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탁구의 미래를 위해' 최강 중국 탁구 대표팀 지도자 출신으로 이달부터 한국 여자 대표팀을 지도하는 종진융 코치(왼쪽)와 안재형 감독이 9일 태릉선수촌 훈련 뒤 진행된 인터뷰를 마친 뒤 내년 세계선수권과 아시안게임 선전을 다짐하고 있다.(사진=노컷뉴스)
한국 탁구 대표팀이 한여름에도 훈련에 비지땀을 쏟은 9일 서울 태릉선수촌 승리관. 너도나도 힘차게 스매싱을 날리는 가운데 한쪽에서는 연신 선수들을 독려하는 낯선 중국어가 들렸다.
바로 이달부터 여자 대표팀을 지도하고 있는 중국 출신 종진융 코치(59)의 목소리다. 종 코치는 1999년부터 최강 중국 대표팀을 이끌었던 베테랑 코치다. 장지커, 마롱, 쉬신 등 세계 톱랭커들의 청소년 시절을 지도했고, 지도자 초창기에는 리난, 장이닝 등 여자 선수들을 세계 정상으로 이끌었다.
지난해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에서 사상 처음으로 4강에 들지 못한 여자 대표팀의 구원 투수로 대한탁구협회가 특별 초빙한 '사부'다. 1982년 톈진 대표팀 코치로 출발했으니 35년 지도자 경력이다. 절대강자인 중국 대표팀만 해도 18년째 몸담았다.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 당시 한 달 정도 지도했던 중국 코치와 달리 내년 아시안게임까지 계약이다.
한국 대표팀을 지도한 지 일주일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단내가 난다. 전지희(포스코에너지), 이시온(미래에셋대우) 등 선수들은 종 코치의 쉴새없는 볼박스 훈련에 녹초가 된 모양새였다. 이시온은 "정말 훈련이 장난이 아니다"면서 "대표팀에서 이렇게까지 힘든 훈련은 처음"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무턱대고 힘들기만 한 게 아니다. 선수 별로 정확하게 장단점을 파악해 맞춤 지도를 해준다. 이시온은 "예를 들어 단순히 회전을 주라고 말씀만 하는 게 아니라 검지와 엄지의 힘 배분 등 세심하게 지도를 해준다"고 귀띔했다. 이어 "나 같은 경우 회전이 장점인데 남자 선수들처럼 서브 리시브부터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조언한다"고 강조했다. 같은 중국 출신인 귀화 선수 전지희 역시 "일단 소통이 잘 되는 것뿐만 아니라 스피드, 파워, 회전 등을 강조해 기술과 심리적인 부분 모두 도움이 된다"고 반색이다.
'이건 전초전에 불과해' 종진융 코치가 9일 탁구 여자 대표팀 이시온과 함께 숨가쁜 볼박스 훈련을 하고 있다.(태릉=노컷뉴스)
선수들만이 아니다. 국가대표 지도자들도 종 코치에게 벌써부터 많은 부분을 배우고 있다. 김택수와 안재형 등 한국 탁구의 전설들도 종 코치의 차원이 다른 훈련 자세와 지도력에 감탄하며 선진 탁구 습득 삼매경에 빠져 있다.
더욱이 김택수 감독은 종 코치가 맡은 여자팀이 아닌 남자 대표팀 지휘봉을 잡았는데도 그렇다. 김 감독은 1992 바르셀로나올림픽 남자 단식 동메달과 1998 방콕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따낸 스타 플레이어. 2004 아테네올림픽에서는 지도자로서 유승민 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선수위원의 금메달을 돕기도 했다. 이런 전설도 종 코치가 옆에서 훈련하는 것을 보고 느낀 게 많은 것이다.
가장 큰 차이는 훈련이다. 김 감독은 "종 코치를 보니 볼을 하나 다룰 때도 목숨을 걸고 하는 것 같다"면서 "중국과 차이는 기술도 있지만 이런 훈련 자세와 태도의 깊이에서부터 차이가 난다"고 짚었다. 이어 "남자 대표팀도 여자 선수들에 자극을 받고 있다"고 귀띔했다.
또 김 감독은 "중국은 인구가 많은 만큼 경쟁이 그만큼 치열하고 살아남기 위한 선수들의 의지가 살짝 안일함에 빠져 있는 한국 선수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면서 "그런 훈련 자세가 실전에도 나타난다"고 덧붙였다.
이어 "마롱이나 장지커 등이 탁월한 재능이어서가 아니라 중국 대표팀의 시스템에 의해 길러진 것"이라면서 "우리도 그런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지금까지 한국 탁구의 시스템으로는 힘들다는 자성의 목소리다.
'고개 들어라, 이제' 한국 여자 탁구는 지난해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에서 사상 처음으로 8강에서 탈락했다. 사진은 당시 싱가포르에 져 4강행이 좌절된 뒤 양하은이 고개를 숙인 모습.(자료사진=노컷뉴스DB)
여자 대표팀을 이끄는 안재형 감독 역시 마찬가지다. 안 감독도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단체전 금메달과 1988년 서울올림픽 남자복식 동메달을 따낸 톱 랭커 출신이다. 특히 중국 선수인 자오즈민과 결혼해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프로 골퍼 안병훈이 아들이다.
안 감독은 "만약 내가 훈련을 시키는 강도를 100%라고 한다면 종 코치는 120~130%로 하는 것 같다"면서 "기술과 요령이 좋아서가 아니라 많은 훈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고 털어놨다. 지도자로서 배우는 게 많다는 것이다.
안 감독은 "한국 지도자의 경우 선수에게 어떤 동작에 대해 '짧게 치라'고만 두루뭉술하게 얘기하는 게 대부분"이라면서 "그러나 종 코치는 선수를 불러서 이렇게 쳐야지 느끼게끔 지도한다"고 말했다. "같은 문제에도 더 깊고 세밀하게 보고 실용적으로 훈련시킨다"는 것이다.
탁구 최강 중국의 힘이라는 얘기다. 안 감독은 "사실 지도자들이 선수 10명을 모두 붙잡고 가르치기는 힘들다"면서 "그러나 종 코치는 10명을 다 파악해서 계속 원포인트로 짚어주고 가르치더라"고 혀를 내둘렀다. 이어 "집중도에서 차이가 있고 나도 많이 배우고 있다"면서 "남자 대표팀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땀은 배신하지 않는다' 종진융 코치는 한국 탁구의 부활을 이끌 해결책으로 무엇보다 훈련을 꼽았다.(사진=노컷뉴스)
사실 종 코치는 대한탁구협회가 심혈을 기울여 모셔온 인재다. 중국도 탁구 최강의 비결이 유출될 수 있기 때문에 지도자의 해외 진출을 꺼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협회의 구애에 결국 유능한 인재가 한국 탁구로 오게 됐다. 안 감독은 "중국 협회와 교류 속에 한중 협회장들의 사이가 돈독해지면서 종 코치가 오게 됐다"고 말했다. 중국어에 능통한 안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종 코치의 각오도 다부지다. 일단 한국 탁구에 대한 쓴소리부터 시작했다. 이날 훈련 뒤 인터뷰에서 종 코치는 "이전에는 한국 여자 탁구는 날카롭고 무서운 게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졌다"면서 "선수들이 대부분 고만고만하다"고 거침없이 지적했다. 이어 "어린 선수들도 실력이 떨어지지 않지만 훈련과 경기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도 가능성에 대한 기대감도 드러냈다. 종 코치는 "당장 중국을 꺾기에는 무리지만 영원한 승자는 없기에 언젠가는 꼭 이길 수 있을 것"이라면서 "일단 내년 세계선수권과 아시안게임까지는 에이스다운 에이스를 키우는 게 목표"라고 밝혔다. 이어 "아직 누구를 꼭 집을 수는 없지만 내가 지도하는 동안 한국 선수들이 시상대에 오른 것을 보고 싶다"고 힘주어 말했다.
종 코치의 계약은 2018년 자카르타아시안게임까지다. 그러나 불과 일주일여 만에 대표팀 분위기를 확 바꿔놓을 만큼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과연 최강 중국 탁구에 힘을 보탰던 종 코치가 한국 탁구 전체에 큰 변화를 줄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