을 잡으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말이죠. 사실 헤게모니 다툼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제 입장에서는 그 헤게모니가 곧 상식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공정언론을 다시 세우자며 총파업을 하는 현실의 언론인들에게서 무엇을 보는가'라는 물음에 그는 "드라마 PD가 아니라 개인적인 의견"이라는 전제를 단 뒤 "마땅히 해야 할 말을 하는 행위는 마땅히 대우받고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 "빌딩 높이가 올라갈수록 그늘은 더욱 길게 드리워질 것이다"
(사진=tvN 제공)
박 CP에 따르면, 당초 '아르곤'은 주 1회 방영하는 주간 단막극으로 기획됐다. 그런데 주 2회 전파를 타는 미니시리즈로 최종 결정 되면서 종영 시기도 빨라졌다. '시즌제를 염두에 두고 있나'라고 묻자, 박 CP는 "시작할 때는 염두에 두지 않았지만 시청자들이 더 필요하다고 요구하시면, 저희도 더 할 이야기가 있다고 판단되면 시즌제로 가는 방향도 열려 있다"고 전했다.
"시즌제로 기획을 하면 작가도, 배우도 부담이 크기 마련입니다. 특히나 '우리가 제대로 만들어낼 수 있을까'라는 문제가 가장 크기 때문에, 시즌제는 일단 한 번 잘 만들어보고 고민해야 할 부분이라 생각하고 시작했죠. 그래서 (현재로서는 시즌제를) 갈 수도 못 갈 수도 있다고 애매모호하게 답변할 수밖에 없네요. (웃음)"
그는 '아르곤' 앞에 붙는 '사회파 드라마'라는 수식어를 두고 "제가 좋아하는 드라마 '수사반장' 마지막회에서 나왔던 최불암 선생의 대사가 있다"며 아래 문구를 소개했다.
'시대가 발전할수록 빌딩 높이는 올라갈 것이고, 빌딩 높이가 올라갈수록 그늘은 더욱 길게 드리워질 것이다.'이어 "사회에 대한 비판이나 메시지를 갖지 않고 시작하는 드라마는 없다"며 "드라마는 언제나 현실 비판에서 시작해 왔기 때문에, 그러한 (사회파) 드라마는 앞으로도 계속 나올 것"이라고 역설했다.
박 CP는 끝으로 "'아르곤'이라는 제목이 어려워 최종 결정하기까지 내부에서도 고민이 많았다. 아르곤은 어떠한 물질과 부딪혀도 또 다른 화합물을 만들지 않는, 굉장히 안정된 비활성기체"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아르곤은 산화를 막는 데 가장 손쉽게 활용된다고 합니다. 저는 아르곤을 '최소한의 상식과 양심'에 빗대어 말하고 싶어요. 산화를 막는 아르곤처럼 사람들이 살면서 최소한의 방어막으로 상식과 양심을 지켜간다면, 당장 실천할 수는 없더라도 마음속에 그러한 상식과 양심을 간직하고 있다면 세상은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하는 데 드라마 '아르곤'이 조금이라도 보탬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언젠가는 우리네 아들딸들에게 물려줘야 할, 잠시 머무는 곳이잖아요. 그런 만큼 우리 모두에게는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세상을 후대에 물려줘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저 역시 드라마 PD로서 그러한 책임을 다하며 살아야겠죠. 저희가 만드는 작품을 통해 시청자들이 그러한 고민을 조금 더 할 수 있다면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더할 나위 없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