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당선인이 19대 대통령 선거일인 9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 마련된 개표상황실에서 두 팔을 번쩍 들어 보이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
제19대 대통령선거에 당선된 문재인 당선인의 독주는 매서웠지만 마지막까지 마음을 놓을 정도로 여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수십년간의 인연을 악용해 미르·K스포츠재단을 만들어 기업들로부터 수백억원을 강제 모금하고, 대통령 연설문을 뜯어고친데 이어, 고유 업무인 공직 인사에까지 개입한 '최순실 게이트'가 지난해 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촛불민심은 전국에서 거세게 타올랐다.
성난 촛불은 국회의 박 전 대통령 탄핵안 가결에 힘을 보탰고, 결국 헌법재판소는 헌정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파면 판결을 내렸다.
국정농단 세력에 대한 엄단과 훼손된 민주주의 회복에 대한 갈망은 적폐청산을 외치는 문재인 당선인에게 힘을 실었다.
문 당선인은 지난해말부터 각종 여론조사에서 차기 대통령 지지도 1위를 줄곧 지켰지만,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귀국에 따른 보수층의 결집, 개헌을 고리로 한 '빅텐트론', 반문(반문재인) 연대 등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송민순 전 외교부 장관. (사진=황진환 기자/자료사진)
첫번째 위기는 지난해 10월 참여정부 국무위원이었던 송민순 전 외교부장관이 펴낸 회고록 '빙하는 움직인다'가 발간되면서 찾아왔다.
송 전 장관은 회고록에서 지난 2007년 유엔의 대북 인권결의안 찬반 투표 때 문재인 당시 비서실장이 "북한에 물어보고 결정하자"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폭로했다.
해당 폭로는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서라면 미국보다 북한에 먼저 가겠다"는 과거 발언과 맞물리며 문 당선인에게 '친북 인사' '좌파 후보'라는 딱지를 붙였고, 그는 최근 대선 선거운동기간에도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와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로부터 안보관이 불안하다며 끊임없이 공격당했다.
올해 1월 초 문 당선인이 "2018년 지방선거와 동시에 개헌을 국민투표에 붙이자"고 밝히자, 국민의당과 새누리당(자유한국당 전신) 소속 의원들은 "87년 체제의 낡은 헌법을 당장 뜯어고쳐야 한다"며 그를 호헌세력이자 수구세력으로 옭아맸다.
개헌을 고리로 한 인위적 정계개편 논의는 '제3지대 빅텐트'론으로 옮겨붙으며 반문정서를 자극했고, 한때 문 당선인을 도왔던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와 김종인 전 비상대책위원장의 탈당으로까지 이어지며 그를 '패권세력'으로 낙인찍었다.
1월 중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귀국으로 '갈길 잃고 허망한' 보수층이 결집하면서 지지율은 흔들렸다. 반 전 총장이 '20일 천하'로 대권 꿈을 접었지만 한번 살아난 보수표심은 이후 안희정 충남지사와 안철수 후보쪽으로 이동하며 문 당선인의 대세론에 제동을 걸었다.
문재인 대통령 당선인과 안희정 충남지사 (사진=국회사진취재단)
올해 3월 민주당 대선 경선 과정에서 동지인 안희정 지사로부터 "질겁하게 만든다" "정이 떨어진다"는 핀잔을 들은 것도 뼈아팠다.
문 당선인의 지지자들로부터 '문자폭탄'과 '18원 후원금'을 받은 민주당의 많은 의원들도 상처를 받았고, 이는 결국 문 당선인에게 '친구 아니면 적'이라는 이분법적 패권 프레임을 덧씌웠다.
이번 대선에서는 국정농단에 따른 박근혜 정권의 책임론이 강하게 대두되면서 과거와 달리 현정부 실정(失政) 여부를 놓고 야권이 구(舊) 여권과 각을 세우는 등의 전면전 이슈는 소멸됐다. 대신 아들 준용씨의 특혜취업 의혹 등 문 당선인 가족들에 대한 의혹 검증을 놓고 한국당과 국민의당의 공격이 거셌다.
준용씨의 특혜취업과 '황제유학' 의혹은 최순실의 딸 정유라씨에 빚대 '문유라'라 불리면서 선거 막판까지 문 당선인의 발목을 잡았고, 결국 후보들간 유례없는 고발전으로 확전됐다.
아이러니하게도 문 당선인을 주위에서 도왔던 참모들의 설화(舌禍)도 그를 난처한 지경으로 밀어넣었다.
문 당선인이 민주당 대표 시절 발탁했던 손혜원 홍보부본부장은 지난 3월 인터넷 팟캐스트에 출연해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떠나실 때 그것은 계산된 것이다"라고 말해 파문을 일으키며 보직을 사임했다.
문 당선인의 '영입 1호 인사' 표창원 의원은 지난 1월 박 전 대통령의 풍자 누드 그림이 전시된 행사를 주최했다가 징계를 받았고, 지지를 선언한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은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해 그릇된 인식을 드러냈다가 결국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국정자문단 '10년의 힘 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은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도 북한 김정남 피살 사태를 김대중 전 대통령의 납치사건과 비교하며 "우리가 비난만 할 처지가 아니다"라고 말해 물의를 빚었고, 양향자 최고위원 역시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백혈병 피해 노동자들을 돕는 시민단체를 "전문시위꾼"이라고 비하했다가 사과했다.
주변 인물들의 설화가 불거질 때마다 문 당선인은 "누구에게나 단점이 있다. 저 자신도 단점이 많다"고 두둔했지만, 상대 진영의 거센 비판 속에 지지율은 박스권을 치고 올라가지 못했다.
선거 막판 SBS가 해양수산부 소속 공무원을 인용해 "세월호 늑장 인양은 문재인 후보를 위한 것"이라고 보도한 것도 큰 타격이었다.
문 당선인 선대위가 거세게 항의하고 SBS가 조기 사과하면서 해당 보도는 헤프닝으로 끝났지만, 보수성향의 유권자들은 이후에도 해당 뉴스를 퍼나르며 문 당선인을 '세월호까지 이용하는 파렴치범'으로 비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