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히 '페미니즘 리부트'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최근 2년 간 여성혐오와 페미니즘에 대한 전 사회적 민감도가 높아졌다.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정체화하는 사람들이 늘어가면서, 문화를 페미니즘적 관점으로 비평하고 해석하려는 시도들도 진행되고 있다. 성균관대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가 주관하고 성균관대 문과대학 CORE사업단이 후원하는 '페미니스트 시각으로 읽는 한국 현대문학사'도 그 흐름 중 하나다. 한국문학과 민주주의에 대해 의미 있는 성찰을 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고자 만들어진 이 강의는 13일부터 24일까지 평일 열흘 동안 이어진다. 총 10강을 지상중계한다. [편집자주][글 싣는 순서]
① 남성작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방탕하고 문란한 '신여성'② '독립적 존재' 대우 못 받은, 식민지 조선의 '배운 여자들'<계속>
14일 오후 7시 30분, 서울 은평구 청년허브 다목적실에서 '페미니스트 시각으로 읽는 한국 현대문학사 2강이 진행됐다. 장영은 연구자(성균관대)는 식민지 조선의 "배운 여자"들-나혜석·강경애·박화성의 소설과 박진홍·주세죽의 생애'를 발제했다. (사진=김수정 기자)
1800년대 말엽,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여성을 대상으로 한 '근대 교육'이 이루어졌다. 사회가 근대화되기 전에도 교육의 기회가 주어져 학문을 연구하거나 관직에 진출해 왔던 남성과 달리, 여성이 '학교에 다니는 것'은 당시 상당한 파급력을 지닌 일이었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의 여성들은 고등교육을 받아 어느 정도의 지식과 교양 수준을 갖추고, 문학적·예술적 재능을 지니고 있어도 사회를 이루는 '독립적 존재'로서 충분히 대우받지 못했다. 누구의 아내, 누구의 딸, 누구의 어머니로 더 대표됐으며, '성취'나 '가능성'은 깊이있게 평가받지 못했다.
'식민지 조선의 "배운 여자"들-나혜석·강경애·박화성의 소설과 박진홍·주세죽의 생애' 발제를 맡은 장영은 연구자(성균관대)는 나혜석, 강경애, 박화성, 박진홍, 주세죽 등 재평가가 필요한 식민지 조선의 여성 5명을 소개했다.
◇ 자기 삶을 '글'로 얘기하며 페미니즘 출발을 알린 나혜석
장영은 연구자가 나혜석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김수정 기자)
1896년생인 나혜석은 미술 전공자로 일본 유학을 다녀왔으며 한국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서양화 개인전을 연 인물이다. 3·1 운동을 여성운동으로 확산시키려다 수감되는가 하면, 만주에 가서 여성을 대상으로 한 야학을 설립하기도 했다. 지금 따라가기도 쉽지 않을 만큼 으리으리한 '스펙'을 지닌 엘리트 여성이었던 것이다.
나혜석은 배포가 큰 여성이었고, 수필이든 소설이든 다양한 형태로 자신의 삶을 '기록'하려 애썼다. '경희'(1918), '이상적 부인'(1919), '모된 감상기'(1923), '이혼 고백장'(1934), '내 일상'(1935) 등의 작품이 이를 증명한다.
장 연구자는 "매우 솔직하고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 글이다. 문제는 이것이 다시 비수처럼 돌아왔다는 것"이라면서도 자신의 삶을 '글'로 표현한 것을 높이 평가했다.
장 연구자는 "당시에는 공부를 많이 한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할 수 있는 게 교사라는 직업 혹은 글쓰기 2가지였다고 생각한다. 글쓰는 건 집안에서 자족적으로 하는 행위가 아닌 매우 '사회적인' 행위였다"며 "여성지식인이 자기 삶을 스스로 얘기하는 것이 페미니즘의 출발이라고 생각한다. 그 첫 번째 인물이 나혜석"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나혜석이 (그 시대가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너무나 자유주의자이고 페미니스트여서 세상에 외면 당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자신을 둘러싼 소문으로, '여성 이야기'를 여성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고 나서 자기 자신에 대해 썼다. 왜 이렇게 사는지, 남성들이 얼마나 치사하게 여성들을 (사회 밖으로) 축출시키는지 글을 통해 있는대로 드러낸 것"이라고 전했다.
◇ 여성 사회주의문학의 대모 강경애
(사진=김수정 기자)
강경애는 1세대 여성작가이자 여성 사회주의문학의 대모로 꼽힌다. 집에서는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지만 세상으로 나가고 싶어 했던 그는 '소설 쓰기'를 통해 이를 꾀하려고 했다. 이때 양주동이 강경애에게 접근하고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됐다.
장 연구자는 "하지만 강경애가 문학을 조금 알게 되니까 양주동이 하는 말이 시시해졌다. 그래서 나중에는 양주동의 말을 공개반박하는 데 이르렀다"며 "양주동을 통해 문학을 받아들였지만 이후에 자신의 삶에서 양주동을 완전히 떼어놓은 것이다. '이제 내 문학을 하겠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강경애는 배웠다는 '신여성'이었음에도 사회주의의 가부장성에 매우 충실하게 복무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이에 대해 장 연구자는 "비판받아야 할 부분도 있지만, 왜 이렇게까지밖에 할 수 없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며 운신의 폭이 좁았던 당대 여성작가들이 처한 한계를 되짚었다.
◇ 이념과 사상 중시했던 사회주의 작가 박화성
(사진=김수정 기자)
박화성은 사회주의자였던 자신의 오빠 영향을 많이 받은 여성이었다. 오빠의 친구였던 김국진과 결혼해 옥바라지를 하다, 이혼 후 김국진의 친구이자 사업가인 천독근과 재혼했는데 이 과정에서 이념(사회주의)을 버리고 돈을 택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박화성은 자신을 거의 매장시키려는 정도의 비난이 쏟아졌음에도, 작품으로 자기 변호에 나섰다. 1935년 자전소설 '북국의 여명'에서 박화성은 "나는 이념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거듭 강조했다.
자신을 세계적인 작가로 만들어주겠다고 말했던 천독근은 막상 결혼 후에는 "여펀네가 건방지게 소설이 다 뭐야"라며 박화성이 쓴 원고를 불태우는 등 비협조적으로 나왔다. 자식은 늘고 문단에서도 소외당하고 결혼생활도 평탄치 않았던 박화성은 '내가 어떻게 작가로 살아야 할까'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
장 연구자는 "(박화성은) 강경애와 다소 비슷한 행보를 보였다. 이념과 사상을 중시하는 작가로 작품을 발표하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은 '어머니'로 그려갔다"며 "(여성작가들이) 자기 자신을 이야기한 걸 보다 보면, (당시) 여성이 서 있던 사회적 입지를 확인할 수 있다. 모순, 왜곡, 자기변호가 일부 있다 해도 글로 남겨둬야 여성의 삶을 우리가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장 연구자는 "여성들이 살아온 삶이 사실 별것도 없는데 그걸 왜 (끌로) 남기느냐 하는 시각도 있지만, 왜 그렇게밖에 남길 수 없는지를 살피는 게 더 중요하다고 본다. '이야기한', '글을 쓴' 여성들에게 좀 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 식민지 시기 최고의 여성 사회주의자 박진홍장 연구자는 박진홍을 '여러분에게 광고하고 싶은 인물'이라고 표현했다.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박진홍은 식민지 조선에서 최고의 여성 사회주의자였던 인물이다. 동덕 여고보 독서회에서 책을 읽다가 사회주의자가 된 그는 교내 시위부터 각종 노동운동에 많이 관여한 '노동운동가'였다.
또한 박진홍은 당시 은둔하며 도망다녀야 했던 남성 사회주의자들을 자신의 집에 숨겨주는 '아지트 키퍼'이기도 했다. 전설적인 사회주의자 이재유도 박진홍의 덕을 입었다. 장 연구자는 '사회주의자'이자 '노동운동가'였던 박진홍의 삶을 "아무도 제대로 평가해주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재유 사건을 맡았던 판사만이 박진홍을 두고 "가장 가까이에서 널(이재유를) 숨겨주고 지원해 준 여자"라는 점을 파악했을 뿐이었다.
장 연구자는 "여성은 사회주의자에게로 가면 사회주의자가 되고, 공산주의자에게 가면 공산주의자가 된다고들 하지만 그건 아니다. 여성이 사회주의자이기 때문에 (뜻이 맞는) 사회주의자에게 간 것"이라며 "박진홍도 남편 김태준과 상당히 동지적인 사랑을 나누며 가정생활을 잘 이끌어갔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책을 좋아했던 사회주의자 여성 박진홍은 끝끝내 '자기 자신'에 대한 글을 쓰지는 못했다. 남성 못지않게 사회적 활동을 했던 그의 자취가 남아있지 않은 것은 안타까운 대목이다.
◇ 박헌영의 아내 넘어 여성 사회주의자였던 주세죽
(사진=김수정 기자)
주세죽은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었던 박헌영의 아내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나, 사실 본인도 1920년대에 남녀평등과 단발, 자유연애, 교육 등을 주장한 여성운동가였다. 당시 모든 아시아 운동가들이 가 보고 싶었던 상하이에 머무르기도 했고, 여성 사회주의자 3대 트로이카로 불릴 만큼 굉장한 사회주의자이기도 했다.
장 연구자는 주세죽이 '살아남기 위해' 1946년 스탈린에게 보낸 청원서 내용을 언급하며 여성이 자신의 삶을 설명하는 행위의 의미를 되짚었다.
장 연구자는 "(주세죽은) 청원서에 '박헌영의 처'라는 점을 드러낸다. 자신을 박헌영의 처로 설명하지 않으면 다시 살 길이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남편의 존재를 필요로 한 것"이라며 "청원서 내용이 안 받아들여졌다고 실패라고 보는 것은 곤란하다. 자기 자신에 대해 쓴 글이 주세죽을 재평가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고 본다"고 밝혔다.
◇ 여성이 무언가를 '쓴다'는 것의 의미장 연구자는 식민지 조선의 '배운 여성' 이야기를 하며, 자신의 삶을 글로 남기는 행위의 의미를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는 "교육의 핵심은 읽고 쓰고 말하는 것이라고 본다. 여성들은 겨우 100년 조금 넘은 교육의 역사를 갖고 있는데, '배운 여성' 중 얼마나 자기 삶을 이야기했는가. 김활란, 박근혜 같은 여성들만 자서전을 남기는 사회는 매우 비극적이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장 연구자는 "여성문학가라는 집단이 소설을 통해 자기 이야기를 한 것을 절대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며 "쓰는 것은 아프지만 정확한 나를 직면하고 나를 설명하는 행위다. 타인과 자신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설명하다 보면 자신의 세계 자체가 확장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