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경륜가인 보재 이상설을 삶을 다룬 <이상설 평전:독립운동의="" 선구자="">가 김삼웅에 의해 쓰여졌다.
저자는 이상설의 업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첫째, 을사늑약 체결을 끝까지 막고자, 고종에게 ‘순사직’하여 조약을 파기하고 오적을 처단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둘째,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최초의 신학문 민족교육 기관인 서전서숙을 만들고 신학문과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셋째, 고종의 밀지를 받고 제2회 만국평화회의 특사로 파견되어 건너가, 회의에는 참석하지 못했으나 세계 언론인들을 상대로 일제의 만행과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밝혔으며 미주에서 애국동지대표회와 국민회를 조직하였다. 넷째, 13도의군을 편성하고 무력을 통해 국권회복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다섯째, 독립운동단체 성명회를 조직하고 8,624명의 서명을 받아 성명회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여섯째, 한인 독립운단체 권업회를 창설하였다. 일곱째, 국치 후, 상하이 임시정부보다 5년 앞선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수립하고 정통령에 선임되었다. 여덟째, 신한혁명단을 창단하고 본부장에 추대되어 마지막까지 국권회복을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였으나 끝내 좌절되고 말았다.
끝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그였지만, 그의 행보는 우리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한 걸음 한 걸음이었다.
책 속으로이상설은 국망에 처하여 울고만 있지 않았다. 즉각 행동에 나섰다. 조약은 매국 오적만이 찬성했을 뿐 황제의 비준절차가 끝나지 않았음을 알고 즉각 상소를 통해 고종이 이를 폐기할 것을 주청했다.
- P. 60
이상설이 행한 미주에서의 국권회복운동은 제국주의화된 열강들의 거대한 장벽 앞에 성공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크로렌스 위임스가 『헐버트전기』에서 “당시 광무황제와 헐버트박사, 이상설·이준·이위종은 멸망하는 국가를 위하여 모두 최선의 노력을 바쳤고 더 말할 여지도 없이 훌륭한 솜씨로 수행하였다.”라고 평한 그대로였다.
- P. 145
이상설은 1910년 8월 국망이 현실화되는 상황에서 병탄 무효를 선언하고 병탄반대투쟁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성명회를 조직하였다. 성명회는 국망을 계기로 십삼도의군의 활동이 전이된 형태로 발전한 것이다. 이상설은 성명회의 활동내용 가운데 핵심되는 선언서를 기초하였고, 나아가 대규모 병탄반대 서명록을 작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 P. 209
3·1혁명 이후 국권회복을 위해 국내외에서 몇 개의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1919년 한성정부와 상하이 임시정부가 대표적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수립한 대한광복군정부는 이들보다 5년 앞서 노령과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가들에 의해 수립된 국망 이후 최초의 임시정부(망명정부)인 셈이다.
- P. 229
CBS노컷뉴스 김영태 기자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