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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 말고 '궁핍'…촛불역사 기록하는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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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너머' 세상 꽃피우는 광장의 문화운동

24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촉구 9차 촛불집회 참가자들이 청운동사무소까지 행진한 뒤 박 대통령 조형물에 크리스마스 선물인 수갑을 채우는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

 

언뜻 봤을 때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읽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궁핍현대미술광장'이다. '국립'은 '궁핍'으로, '관'은 '광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박근혜 즉각 퇴진'을 촉구하는 아홉 번째 주말 촛불집회가 열린 24일, 60만 인파가 운집한 서울 광화문광장 한복판 천막에서는 '내가 왜'라는 주제를 내건 궁핍현대미술광장 개관전이 한창이었다.

천막 바깥에는 이 개관전의 의미를 전달하는 대형 인쇄물이 붙어 있었다. '궁핍현대미술광장은 초라하고 궁색한 한국 정치의 풍경을 그립니다. 가난할지언정 삶을 위해 싸우는, 소중한 이들의 삶과 죽음을 기억하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그립니다. 다채로운 광장의 외침을 담으려 합니다. 궁핍한 정치의 멱살을 잡습니다. 그것이 당대의 예술이니까요.'

입구에 들어서니, 정면에 서 있는 시인 송경동의 시 '우리 안의 폴리스라인'이 눈에 들어온다. '이제 그만 그 거대한 무대를 치워주세요/ 우리 모두가 주인이 될 수 있게/ 작은 사람들의 작은 테이블로 이 광장이 꽉 찰 수 있게// 이제 그만 연단의 마이크를 꺼 주세요/ 모두가 자신의 말을 꺼낼 수 있게/ 백만 개의 천만 개의 작은 마이크들이 켜질 수 있게'라고 노래하는 도입부는 서로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광장의 풍경을 오롯이 표현하고 있다.

천막 내부 한쪽 벽면은 회화, 판화, 글귀 등으로 혼란한 시국과 희망을 표현한 작품으로 빼곡하다.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머리를 들고 자신의 몸에 붙이려는 박근혜 대통령, 거대한 산맥처럼 솟아오르는 불끈 쥔 주먹들, '해고자 복직'이라 쓰인 철탑을 수놓은 꽃과 새들,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노래하며 환하게 웃는 노동자들, '모든 인간은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이 권리에는 혼자서 또는 타인과 함께 그 신념을 표현할 자유도 포함된다'는 세계인권선언 제18조, 헐벗은 노동자가 웅크린 채 꽃 한송이를 들고 "여기 사람이 있다"고 절규하는 모습 등 그 면면도 다양하다.

나머지 벽면에는 광장의 문화예술인들이 시민들과 함께 벌여 온 활동상을 담은 포스터와 사진 등 기록물을 전시했다. 이들이 펴내고 있는 '박근혜 전격 구속' '박근혜 옥중편지 단속 입수' 등 시민들의 바람을 대변하는 '광장신문'을 전시한 점도 눈길을 끈다.

◇ "당신은 지금 여기에 왜 서 계신가요. 우리는 지금 여기에 왜 서 있을까요"

24일 서울 광화문광장을 찾은 시민들이 '궁핍현대미술광장' 개관전에 전시된 작품을 관람하고 있다. (사진=이진욱 기자)

 

이날 개관전 현장에서 만난 문화연대 활동가 신유아 씨는 "어제(23일)로 50일째를 맞은 광화문광장 캠핑촌의 문화예술인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함께 작업해 온 결과물을 전시하고 있다"며 "우리가 광장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많은 시민들이 공유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현 시국에 대한 다양한 비판 의식을 담았다"고 설명했다.

아래에 '박근혜 너머', 우리가 마주하려는 한국 사회의 모습을 담은 송경동의 시 '우리 안의 폴리스라인'과 개관전에 대한 설명문 '내가 왜'의 전문을 싣는다.

시 '우리 안의 폴리스라인'·궁핍현대미술광장 개관전 '내가 왜' 전문
우리 안의 폴리스라인 - 송경동

이제 그만 그 거대한 무대를 치워주세요
우리 모두가 주인이 될 수 있게
작은 사람들의 작은 테이블로 이 광장이 꽉 찰 수 있게

이제 그만 연단의 마이크를 꺼 주세요
모두가 자신의 말을 꺼낼 수 있게
백만 개의 천만 개의 작은 마이크들이 켜질 수 있게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라는 친절한 안내를 멈춰 주세요
나의 시간을 내가 선택할 수 있게
광장이 스스로 광장의 시간을 상상할 수 있게

전체를 위해 노동자들 목소리는 죽여라고
소수자들 목소리는 불편하다고 말하지 말아주세요
집을 가진 이들은 집을 갖지 못한 이들의 마음을 몰라요

어떤 민주주의의 경로도 먼저 결정해두지 말고
어떤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한계도 먼저 설정해두지 말고
최선의 꿈을 꿔 볼 수 있게

광장을 관리하려하지 말고
광장보다 작은 꿈으로 광장을 대리하려하지 말고
대표자가 없다는 말로 권한이 없다는 말로
오늘 열린 광장이
어제의 법과 의회 앞에 무릎 꿇지 않게 해주세요

위만 나쁘다고
위만 바뀌면 된다고도 말하지 말아주세요
나도 바꿔야 할 게 많아요
그렇게 내가 비로소 말할 수 있을 때
내가 나로부터 변할 때
그때가 진짜 혁명이니까요

궁핍현대미술광장 개관전 '내가 왜' 설명문

궁핍현대미술광장 개관전 '내가 왜'는 노래패 꽃다지의 노래에서 따온 것입니다. 이 노래는 찬바람 부는 날 거리에서 잘 수밖에 없었던, 시리고 추운 삶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농락당한 우리의 삶에 '왜'를 되묻고 있습니다.

당신과 나의 삶이 파괴되는 밑그림에 농락당한 사회가 있음을 뼈저리게 느끼는 요즘입니다. 어두운 장막의 뒤에서 누군가 즐겁고 화려한 파티를 벌여왔음을 낱낱이 알게 되었죠. 그래서인가 봅니다. 당신과 내가, 지금 이 광장에서 만난 까닭.

어떤 시의 한 구절이 그 까닭을 말해줍니다. 이 땅에 살기 위하여, 사람으로 살기 위하여, 사랑으로 살기 위하여. 그래서 지금 우리가 이 광장에서 만난 거겠죠.

'궁핍현대미술광장'은 초라하고 궁색한 한국 정치의 풍경을 그립니다. 가난할지언정 삶을 위해 싸우는, 소중한 이들의 삶과 죽음을 기억하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그립니다. 다채로운 광장의 외침을 담으려 합니다. 궁핍한 정치의 멱살을 잡습니다. 그것이 당대의 예술이니까요.

당신은 지금 서울의 한복판, 광화문광장에 서 계십니다. 묻고 싶습니다. 왜 지금 이 자리에 서 계신가요. 다섯 명이 모인 자리에 다섯 개의 사연이 있습니다. 세월호와 함께 가라앉은 건 더 이어져야 할 304개의 이야기이기도 했습니다. 똑같은 사람이 없듯, 삶의 이야기도, 삶의 이유도 같을 리 없습니다. 하물며 1백만개의 촛불이 타올랐던 이 광장의 이야기는 어떨까요.

박근혜 당선 이틀 뒤 목숨을 끊은 노동자가 있습니다. 한진중공업 노동자 최강서 씨는 회사의 부당노동행위와 손배가압류로 고통스러워했습니다. 마땅히 사회가, 정치가 나서서 해결해야 할 문제였으나 '누군가'의 당선은 한 노동자가 품어야 할 일말의 희망마저 거두어 간 것이었습니다. 국정원 대선개입과 부정선거에 항의해 서울역 고가에서 분신한 이남종 씨의 외침은 어떠한가요. 삼성전자 서비스 노동자 최종범 씨는 "힘들고 배고팠다"는 유서를 남겼습니다.

지금 이 광장에는 가혹한 노조파괴의 과정에서 죽어간 동료 한광호 씨의 영정을 붙들고 힘겹게 싸우는 유성기업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이 광장은 노동자들을 버리고 야반도주한 기륭전자 노동자들이 한겨울 오체투지를 이어가며 흐느꼈던 곳입니다. 쌍용차, 콜트콜텍, 동양시멘트 노동자들의 고통이 배어 있기도 합니다. 세월호 참사 304명의 작은 영정이 밤새 빛나는 광장이지요.

다시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지금 여기에, 왜 서 계신가요. 우리는 지금 여기에, 왜 서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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