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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백자 장인의 마지막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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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으로 나간 조선백자: 분원과 사기장의 마지막 이야기'

 

<시장으로 나간="" 조선백자="">는 경매시장에서 수천, 수억을 호가하는 조선백자를 만들었던 사람들과 그 백자를 만들었던 곳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 책은 분원 자기업에 종사했던 하재 지규식이라는 공인의 '하재일기'를 통해 들여다본, 조선시대~일제강점기에 걸쳐 도자기를 만들었던 곳, 곧 분원에 관한 이야기이자, 그 도자기를 생산하고 판매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특히 개항 이후 분원 자기업이 자본주의 세계시장에 맞닥뜨려 어떤 변화를 거쳐 쇠락해가는지를, 또 최고 품질의 도자기를 생산해낸 사기장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임노동자화 되는지를 살펴본다.

수백여 년 동안 왕실에서 쓰이는 최고 품질의 도자기만 생산하던 분원은 1883년 정부 조직의 대대적인 개편에 따라 그 운영권이 민간인인 공인에게로 넘어가고 ‘분원자기공소’라는 이름으로 운영되었다. 민간인에게 분원의 운영권이 넘어가고, 왕실이 아닌 일반 시장에도 분원자기를 판매할 수 있다지만, 이때만 해도 완전한 민영화는 아니었다. 사기장의 임금을 여전히 정부에서 지급하고, 판매 관리자인 공인들에게 여러 가지 특권을 부여해주는 체제로 운영되었던 것이다. 왕실 납품과 시장 판매를 통해 이윤을 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분원자기공소 체제는 오래가지 못했다. 계속 누적된 정부의 미지급 공가 때문이었다. 결국 갑오개혁 과정에서 공인 제도가 폐지되고 분원자기공소 체제도 혁파되었다.

이후 대한제국이 세워진 1897년에 분원 자기업의 맥을 잇기 위해 번자회사가 설립되었다. 관료와 공인 출신으로 이루어진 번자회사의 운영진은 본사는 서울에, 생산 현장은 분원에 두고 이원적으로 운영했다. 마침 명성황후의 장례를 앞두고 있던지라 최고 최대의 고객인 왕실과 관청을 상대로 납품량이 늘었고, 그에 따라 수익률도 좋은 편이었다. 그러나 공동 운영, 공동 분배의 합명회사 특징을 띠던 번자회사는 3년이 채 지나지 않아 유동자금 경색으로 운영난에 처하고, 1900년부터 개별 운영 체제로 전환했다. 회사는 판매를 통한 이익보다는 오히려 분원 사원들의 시설세를 받아 챙겨 운영하는 기생적 형태로 명맥을 유지했다. 게다가 조선 땅에 밀려드는 값싸고 화려한 수입 도자기와 일본인들의 요업 진출은 조선의 도자업에 치명적 위기를 안김으로써 토착 산업을 이끄는 회사로서의 기능과 역할은 이미 한계에 다다랐다.

1910년 일제 강점으로 국권을 빼앗기면서 조선의 산업이 침탈당하고 분원의 자기업도 몰락할 위기에 처하였다. 그러자 애국계몽운동가들이 중심이 되어 식산흥업의 일환으로 분원 자기업을 회생시키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러한 흐름을 타고 1910년 분원자기주식회사가 출범했다. 주주를 모아 자본금을 마련하고, 실력양성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다양한 사회 세력이 참여하여 운영진을 꾸렸으나, 분원자기주식회사 역시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한 채 1916년 문을 닫고 말았다.

조선시대 후반부터 일제강점기까지 분원은 여러 차례 변신을 거듭하며 회생하려 했지만, 매번 자금난과 부채에 시달리며 결국 쇠락했다. 관영에서 민영으로 전환한 분원 자기업은 치열한 경쟁 시장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아무런 준비 없이 뛰어든 셈이었다. 약탈적 자본주의 체제에 노출된 조선의 토착 산업이 어떻게 몰락했는지를 분원 자기업은 여실히 보여준다.

관영으로 운영되던 분원이 대내외적 상황에 따라 민영의 분원자기공소(1883~1895) → 번자회사(1897~1910) → 분원자기주식회사(1910~1916)로 변신했던 만큼, 그 운영 주체도 각 단계마다 달랐다. 조선시대 정부의 관할 아래 있을 때는 사옹원 관료와 아전들이, 그리고 민영의 분원자기공소 시기에는 공인들이, 번자회사 시기에는 큰돈을 출자한 사원들이, 그리고 분원자기주식회사 시기에는 도자업과 관련이 없는 외부의 애국계몽운동 계열 실업가들이 분원 자기업을 이끌었다. 그러나 경영 주체가 계속 바뀌는 과정에서도 한 가지 공통점은 있었다. 바로 정부의 권력과 연관된 이들이 분원 경영에 참여했다는 점이다. 한편, 경영 주체가 바뀌는 흐름은 분원이 자본주의 경제체제 속으로 편입되는 과정과 궤를 같이한다. 즉, 분원 자기업을 주도하는 경영층이 자기업자가 아닌 자본가 중심으로 편성되었고, 이에 따라 분원 경영자와 사기장은 사용자와 노동자의 관계로 전환되었다.

분원을 움직이는 사람에는 관리 감독하는 경영층 외에도 하부 조직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포함된다. 이들은 ‘분원 백자’를 매개로 피라미드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제일 상층부에는 절대 권력자인 왕과 왕실, 그 아래에는 분원을 감독하는 사옹원 관료, 또 그 아래에는 실무를 담당하는 아전과 공인, 다시 아래에는 그릇을 제작하는 사기장과 일꾼, 가장 아래 밑바닥에는 수세 대상이자 부역에 동원되는 일반 백성이 자리했다. 이 피라미드 구조 속에서 상층은 하층을 수탈하며 착취하는 권력자로서 군림하며, 이른바 ‘갑’과 ‘을’의 관계가 정립되었다.

분원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사기장이다. 아름다운 그릇을 빚고 구워낸 그들은 분원의 경영 주체가 계속 갈마드는 와중에도 장인으로서의 역할에 복무했다. 그러나 그들이 받는 급료는 하잘것없었기에 처자식 부양은 고사하고 생계 자체를 이을 수 없어 아사지경에 이르기까지 했다. 분원이 민영화된 뒤 1883년 사기장이 받는 한 달 급료는 1냥이 채 되지 않았는데, 이 금액은 쌀 1~2되 정도의 가격이다. 물론 분원이 민영화되면서 개별 업주에게 고용되어 임금을 받는 임노동자가 된 뒤로는 가옥까지 제공받으며 좀 더 나은 형편에서 그릇을 빚었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능력이 출중한 사기장에 한해서이고, 실력이 고만고만한 나머지 사기장들은 도태될 수밖에 없었다. 하루에 천 개의 그릇을 빚어 신의 손을 가진 사기장이라 일컬어졌던 장성화는 분원 외에 지방에서도 탐을 내어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일을 했다. 또 문경의 유명한 사기장인 김비안은 분원으로 와서 망동요를 축조하고 그릇을 빚었다. 분원이 민영화됨에 따라 사기장들은 신분의 굴레에서 벗어나 분원에서 지방으로, 지방에서 분원으로 서로 옮겨 다니며 일을 했던 것이다.
경영 체제를 바꾸고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며 실험하면서 분원 자기업의 맥을 잇고자 했던 노력은 1916년 분원자기주식회사가 끝내 문을 닫게 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사기장의 계보도 단절되고, 전통 자기를 만들어온 분원도 점차 소멸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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