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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승희 화가의 고흐 순례기, 유럽 21개 도시를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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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빈센트와 함께 걷다'

 

"황금이 되려면 충분히 녹도록 달궈야 해. 그래서 얻어낸 이 황금과 꽃의 톤은 처음에는 잘 표현되지 않아. 한 사람의 모든 힘과 완전한 주의력이 필요하거든." (중략)
그는 노란색과 아를의 여름을 만나면서 자신의 모든 정열을 불태웠다.
"나의 집과 일, 정말 행복해. 나는 명철하고, 또한 장님처럼 지금의 일과 사랑에 빠졌어."
"나는 매 순간마다 지독하게 명철한데, 요즘처럼 자연이 너무 아름다울 때는 더 이상 느낄 틈도 없이 꿈처럼 그림이 내게로 온다." -본문 284~286쪽

화가의 눈에 비친 고흐는 어떨까. <빈센트와 함께="" 걷다="">는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화가 류승희의 고흐 순례기이다.

어느 날, 암스테르담의 반고흐미술관에 갈 기회가 주어졌다. 태양이 눈부신 어느 여름날의 오후였다. 빈센트의 그 다채로운 노란색과 초록색이 만든 황금빛 찬란한 들판 풍경을 직접 감상했다. 그날,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유럽인들이 빈센트에 왜 그렇게 열광하는지, 스탕달 신드롬이 무엇인지. 그 전율은 단숨에 읽어 내려간 전기를 통해 다시 한 번 내 가슴을 쿵 내려앉게 했고 쉽게 진정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걷잡을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마치 그가 가까운 미술인 선배라도 되는 것처럼 측은함을 느끼며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게 되었다.
_「시작하며」에서

지은이는 빈센트라는 블랙박스 판독에 앞서 우선 그가 살아생전 머물고 그림을 그린 곳이라면 어디든, 존재하는 한 모두 찾아가 마치 그와 대화를 나누듯 그의 흔적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저자는 반 고흐의 작품과 생애에 관해 섣불리 정의 내리기보다는, 암시하고 분석하고 제안하기 위해 그가 거쳐 간 인생과 예술의 무대를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책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유년의 뜰」은 1853년 3월 30일, 죽은 형의 이름을 고스란히 물려받으며 태어난 빈센트 반 고흐의 고향, 쥔더르트에서부터 시작한다. 빈센트는 쥔더르트에서 열한 살까지 살았다. 그 후 집에서 30킬로미터나 떨어진 기숙학교 입학을 위해 제벤베르헌이라는 소도시로 떠난다. 아마도 그때 가족과 이별하게 된 것이 빈센트에게는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은 것으로 보인다. 어린 빈센트에게 이 학교는 호화로운 유배지 같은 곳이었다.

2부 「두 개의 길」에서는 청년 빈센트의 방황을 그린다. 가족의 도움으로 구필화랑에 취직해 화상으로 일하게 된 빈센트가 첫사랑의 상흔을 안고 예술과 종교의 길 위에서 갈팡질팡하는 모습이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네덜란드, 영국, 벨기에 등지를 떠돌며 어리석을 만큼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면서까지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려 한 빈센트의 인간애를 엿볼 수 있다.

3부 「예술의 길」에서는 드디어 종교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예술가로 살아갈 결심을 한 빈센트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때부터 빈센트와 테오는 인생의 동반자이자 후원자로서 서로의 곁을 지키게 되는데, 브뤼셀, 헤이그, 에턴 등지에서 미술 공부에 몰두하며 치열하게 그림 그리는 법을 터득해가는 빈센트의 예술가적 면모가 서서히 싹을 틔운다.

4부 「별이 빛나는 밤」에서는 예술 공동체를 꿈꾸며 찬란한 빛을 좇아 남프랑스 아를로 떠난 빈센트의 말년의 여정을 기록했다. 빈센트는 아를에서 화려한 예술적 경지를 맛보지만, 만개한 꽃이 빠르게 시들어가듯 그의 삶에도 서서히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폴 고갱과의 관계, 귀를 훼손한 사건, 정신병원 생활 등 고통 속에서도 결코 붓을 놓지 않는 예술가의 모습이 한편의 영화처럼 극적으로 펼쳐진다.

마침내 길고 길었던 빈센트 반 고흐 순례를 마친 지은이는 책 말미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기나긴 빈센트 순례를 마치고 내가 깨달은 것 중의 하나는 그가 조국인 네덜란드를 무척 그리워했다는 점이다. 조국은 엄마 품이라 하지 않던가. 빈센트는 프랑스의 먼 남쪽으로 이동했지만 그가 그림을 그리려고 선택했던 장소는 언제나 네덜란드 풍경과 흡사하거나 관련된 곳들이었다.
_「마치며」에서

반 고흐는 「감자 먹는 사람들」을 그린 1885년 뉘넌 생활을 마치고 네덜란드를 떠난 뒤 다시는 조국 땅을 밟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가 머물고 그림을 그리려고 선택한 장소는 언제나 네덜란드 풍경을 닮은 곳이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아를의 랑글루아다리가 그렇고, 빈센트가 머물렀던 도시마다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바다, 교회가 있는 풍경, 밀밭, 풍차 등이 그렇다. 그것들은 대부분 빈센트가 젊은 시절에 함께하고 사색했던 네덜란드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책 속으로

어쩌면 삶은 행동반경을 기록한 것이기도 하다. 그가 살았고 그림을 그렸던 확고부동한 장소는 빈센트의 삶을 더욱 세밀하게 관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 장소는 주변 풍경을 반영해서 세상에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화가에게 특히 더 중요하다. 그래서 빈센트를 사랑하는 이들의 끈질긴 열정이 찾아낸 그의 삶과 그림의 현장으로 나 또한 떠났다.
_「시작하며」에서

빈센트가 하숙할 당시 이 집의 주인은 프랑스인 목사였던 남편을 잃고 딸과 둘이서 살고 있던 과부 어설라 로이어(Ursula Loyer)였다. 그녀는 어린아이들에게 교습을 하는 한편으로 하숙을 쳤다. 딸의 이름은 유지니. 열아홉 살의 아리따운 처녀였다. 빈센트는 그녀와 반년 가까이 지내면서 사랑을 느꼈고, 어렵게 고백했으나 바로 거절당했다. 이 거절당한 첫사랑이 비극의 시작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 1874년 봄부터 시작된 이 첫사랑의 간절한 갈망은 걷잡을 수 없었고, 결국 그를 침몰된 난파선처럼 몰고 갔다. 그것은 빈센트의 운명을 바꾼 예사롭지 않은 사건이었다.
_「구필화랑 런던 지점으로 가다」에서

1885년 5월 초, 빈센트는 드디어 「감자 먹는 사람들」을 완성했다. 그것을 '추잡한 환각' 또는 '외설'로 보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 작품은 농부들의 삶을 이상화한 것이 아니다. 둘러앉은 테이블, 땅에서 거둔 것들, 커피처럼 검은 음료, 희미한 불빛……. 거기에는 감자 같은 얼굴과 흙빛 손을 가진 이들의 세계를 알리려는 고발정신이 담겨 있다.
_「감자 먹는 사람들」에서

"우리 자신은 언제든지 있고, 무료이고, 순종적이고, 늘 탐구 가능한 주제다."

그(빈센트)는 스스로를 끈질기게 탐색하고 분석했다. 그의 자화상은 불안, 피로, 분노, 진실에 대한 갈구, 고뇌 등으로 점철된 그 자신의 일기와도 같다. 그는 풍경화보다 더 잘 팔리는 초상화를 그린 적도 있었다. (……) 그는 끊임없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을 것이다.
_「예술의 실험실」에서

하나의 붓 터치는 하나의 단어와 같다는 그의 말은 데생과 글쓰기와 그림을 한 가지로 생각했음을 말해준다. 그는 프로방스에서 드디어 그림을 깊게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동안은 마치 이 시절을 위한 준비 기간이었다는 듯이 마침내 그는 자신의 아름다운 감정을 캔버스에 쏟아내기 시작했다.
_「영광의 빛」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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