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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길' 이나정 감독이 '위안부' 비극을 증명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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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컷 인터뷰] "지옥보다 강했던 연대…도식 구조 탈피하려 노력"

영화 '눈길' 스틸컷. (사진=CGV아트하우스 제공)

 

"너무나 큰 비극이고 지옥인데 어떻게 하루 하루 살았지. 그래도 살고, 그래도 살고…. 그 힘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어요."

짬을 내 기자를 만난 이나정 감독의 입술은 잔뜩 터져 있었다. 피로가 겹겹이 쌓인 듯한 모습에 이유를 물어보니 5월에 들어가는 미니시리즈 준비로 정신이 없단다. 그제야 번쩍 그가 이제 막 입봉을 앞둔 '지상파 방송국 PD'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식사할 시간도 없어 샌드위치를 베어 무는 모습이 분주한 직장인의 그것과 같았다.

영화를 잘봤다고 말을 꺼내자 '다 (유보라) 작가님이 기획을 잘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쑥스러운 답을 내놨다. 일본군 '위안부'를 소재로한 영화 '눈길'은 지난 2015년 KBS에서 광복 70주년 특집 단막극으로 제작된 드라마를 다시 편집한 작품이다. 영화는 드라마보다 압축한 부분이 있지만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영화로 개봉한다고 했을 때, 설마 하겠나 싶었는데…. 방송 콘텐츠를 이렇게 개봉하게 해 준 엣나인필름과 CGV아트하우스에 너무 감사하죠. 더 많은 분들이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한 거지만 이걸 저도 누리고, 감사하고 싶은데 하필이면 너무 바쁜 시기네요."

기획 단계에서의 '눈길'은 지금과 사뭇 다른 이야기였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이야기에 초점이 맞춰진 것과 달리, 상처 받은 여성들이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를 기획했었다고 한다. 유 작가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가 베트남전 피해 여성의 손을 잡고 '네 상처를 내가 아니까 함께 이겨내자'고 말하는 장면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 장면을 보고 여성들이 연대하는 이야기를 해보자고 했었어요. 광복 후에 홀로 남겨진 일본인 여성과 '위안부'에서 살아남은 조선인 여성이 출신을 모르는 여자 아이를 구출하면서 살아가는 이야기로. 그래도 아직 '위안부'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도 많고, 비슷한 구조를 가진 작품이 많아도 거기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맞다고 결론을 내렸어요."

'위안부' 피해 여성들에 그치지 않고, 방황하는 청소년 은수(조수향 분) 캐릭터를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비극 속에서 살아남은 노인 종분(김영옥 분)은 은수를 만나 70여 년 만에 죽은 동무 영애(김새론 분)를 떠나보낸다.

"처음에는 저도 잘 몰랐어요. 그런데 작가님이 그러더라고요. 새벽에 명동 밀리오레에 가보면 거기 24시간 하는 패스트푸드점에 갈 곳 없는 아이들이 그렇게 많대요. 혼자 살아가야 하는 아이들이 많은 거죠. 전형적이어도, 소외받는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결국 작가와 감독의 의도대로 영화는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이 사회에, 역사에 상처 받은 여성들이 연대하는 힘을 보여준다. 이 감독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수기뿐만 아니라 다른 자료들을 접하면서 극한의 비극을 마주한 사람들이 어떻게 생존했는지 알게 됐다.

"옆에 사람이 있으면 살게 된다고 해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 남은 사람의 이야기를 보면 그런 이야기가 나와요. 집에 가서 볼 사람이 있고, 자기가 챙길 사람이 있고, 살았는지 죽었는지 함께 연결된 사람이 있으면 살아갈 힘이 난다고요. 할머니들의 수기도 보면 전쟁 고아라도 데리고 다니는 사람들이 오래 산다고 나와요. 핏덩이라도 줏어서 데리고 다니는 아이들이 더 건강하다고. 결국 혼자가 아니기에 살아갈 수 있다는 거죠."

영화 '눈길' 스틸컷. (사진=CGV아트하우스 제공)

 

'위안부' 피해자들은 그 케이스가 모두 다르지만 특히 조선인 피해자들은 연령대가 유난히 어렸고, 납치되다시피 끌려 온 경우가 많았다. 살아있는 지옥인 위안소 안에도 일상은 존재했다. 너무 어린 아이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했고, 또 어떤 이들은 함께 빨래를 하며 배추로 김치를 담가 먹었다.

"수기에는 놀라울 정도로 일상적인 이야기도 많이 나와요. 그래서 더 끔찍하죠. 그 평범함이 너무나 잔인한 겁니다. '눈길'에는 성폭력 장면이 없지만, 콘돔을 소독하거나 방 안을 걸레질 하는 모습만으로도 너무나 힘들었어요."

촬영 도중에 흥미로운 에피소드도 전했다. 일본군들이 위안소 방을 드나드는 장면 수위와 관련해 남녀 스태프들의 의견 차가 있었다고.

"혁대를 막 푸는 장면이 나오는데 일부 남자 스태프들은 약한 거 아니냐고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런데 여자 스태프들은 푸는 그 순간부터 징그럽다고 하는 거예요. 그 이후에 장면이 다 상상이 되니까요. 똑같은 장면에 대해 끔찍함을 느끼는 게 다를 수 있지 않나 싶더라고요. 살인범에게 여주인공이 도망가는 장면이 나오면 남자 관객들에게는 촌각을 다투는 긴장의 순간이지만, 여자 관객들에게는 공포의 순간이니까요."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영화에 대한 속상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눈길'이 보름 만에 나온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적은 제작비는 연출자들에게 언제나 고통스러운 요소다. 그에 따라 배우 캐스팅도 난항을 겪고, 촬영 시간 역시 촉박하기 때문이다.

"낮이나 밤이나 가리지 않고 밤새면서 촬영을 했어요. 아무래도 명절 특집극은 미니시리즈보다는 단가가 낮으니까요. 정말 적은 금액에 김영옥 선생님과 (김)향기, (김)새론이가 촬영을 다 해줬어요. 저도 더 잘 찍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았고, 향기랑 새론이도 연기를 좀 더 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더라고요. 제가 보기에는 너무 잘했는데 그런 게 있대요."

촬영 당시 중학생이었던 김향기와 김새론은 특유의 '단짝' 시너지로 영화를 완성시켰다. '눈길'에서의 캐릭터와 달리 실제로는 김향기가 좀 더 내성적이고, 김새론이 활발한 성격이라는 전언이다.

"두 아이가 정말 성격이 정반대인데, 천부적인 직관력으로 모든 걸 표현해 냈어요. 제 디렉팅은 사실 하나도 필요가 없었고, 그냥 시작과 끝을 알리는 것 뿐이었어요. 타고난 배우들이 아닌가 생각해요. 매일 둘이 속닥대면서 그렇게 이야기를 많이 해요. 고향으로 돌아와 치받쳐 오른 감정을 터뜨리는 향기와 죽음을 앞둔 순간, 감정을 톤 다운시킨 새론이가 기억에 많이 남아요."

영화 '눈길'의 이나정 감독과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 있는 소녀상. (사진=CGV아트하우스 제공, 자료사진)

 

◇ '위안부' 문제를 잠식한 도식들

이나정 감독과 유보라 작가는 '짓밟힌 조선의 소녀'는 안된다는 원칙 아래 영화를 만들었다. '위안부' 피해자하면 '더럽혀진 조선의 소녀들'이 떠오르는 집단적 도식 구조를 벗어나려는 노력이었다. 김향기와 김새론에게 일부러 민복을 입힌 이유도 그래서다.

"어린 조선의 소녀들이 더럽혀졌다는 생각을 많이들 하시더라고요. 저희는 '조선의 소녀'라는 이미지는 안된다고 생각했어요. 전통 한복의 치마와 저고리를 입히면 생각나는 도식 구조가 있는데 그것만을 담으려고 한 게 아니거든요. 한복도 입었지만 실제로는 '민복'을 많이 입었다는 기록에 따라 의상을 그렇게 준비했어요."

의상하면 또 하나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단원 고등학교 교복과 똑같은 교복을 입은 소녀 은수의 모습이다. 이나정 감독은 의도적으로 그 교복을 은수에게 입힌 것은 아니라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에도 종분에게 구원받는 은수의 존재가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어떤 위로를 준 것은 사실이다.

"처음에는 저도 몰랐어요. 세월호 유가족 분들이 초청받아서 영화를 보셨는데 은수가 입은 교복이 단원고 교복이랑 똑같대요. 제게 정말 감사하고, 아이들이 생각났다고 하시더라고요. 제게는 정말 따뜻한 한 마디였지만, 그냥 조심스러운 마음이 들어요. 굳이 보셔야 되나 싶기도 해요. 그 분들이 아니라 우리들이 봐야죠."

'나눔의 집'에서 봤던 풍경은 아직도 이나정 감독의 뇌리에 깊게 남아있다. 괴로워하는 소녀를 표현한 청동상과 위안소를 재현한 역사관 그리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할머니들이다.

"그냥 그런 생각을 했어요. 거기에 사시는 할머니들이 그 재현된 위안소를 지나가면서 보시는 게 걱정되더라고요. 마치 그 옆에 살아있는 화석처럼 계신 것 같았어요."

'눈길'은 지난 2015년 제67회 이탈리아상 TV드라마-TV영화 부문에서 프리 이탈리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당시 이탈리아 심사위원장이 남긴 말에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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