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초유의 대통령 파면 사태로 치러지는 장미대선에서 각 후보들은 '새로운 대한민국'을 내세우며 표몰이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새 시대를 열겠다는 후보들의 다짐이 무색하게, 구태 선거문화가 여전히 주를 이루고 있다. CBS노컷뉴스는 '선거문화 이제 바꿉시다' 연속기획을 통해 시대적 요구와 괴리된 선거문화를 짚어보고 변화의 필요성을 지적한다. [편집자 주]
지난달 30일 경기 고양시 일산문화공원에서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캠프 관계자들이 선거유세를 하고 있다. (사진=김광일 기자/자료사진)
27일 오후 잠실역 사거리 국민의당 유세현장. 전광판을 실은 유세차 아래로 색을 맞춰 옷을 입은 10여 명의 선거 운동원이 일렬로 늘어섰다. 노래에 맞춰 춤을 추고 후보를 연호하며 호응을 유도한다. 그러나 지나가는 시민들은 눈길 한 번 주는 정도다. 발걸음을 멈추는 경우는 운동원 수만큼도 안 된다. 가끔 지지자가 지나가면서 "파이팅"이라고 외치는 게 전부다.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싫다는 듯 귀를 막고 지나가는 시민들도 눈에 띈다.
21세기 유권자를 상대로 20세기 방식의 선거운동이 이뤄지고 있는 대표적 장면이다. 후보 지지를 호소하는 선거 운동원이나 전광판을 싣고 곳곳을 누비는 유세차는 그래도 한때는 효과적인 선거 운동 수단이었다.
하지만 TV에 이어 인터넷과 스마트폰 등 뉴미디어가 대거 등장하면서 유세차는 무관심의 대상이거나 소음의 아이콘이 됐다. 취업준비생 황 모(25) 씨는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유세차 위에서 지나가면서 뭐라고 말을 하는데, 정책에 대한 차분한 설명이나 후보자의 소신 같은 걸 설명하지 않고 있다"며 "듣고 있는 것은 시간 낭비인 것 같다"고 말했다.
회사원 김재현(35) 씨처럼 "유세운동이 너무 시끄러워서 소음공해"라고 지적하는 목소리가 특히 높다. 실제로 지난 달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 후 전국 경찰서에는 일주일 만에 2000건에 육박하는 소음 민원이 접수됐다.
비단 뉴미디어에 친숙한 젊은 세대만의 입장도 아니다. 최 모(70) 할아버지는 "주위 또래들도 99%가 스마트폰을 쓰는데 유세차 같은 건 낭비라고 생각 한다"고 말했다. 후보 자신이 직접 유세 현장에 나타나지 않는 이상, 유세차에 집중하거나 거기서 선거 관련 정보를 얻는 경우는 드물다는 게 노인 세대의 폭넓은 인식이다.
그나마 사람이 몰리는 '집중 유세' 현장도 정책보다는 단순한 메시지, 이목을 잡아끄는 네거티브가 주요 내용이다. 27일 지하철 왕십리역 인근 더불어민주당 유세차에서는 경쟁 후보가 '갑질'을 한다는 지적이 들렸다. 현장의 캠프 관계자조차 "처음에는 음향 때문에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는데, 계속 다니니까 관심이 없다"며 "어느 후보가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유세차만 덩그러니 방치되다시피 한 경우도 종종 발견된다. 30일 오후 서울 양천구의 한 시장 입구에는 자유한국당 유세차가 대형 화면을 통해 후보자를 내보낼 뿐 선거운동원도 유세자도, 당연히 보는 시민들도 없었다.
유세차는 그러나 수백억이 드는 선거 운동에서 가장 큰 비용을 차지한다고 알려져 있다. 자원을 많이 소모하면서 정보 전달력은 떨어지는 전형적인 운동방식인 것이다. 지하철 입구 등에서 유권자에게 나눠주는 후보 홍보물, 운동원을 고용해 악수를 하고 지지를 당부하는 홍보 방식도 비슷한 처지다.
21일 오전 서울 청계광장 앞에서 한 시민이 ‘아름다운 선거 조형물’ 과 대선후보 포스터를 바라보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
뉴미디어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유권자 맞춤형 메시지 전달 등 21세기 유권자와의 접점을 날로 늘리고 있음에도 몸집이 큰 20세기 식 선거 수단을 아직까지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더불어민주당 한정애 의원은 뉴미디어가 어색한 노년층이나 생업에 바쁜 자영업자들에게는 유세차량을 이용한 선거운동 등이 아직 유효하다는 입장이다. 특히 유세차와 관련해 한 의원은 "선거의 묘미"라고 말했다.
국민의당 캠프 관계자도 "비용 많이 들고 시민들의 호응도 낮지만 그래도 장점이 있다고 생각한다"며 "시민들을 직접 마주하는 깨끗한 선거로서의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유세차 등 20세기 식 운동 방식 자체가 나쁘다기 보다는, 유권자가 원하는 정보를 적절한 방식으로 전달할 수 있게끔 변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치선진국으로 평가되는 나라들에서는 거리 유세보다 집단 별 후보를 초청하는 방식으로 정책토론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대학생 이유익(27) 씨는 "유세차 등에서 정보를 얻은 뒤 지지후보를 바꾸는 일은 없다"며 "거기에 드는 비용을 아껴서 공중파 토론회나 한 번 더 하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시민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방향으로 선거캠페인이 개선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