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이승만을 독재의 권좌에서 끌어내린 4·19혁명이 57주년을 맞았습니다. 지금 우리는 민주주의를 유린한 대통령 박근혜를 몰아내고 더 나은 새 세상을 꿈꾸고 있습니다. 차마 꽃피우지 못한 4·19혁명은, 촛불혁명의 과정에 있는 지금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집니다. 그 여정에 함께해 온 역사가들의 심층 분석을 전합니다. [편집자 주]<글 싣는="" 순서="">
[상] 4.19는 왜 '미완의 혁명'으로 남았나[하] 4.19혁명 '완성' 절호의 기회, 왜 지금일까
지난 1960년 4·19혁명 당시 거리로 쏟아져 나온 학생들(사진=4·19혁명기념도서관 제공)
4·19혁명은 미완으로 남았다. 이승만 독재정권의 극에 달한 부정선거로 규탄 여론이 들끓으면서, 1960년 4월 19일 수만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 가운데 수천 명의 성난 군중은 130여 명이 목숨을 잃으면서까지 경무대(현 청와대)로 향했고, 결국 그해 4월 26일 대통령 이승만을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하지만 이듬해인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를 위시한 군부 쿠데타로 혁명 열기는 하릴없이 사그라들었다.
비록 미완으로 남았을지언정 4·19혁명의 역사적 가치는 명백하다.
역사학자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일제시대 민족해방 운동을 통해, 해방 직후 통일된 민족국가의 수립 운동을 통해 형성됐던 역량은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은 한국전쟁 이후 완벽하게 파괴됐다. 그렇게 전쟁이 끝나고 만 7년이 안 돼 4·19혁명이 일어났다"며 말을 이었다.
"2차 대전 이후 독립된 수많은 나라 중 첫 번째 시민혁명은 분단과 전쟁과 학살로 모든 민주역량이 파괴된 한국에서 일어났다. 그 혁명의 선두에는 열다섯, 열여섯 살 중고생들이 선두에 섰다. 그 어린 혁명을 짓밟은 것이 박정희의 5·16 군사반란이었다. 자신의 좌익경력을 감추기 위해 박정희는 진보역량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민주진영의 싹을 잘라버렸다."
역사가들은 4·19혁명의 실패를 두고, 혁명 열기에 기대어 어부지리로 집권하다시피 했던 당대 민주당 정권의 지도력 부재를 커다란 요인으로 지목했다.
역사학자 주진오 상명대 교수는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이후 혁명 주체와 민주당 정권 사이의 괴리가 상당히 심했다"며 "결국 당대 민주당은 인적으로나 정책적으로나 혁명의 핵심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4·19는 미완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고 분석했다.
역사가 심용환(역사N교육연구소) 소장 역시 "5·16군사쿠데타 이전에 4·19혁명으로 집권한 민주당 정권은 혁명을 주도했던 집단도 아닌데다, 그 뿌리인 한민당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친일지주 계열로서 이승만 정권에 협력한 세력이었다"며 "정권은 바뀌었을지언정 권력이 교체된 것은 아니었던 탓에, (민주당은) 혁명 당시 불거졌던 열망들을 정치적으로 반영해 관철시킬 의지가 없었다"고 지적했다.
이어 "5·16군사쿠데타 이후 군부가 독자적으로 국가를 운영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박정희는 민선으로 나와 대통령에 도전했다. 당시 맞붙은 야당 후보가 4·19혁명으로 출범했던 제2공화국 대통령 윤보선이었다는 점은 아이러니"라며 "그때 박정희를 물고 늘어진 것이 '좌익경력'에 머물렀을 정도로 야당의 논리는 구태의연했다. 결국 제2공화국 인사들의 구태의연함과 박정희에 덧씌워진 참신한 이미지가 결부돼 대통령 박정희가 탄생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 "피끓는 젊음으로 민주주의 외쳤던 4·16 소년소녀들이 지금 어버이연합 세대"
세월호 참사 3주기를 하루 앞둔 지난 15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3주기 기억문화제 22차 촛불집회에서 부모와 함께 참석한 한 아이가 세월호의 아픔을 기억하듯 촛불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윤창원 기자)
4·19혁명 당시 "이대로는 안 된다"며 거리로 쏟아져나왔던 성난 민심은 이후 어떻게 변해 갔을까.
주진오 교수는 "4·19는 준비된 혁명이었다기 보다는 당시 정권의 탄압에 대한 대응으로서 순식간에 나타났던 측면이 강하다"며 "뚜렷한 혁명 이념조차 없었다는 점은, 이후 4·19세대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배신하고 독재에 협력하는 길을 택했던 이유"라고 진단했다.
심용환 소장은 "4·19혁명이 동아시아 역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혁명의 성과를 이뤄냈다는 자부심은 있지만, 보다 냉정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며 설명을 이어갔다.
"혁명의 도화선은 독재자 이승만에 대한 분노보다는 3·15부정선거 등으로 촉발된 자유당에 대한 불만이 크게 작용했다. 결국 십여 년간 쌓여 온 이승만 독재정권의 오류, 정책적 실패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자유당 정권의 부정부패에 대한 불만이 혁명의 동기였다는 점에서 그 스펙트럼이 좁았다."
이러한 한계점은 최근 접했던, "4·19혁명 당시 학생 신분으로 거리에 나섰다"는 한 인사와의 대화에서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인사는 '지난 겨울 촛불항쟁에 참여했느냐'는 물음에 "거기에 왜 가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4·19를 촛불에 비교하면 나는 정말…. 어느 교수고 뭐고 없다. 예전에 (4·19 관련) 세미나에서도 촛불 얘기가 나오길래 '순수하게 4·19만 갖고 얘기해라. 어디 촛불과 비교하냐'고 화를 낸 적이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4·19는 모두가 하나된 마음으로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세력을 몰아낸 혁명이고, 촛불은 이념을 앞세워 갈등과 대립을 키웠기 때문에 서로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한홍구 교수는 "피끓는 젊음으로 민주주의를 외쳤던 1960년 4월의 소년소녀들이 딱 지금 어버이연합 세대"라며 "1960년 4월의 소년소녀들이, 1980년대의 백만 학도들이, 지금 그들이 즐겨 마시는 '처음처럼'대로 살았더라면 세상은 벌써 여러 번 뒤집혔을지도 모른다"고 꼬집었다.
이어 "한국 근현대사에서 역사를 바꿔 온 주역들은 늘 10대 후반과 20대들이었는데, 이번 촛불혁명에서도 시민들을 광장으로 불러 모은 주인공은 누가 뭐라 해도 헬조선의 흙수저들이었다"며 "촛불을 들고 광장에서 진화와 좌절을 함께 경험한 세대, 그들이 다시 판을 벌인 것"이라고 분석했다.
주진오 교수는 "이번 촛불혁명은 4·19 때와는 다르고, 달라야 한다. 정치권에서 촛불혁명에 참여하기도 했고, 그 이후 이뤄진 대통령 박근혜 파면과 구속, 그리고 조기대선까지의 국면은 결국 혁명을 완성해 가는 하나의 과정"이라며 "이번 대선은 단순히 사람만 바꾸는 선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그야말로 정의로운 정권교체, 촛불혁명의 주체들이 꿈꾸는 나라를 구현할 수 있는 정치적 토대를 만드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CBS노컷뉴스 이진욱 기자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