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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도주- 벼랑 끝으로 내몰린 루이 1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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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명철의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중 제5권

 

루이 16세는 왜 도주를 감행했으며 그 30시간의 모험은 어떻게 막을 내리는가?

1791년 6월 20~21일은 프랑스 혁명사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날이다. 20일 자정에서 1시 사이에 루이 16세가 가족을 이끌고 튈르리 궁을 벗어나 도주를 감행했던 것이다. 평소 입버릇처럼 프랑스의 왕이 아니라 차라리 메스에 가서 왕 노릇을 하고 싶다는 속내를 비치곤 했던 루이 16세는 겉으로는 혁명을 받아들이는 척 온갖 새 헌법 조항을 승인해왔지만 속으로는 다시 절대군주제로 돌아가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왕의 갑갑한 심정에 동조한 페르센 백작을 필두로 한 반혁명세력의 치밀한 사전준비 끝에 왕 일가는 과감히 도주를 감행하지만 결국 국경 근처 작은 마을인 바렌에서 왕의 얼굴을 알아본 백성 탓에 붙잡히는 신세가 되고 만다.

주명철 교수의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중 제5권은 국회에 계속 힘이 밀리면서 점차 혁명의 '적'이 되어가는 루이 16세가 감행한 30시간의 도주과정과 1791년 프랑스 국내외 상황의 이모저모를 집중적으로 살펴본다.

결과적으로 루이 16세가 혁명으로 잃은 힘을 되찾으려고 감행한 30시간의 모험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그가 다스리던 왕국은 이제 온전히 그의 것이 아니었음을 오지 마을인 바렌이 증명했다. 그것은 프랑스라는 왕국이 이제 국민국가로 거듭 태어났음을 보여주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1790년 7월 14일의 전국연맹제가 상징적으로 보여준 연대감을 읽을 수 있다. 신분사회의 모습을 반영하는 왕의 군대가 새로운 모습을 갖추고 연맹의 정신을 구현하는 국민방위군 앞에서 맥을 못 추는 현실에서 이 사건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왕의 도주사건을 놓고 중도와 우파 의원들은 그가 ‘납치’되었다는 식으로 왕의 도주혐의를 벗겨주기에 바쁘고 왕은 어영부영 한동안 자리를 유지하긴 해도, 그에 대한 여론이 급격히 나빠지고 수동시민들이 정치무대에 뛰어드는 일이 잦아지면서 프랑스 혁명은 더욱 급진화하게 된다.

역사의 물줄기를 되돌리려 한 루이 16세의 불행

이미 제4권에서 살펴보았듯이 1790년 8월 하순에는 혁명의 바람이 군대에까지 밀어닥쳐 낭시에 주둔한 3개 연대가 날마다 들썩거리는 동안 루이 16세는 성직자 시민헌법을 승인하면서 목에 가시가 걸린 기분이었다. “가장 독실한 기독교도”인 그가 제 손으로 종교인들의 지위를 낮추는 법에 서명을 했다는 사실은 두고두고 후회거리였다. 그래서 그는 왕비를 사모하고 헌신하던 스웨덴 귀족 악셀 폰 페르센에게 모든 것을 팽개치고 파리에서 도망쳐 부이예 장군이 있는 메스로 가고 싶다는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 밖에도 왕을 괴롭히던 문제는 계속 일어났다. 귀족 신분을 없애는 법(1790년 6월 19일)을 자기 손으로 승인해야 하는 괴로움이나, 교황이 성직자 시민헌법을 규탄할 것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7월 23일에 받고서도 비밀에 부치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행동해야 하는 자신에 대해 루이 16세는 이러려고 왕이 되었나 하는 자괴감이 들었으리라.

혁명이 뿌리를 내리는 근간은 새로운 헌법을 제정함으로써 정치적·사회적 체제의 근본을 새롭게 확립하는 데 달려 있는 만큼 제헌의원들은 1789년 이후 2년 동안 불철주야 토론에 토론을 거듭하며 하나하나 새 헌법 조항을 확립해나가기에 바빴다. 그런 만큼 힘의 추는 절대군주였던 왕에게서 국회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왕이 국회의 의지와 여론에 계속 밀리면서 상처를 입는 동안 그가 페르센에게 했던 말이 씨가 되었다. 이미 왕당파 귀족들은 왕을 파리에서 탈출시켜 혁명의 흐름을 저지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그런데 왕의 입에서 직접 파리에서 벗어나 메스의 왕 노릇을 하고 싶다는 소중한 암시를 들은 사람이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으랴. 그때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왕을 도주시킬 계획을 치밀하게 짜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페르센이 감독하고 루이 16세가 주연을, 왕 일가와 시종들, 부이예 장군, 슈아죌 공작, 부이예 장군의 두 아들인 루이와 샤를 등이 조연을 맡아 열연한 1791년판 영화 <왕의 도주="">가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영화의 결말은 혁명세력에게는 말할 수 없는 분노와 배신감을, 반혁명세력에게는 뼈아픈 패배감을 안겨주었고, 이후 왕을 당장 폐위하라는 거센 여론을 불러일으키고야 만다.

‘비공시성非共時性의 공존共存’

“하느님 맙소사, 왕이 도망쳤대!” 루이 16세의 도피소식은 왕국 안은 물론이고 이웃 나라에까지 급속히 퍼져나갔고, 특히 영국인들의 큰 비웃음을 샀다. 226년 전인 1791년에 프랑스의 왕이 도도한 혁명의 물결을 거슬러 수많은 눈을 피해 왕궁에서 도망치자 왕당파를 제외한 국회의원들과 대다수 국민의 거센 비판이 쏟아지는 것은 물론 돼지 몸통에 왕의 얼굴을 얹고 ‘배반자’라는 꼬리표를 붙인 그림까지 등장하는 실정이었다(172쪽, 238쪽 도판 참조).

이는 2017년 3월 우리의 유례없는 정치상황과 겹쳐 씁쓸한 착시현상을 불러일으킨다. 헌법재판소에서 8:0의 만장일치로 ‘대통령을 파면한다’고 선고했음에도 박근혜 전 대통령은 명백히 불복의사를 드러냈다. 2세기 전 프랑스는 가톨릭 종교인들이 정신적 지도자를 자처하던 시대였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는 문화적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비단 종교문제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비공시성의 공존’을 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모든 사회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같은 시대와 공간 속에 사는 사람들이 제각각 다른 시대의 문화를 보여준다는 의미다. 예컨대 박근혜 전 대통령을 ‘주군’이라고 불렀던 비서실장이나 대통령의 사진을 ‘존영’이라고 칭했던 자유한국당 의원들, 그들의 말이라면 종교적 진리처럼 믿고 따르는 사람들, 한술 더 떠서 박근혜를 ‘마마’라고 칭하며 통곡을 해대는 일부 시대착오적 ‘신민들’이 처참하게 무너진 헌정 질서와 정의를 바로 세우려는 압도적 다수의 시민들과 여전히 대립각을 세우는 것도 우리 시대의 모습이다. 2016년의 박근혜는 1970년대의 박정희가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난 것처럼 ‘문화융성’을 말하면서도 ‘블랙리스트’를 작성해서 민주주의적 문화를 압살하려다 발각되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2세기 전의 프랑스에서는 문화적 변화가 일어나 종교인이 더는 제1신분이 아니라 시민사회의 일원이 되었지만, 절반 정도의 종교인이 아직도 그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저항했던 것이다. 게다가 왕은 그런 상황 자체를 몹시 견디기 어려워했다. 역사의 흐름을 거스른 대가로 결국 자신의 목숨까지 위태로워지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책 속으로

1791년 6월 21일 밤 1시경 루이 16세는 가족과 함께 변장한 뒤 튈르리 궁을 몰래 빠져나가 뤽상부르(룩셈부르크) 쪽 국경을 향해 달려갔다가, 결국 밤 11시에 국경 근처의 작은 마을 바렌에서 붙잡혔다. 날이 밝자 튈르리 궁이 발칵 뒤집혔다. 도대체 왕은 간밤에 어디로 사라졌을까? 세월호가 침몰할 때 대통령이 일곱 시간 동안 무엇을 했는지 아직도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시점에 루이 16세의 실종사건에 당황하는 궁전 사람들과 그 소식을 들은 국회의원들, 파리 시민들의 놀라는 표정이 우리의 모습과 겹친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304명의 귀중한 목숨을 구하지 못한 대통령의 책임이 226년 전 감시의 눈을 피해 도주한 루이 16세의 책임보다 훨씬 크다. 정보통신 기술이 눈부시게 발달한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대참사를 대통령이 일곱 시간 동안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사실만 가지고도, 국민은 그의 국정수행 능력을 충분히 의심할 만하다. (8쪽)

2017년 3월 10일 오전 11시 21분, 이정미 헌법재판소 소장 권한대행은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고 선고했다. 그동안 가슴 졸이며 최종 선고를 기다리던 국민이 마침내 승리했다. 국민은 평화적인 ‘촛불혁명’으로 나라의 주인임을 증명했다. 그럼에도 갈 길은 멀다. 4·19혁명의 성과를 박정희 군사정권에 빼앗긴 경험을 되돌아보면서, 이제 겨우 놓은 ‘제2의 혁명’의 역사적 머릿돌 위에 반듯한 헌정질서를 확립할 사명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국민이 관심을 갖지 않으면 민주주의를 지킬 수 없기에 언제나 선의의 감시와 간섭을 해야 한다. 왕이 혁명으로 잃은 힘을 되찾으려고 도주하는 과정을 다룬 이 책을 출판하기 직전에 우리는 ‘제2의 민주혁명’을 평화적으로 시작했다. 어느 때보다 가슴 벅차다. (13쪽)

미라보가 제시한 방법은 남녀의 신체적 차이와 성병에 대한 두려움이 내재된 편견을 보여주긴 해도, 당시의 사회학적·의학적 관심을 반영했다. 몸을 깨끗하게 간수하면 병을 막을 수 있다는 믿음은 특히 남녀관계에서 중요했다. 세척은 오늘날에도 강조할 수 있는 내용이다. 또 스펀지를 ‘페서리’로 활용하는 방법은 피임과 성병 예방에 도움을 준다. 미라보는 심지어 건강한 남자가 성병에 걸린 여성과 관계할 때에도 스펀지를 넣으라고 권했다. 아직 안전한 콘돔이 없던 시절이라 그랬을 것이다. 아무튼 미라보도 이런 글을 성교육에 활용한다는 점에서 그 시대에 나온 ‘포르노그래피’의 성격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아무리 구체제의 검열제도가 날마다 쏟아지는 출판물을 일일이 검토하고 ‘나쁜 책’(업계에서는 ‘철학책’이라고 했다)을 제재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할지라도, 혁명 전까지 필화로 감옥에 갇힌 사람은 많았다. 예를 들어 극작가 보마르셰는 생라자르 감옥에 갇혔던 것이다. 검열제도의 3단계(원고 검토, 인쇄 중, 인쇄 출판 후) 가운데 경찰은 두 번째 단계부터 개입했다. (164쪽)

“주권자인 국민은 평등한 권리를 누리는 시민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더는 폭군은 없고 법만 있을 뿐이며, 특권을 가진 기관들도 없고 공무원들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왕은 제1공무원입니다. 이것이 바로 프랑스 혁명입니다.”
몽모랭이 대변하듯이, 왕이 생각하는 프랑스 혁명은 혁명세력이 생각하는 것과 원칙적으로 같았다. 그러나 과연 왕은 진심으로 그 사실을 인정했던 것일까? 우리는 그가 튈르리 궁에서 벗어나 되도록 멀리 떠나려고 준비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당시 사람들 가운데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많았고, 지레짐작으로 왕의 도주를 경계했겠지만, 왕과 왕비는 측근들에게 도주준비를 진행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왕도 실제로는 혁명의 적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그는 몽모랭의 손을 빌려 혁명의 적들을 규정하고 규탄했다. (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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