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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재밌던 연극 '라이어'는 왜 불편해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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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컷 리뷰] 연극 '스페셜 라이어'

연극 '스페셜 라이어'. 왼쪽부터 배우 이종혁, 안내상. (제공 사진)

 

연극 '라이어'에는 개인적으로 애잔한 감정을 느낀다. 13년 전인 2004년 5월 2일 대학로 파랑새극장에서 이 연극을 보았다.

내가 십수 년 전인 그날의 날짜까지 잊지 못하는 이유는 '라이어'를 본 상황 자체가 매우 인상적이어서다.

처음으로 대학로를 방문해서 본 상업 연극이며, 눈앞에서 펼쳐지는 배우의 열정 넘치는 연기와 애드리브에 '이런 게 말로만 듣던 관객과의 호흡이구나'를 알게 돼 지금도 잊지 못한다.

게다가 풋풋하던 대학 시절 첫사랑이나 다름 없던 여성과 함께 본 연극이기도 해, 뭔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여운이 남아 있는 탓도 크다.

'라이어'를 본 후 사람들에게도 참 많이 추천했다. "영화 2편을 볼 돈으로 연극 1편을 보라"고 떠들고 다닐 정도로, 내게 첫 연극 '라이어'는 만족도가 매우 높은 공연이었다.

연극의 ㅇ도 모르는 문외한이었기에 '라이어'가 유명 공연이라는 것을 안 것은 상당히 시간이 지난 뒤였다.

오픈런 공연으로 계속 기록을 경신해가고 있는 롱런 연극이라는 것을, 여기에 배우 안내상과 우현이 출연했다는 것을 2009년쯤 알게 됐다.

그들이 '라이어' 배우이자 연출이기도 했다는 소식. 뿐만 아니라 지금은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유명 배우들이 '라이어'를 거쳤다는 걸 TV 토크쇼를 통해 그제야 알았다.

내가 출연하거나 연출한 것도 아닌데, 출연 배우들이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소식은 '라이어'에 애정을 가진 팬으로서 괜히 뿌듯하기까지 한 일이었다.

연극 '스페셜 라이어' 출연진. (제공 사진)

 

그런 '라이어'가 올해 20주년을 맞아 지난달 23일부터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동숭홀에서 특별판 '스페셜 라이어'를 진행 중이다.

산파 역할을 한 초창기 멤버 안내상, 우현뿐만 아니라 이종혁, 서현철, 슈, 손담비, 나르샤, 오대환, 원기준, 신다은 등 출연진도 화려하다. 안 그래도 탄탄한 스토리에 스타들까지 등장하니 볼 거리가 풍부해졌다.

그래서일까. 13년 만에 '라이어'를 다시 만난다는 것은 감동 그 자체였다. 마치 첫사랑을 만나는 기분처럼 극장에 들어서기 전부터 두근거렸다.

입장 전부터 어떤 내용이었는지 눈을 감고 복기했고, 기억에 남는 장면과 대사 그리고 상황을 거듭 회상했다.

보고 나면 또 얼마나 신이 나서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다닐까 하는 생각에 괜히 웃음이 나기도 했다.

영국 극작가 레이 쿠니의 ‘런 포 유어 와이프’(Run for your wife)를 각색한 ‘라이어’는 한 남자의 거짓말에서 시작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는 소동극이다.

한 번 시작한 거짓말이 계속 거짓말을 낳으며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지금 봐도 어쩌면 이렇게 빈틈 없이 극적인 상황들이 이어질까 하며 감탄을 금치 못한다.

그런데 13년 만에 다시 만난 라이어는 재미보다 불편했다. 이런 장면이 있었나 하는 의아함이 공연 내내 들었다.

추가로 장면이 삽입되거나, 각색된 게 아니니 아마도 오랜 시간에 의한 기억의 풍화가 그 장면이나 상황을 잊게 한 것일 수도 있다.

결국 공연은 달라진 게 없으니, 내가 달라진 게 맞다. 나를 불편하게 한 것은 공연에서 등장하는 동성애 혐오 표현이다.

극에서 주인공 존 스미스는 계속 거짓말을 하던 중에 또 형사를 속이기 위해 친구 찰스 가드너와 서로 사랑하는 관계라고 밝힌다.

배우 원기준, 김호영. (제공 사진)

 

배우 홍석천. (제공 사진)

 

이 과정에서 연극은 순식간에 동성애 혐오가 주된 유머 코드로 자리 잡는다. 호모, 변태, 성도착자 등과 같은 단어들이 계속 반복되면서 등장인물(특히 형사)들은 그 사람을 역겨워하고 경멸한다.

13년 전 그때는 몰랐다. 그저 배꼽 빠지게 재미있고 웃겼다는 기억밖에 없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 유머 코드가 불편하다.

물론 연극은 동성애를 혐오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동성애'는 가정된 하나의 상황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때문에 누군가는 '불편해하는' 나를 향해 뭘 그리 '진지충'이나 '씹선비'처럼 구느냐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남을 비하하고 차별하며 얻는 웃음은, 유머가 아닌 폭력이라고 확신한다. 아무렇지 않게 뱉는, 그저 웃자고 한 말에 누군가는 피눈물을 흘린다는 것을 경험한 바 있다.

13년 전 사람들에게 꼭 봐야 할 연극이라며 그토록 추천했던 연극은 이제 아쉽게도 추천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연극이 달라진 탓이 아니라 내가 달라진 탓이다. 그리고 '라이어'도 언젠가 달라지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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