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가 딛고 있는 서울, 엄밀히 말하면 '현대 서울'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놀랍게도 현대 서울은 식민지 시기 경성의 청사진(blue print)과 겹쳐진다. 물론 많은 변화가 있어왔지만 기본 골격과 변화의 방향은 해방 이전, 1910년에서 1945년 동안 설계되어온 바탕에서 기원한다. 당연히 설계자들은 '우리'가 아닌 '일본 제국'이었다. 그렇다면 일제는 경성을 어떻게 만들고자 했을까? 나아가 해방 이후 우리는 식민지 수도 경성에서 벗어나, 혹은 극복하면서 어떻게 현대 서울로 변화시켜 왔을까?
<서울의 기원="" 경성의="" 탄생="">은 책 제목에서 은유하듯이 1910년 병합부터 시작된 식민지 수도 '경성의 탄생'과 도시 개발의 과정을 통해 지금에 이르는 '현대 서울의 기원'을 풀어내고자 한다. 경성의 변화(도시 개발)를 살펴봄으로써 식민지 시기 처음 대면한 근대의 실체, 그리고 그 유산의 존재가 지금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 책은 강조하고 있다.
'무단통치기'인 1910년대 경성의 도시 개발(주로 남대문과 을지로 일대)을 둘러싸고 갈등이 발생하는데 상대적으로 조선인보다 경성 거주 일본인들의 저항이 거셌다. 주로 토지 보상을 둘러싼 일본인들의 '사익'과 충돌한 것이다.
현재 안국동에서 이화동에 이르는 율곡로 일부 구간은 종묘와 창덕궁·창경궁을 가로지르고 있다. 이 도로는 1932년 완공되었다. 당시 도로 부설을 두고 조선 황실(순종)과 전주 이씨종약소를 중심으로 한 조선 지배세력과 일반 식민지 조선인의 시각은 달랐다. 일반 조선인들은 '종묘의 존엄'보다는 '교통의 편리'라는 근대적 개발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일제는 '전쟁'을 위한 도시 개발에 박차를 가한다. 전쟁을 위한 공업지역의 필요성이 높아진 것이다. 더불어 1930년대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서 경성을 넘어 '경인' 지역으로 도시 개발을 확대할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현하고자 했다.
일제는 경성의 인구 급증과 근대적인 형태의 주거지역을 위한 도시 개발에도 박차를 가한다. 근대적인 도시 중산층을 위한 주거지역 그리고 일본인을 위한 고급 주거지역이 개발된다. 한편 현대 도시 개발과 마찬가지로 주변부로 쫓겨나는 철거민, 즉 빈민 주거의 문제도 함께 등장하게 된다.
새롭게 주택지로 조성된 안암정[지금의 안암동]에 새집을 지어 이사 온 [중략] 이들은 같은 넓이의 택지에 같은 형태로 지어진 집을 같은 시기에 구입한, 즉 연령대나 경제력이 비슷하고 분가한 핵가족인 것이다. [중략] 이들 “교원, 회사원, 음악가, 화가, 각기 그럴듯한 직업을 가진 젊은 아버지”들은 전차를 타고 시내로 출퇴근을 한다. 이들은 그전부터 이야기되던 “아츰밥만 먹으면 시내로 일을 하러 드러왓다가 오후 4, 5시가 지나야 비로소 잠자리를 찾아 돌아가게”되는 도시인,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식민지 시기 성장한 새로운 세대의 근대적 도시 중산층이었다.(278-279쪽)
식민지 시기 경성지역의 도시빈민층을 대표하는 명칭은 ‘토막민(土幕民)’이다. ‘토막에 사는 사람’이라는 명칭이 보여주듯이 토막민은 그 주거 형태를 특정한 지칭이다. [중략] 경성부는 1920년대 말부터 토막민 통계를 내기 시작했다. 통계를 낸다는 것은 ‘토막민은 무엇이다’라는 정의를 내리기 시작했다는 뜻인데, 그것은 ‘토지의 불법 점유자’, 그리고 ‘도시 미관을 해치는 자’라는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좀더 나아가면 토막민은 “사회에 대한 반항적 감정이 있는 무식한 빈민이 주이며 일부 좌경적 사상을 가진 자”, 즉 일종의 ‘위험 분자’로 인식되었다.(303쪽, 305쪽)
일제는 전쟁의 필요와 더불어 오늘날의 수도권과 유사한 '광역도시권'을 구상했다. 그러나 일제의 "경성 중심 '광역도시권' 구상에서는 분명 대도시의 팽창 방지와 위성도시 건설, 도시 간의 녹지 경계 분리와 고속 교통기관을 통한 연결 등과 같은" 메트로폴리스적 이상향은 결국 전쟁과 함께 좌초되었다. 경성의 도시화부터 길게는 오늘날까지도 연장되는 서울의 미래는 일제의 침략 전쟁으로 촉발되었지만 더불어 전쟁으로 왜곡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현대 서울이 고스란히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CBS노컷뉴스 김영태 기자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