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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수의 여성 탐구, 52가지 사물에 담긴 심리와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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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그 남자가 읽어주는 여자의 물건'

 

핸드백은 여성 패션계의 권력자다. 군대에 비교한다면 사병 개개인이 소지하고 있는 기관 소총과 같은 것이다. 패션의 그 어떤 아이템도 핸드백만큼 강력한 화력을 발휘하는 것은 없다. 근대 여성에게 모자의 화려함이나 드레스의 색깔이 중요했다면 이 시대 여성에게 핸드백은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상징하면 서, 모든 패션의 방향을 지배하는 태풍의 핵과 같은 존재다. 옷이 핸드백을 규정짓는 것이 아니라, 핸드백에 옷을 포함한 모든 스타일이 종속되는 경우가 많다. 게임의 룰에 적용된 그녀의 상식적인 의상보다는 감각적인 핸드백 하나가 강력한 첫인상을 남겨줄 수 있다.
―‘핸드백: 여성 패션계의 여왕’에서

신간 '그 남자가 읽어주는 여자의 물건'은 여성이라는 존재에 대해 특별히 그녀들이 소유하고 있는 물건(사물)을 들여다보고 탐색해보고자 한다. 사물을 탐구한다는 것은 사물의 소유자를 효과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사물은 욕망과 필요에 의해 생겨난다. 사물의 삶은 우리의 삶과 일치하고, 우리의 정체성과 존재양식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같은 동성(同姓)이 아닌 이성(異性)의 시각으로 탐색한 여자들의 물건에는 어떤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까?

작가이자 미술전문지 편집장, 미술 저널리스트, 전시기획자 등으로 지난 20년 동안 예술계에서 머문 이건수, ‘그남자(그림 읽어주는 남자)’라는 별명을 가진 그는 이 책에서 그림이 아닌 ‘여성의 사물’을 우리에게 읽어주며 여성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갖게 해준다.

이 시도는 남성의 시선으로 여성성을 규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남성으로서의 여성 탐구가 겉핥기식 단상이나 관음적 응시에 그칠 것이라는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저자 스스로도 여성으로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여성에 대해 잘 모른다고 고백하고 있지만, 예술가의 유별난 감성과 예리한 시선으로 관찰하고 분석하는 과정에서 여성 스스로도 몰랐던 내면의 이야기를 끄집어낸다.

예술, 사회, 문화에 관한 방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하지만 단순한 정보 전달의 백과사전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일종의 예술작품이라 생각하고 철학적인 해석과 평가를 덧붙여 여성을 보다 입체적으로 조망한다. 지식과 깊이 있는 사색들은 쉽고 간결하며 균형 감각을 유지한 글로 나타난다. 또한 글 곳곳에서 발견되는 저자의 주관적 체험과 느낌은 남자들에겐 공감을, 여자들에겐 신선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여자의 물건은 여자에게 다가갈 수 있는 통로이자 여자와 닿아 있는 연결고리이다. 저자는 말없이 사람의 역사를 드러내주는 사물을 통해 여자의 심리나 감각을 가늠해본다. 여자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52가지 사물의 쓰임새나 속성, 이력, 의미 등을 살펴보며 헤아리기 힘든 본성과 신비의 존재인 여성을 탐구한다.

먼저 귀고리, 하이힐, 핸드백 등 아름다워지려는 욕망을 대표하는 뷰티용품에서부터 커피, 생리대, 침대, 그릇 등 삶의 흔적이 담긴 일상 속의 물건들, 립스틱, 시스루, 마스카라 등 이성의 시선을 사로잡는 유혹적인 사물들, 가죽, 호피, 타투, 거울과 같이 여성 내부에 존재하는 남성 취향의 사물들, 브런치, 운세, 인스타그램, 멜로드라마, 프렌치 시크 등처럼 문화적 지형도를 그려볼 수 있는 사물들까지 여자의 물건을 5가지의 갈래로 분류한다. 이 52가지 물건들에는 유형의 물건뿐만 아니라 핑크, 운세, 독서, 엄마 사진처럼 여성의 취향이라 할 수 있는 무형의 자산도 포함된다.

저자는 사물에 담긴 여성의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 역사와 문화에서부터 책과 영화, 그림까지 그 진폭을 넓혀가며 여자의 생활과 마음을 직조한다. 이 과정에서 익숙했던 여자의 물건들은 남성이라는 차이의 시선, 예술가의 직관, 비평가의 날카로운 통찰에 의해 낱낱이 해체되어 진솔해지고 낯설어진다.

고대와 현대, 동양과 현대를 넘나드는 미적 사색은 물건 자체의 일반적인 특성뿐 아니라 인류학과 미학적으로 분석되기도 한다. 고대 이집트에서부터 현재까지 흥미로운 ‘제모’의 역사를 다루고, ‘핑크’가 원래는 남성들의 색이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려준다. ‘목걸이’는 자본주의 정신을 표상하고, ‘시스루’가 은폐의 의지를 지닌 형태라는 것과 ‘선글라스’가 밖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면을 들여다보기 위한 사물이라는 새로운 인식을 심어준다.

저자는 우리가 바라보고, 대상 또한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과 응시의 관계를 통해 은밀히 드러내거나 감추려했던 여성의 속마음을 들춰낸다. 객관적인 시선과 탐색을 유지하는 한편, 주관적 삶의 관점을 제시하기도 한다. ‘반지’의 종류와 크기에 따라 마음의 크기를 평가받는 세태에 씁쓸해하고, ‘하이힐’과 ‘향수’ ‘여자화장실’을 통해 남성으로서의 판타지와 상상을 솔직하게 풀어내고, ‘손뜨개’와 ‘스카프’ ‘양산’을 언급하며 옛날의 정취와 품격을 그리워하기도 한다.

여성을 키워드로 하여 여성의 내밀한 속내를 읽고 그 속에 숨어 있는 남성을 발견하고, 더 나아가 인간의 실존을 탐색해보는 여정은 인문과 예술, 사회 전반에 걸친 탐색과 성찰, 비평적인 시각이 어우러져 있는 동시에 심미적이면서 따뜻하고 애틋한 저자의 정서가 배어 있다. 이는 곧 이 책이 엄마에게 바치는 헌사이자 아내에게 주는 위로이고, 두 딸들에게 들려주는 아빠의 공감이기 때문이다.

사물에 관한 미학자의 관조는 물건과 연관되는 아름다운 예술작품과 함께 배치되어 아름다운 전시장을 방문한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사진작가 김중만의 사진들은 생생한 현장감을 전해주고, 보티첼리, 렘브란트, 세잔, 피카소, 클림트 등 거장들의 명화와 앤디 워홀, 트레이시 에민 등 혁신적인 현대 작가들의 작품, 한국 작가들의 그림들은 저자의 감각적인 글과 만나 시각적인 풍성함을 더한다.

책 속으로

샌들을 보면 고대적 시간이 피어나고, 머나먼 사막이 떠오르고, 바람에 흩날리는 긴 생머리와 긴 치맛자락이 생각난다. 샌들은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욕망, 치장 이전의 구속 없는 자유, 도로 위의 신화적 향기를 내추럴하게 드러낸다. 자유로운 영혼은 샌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샌들은 자유로운 육체로 나아가는 지름길을 알려주기도 한다.
― ‘샌들 : 신들의 신발’에서

착함과 밝음과 건강함의 세계를 지향하는 수영복과 과도한 의욕을 앞세우며 온전히 타인의 시선만을 주목적으로 하는 수영복은 필드의 대화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끈다. 그 몸과 옷과의 자연스러운 일체감, 그리고 조화로움의 수준이 어느 정도이냐에 따라서 그것은 적절함을 획득할 수도, 부적절함을 획득할 수도 있다. 그것은 누드와 네이키드의 차이, 복장(服裝)과 포장(包裝)의 차이와 같은 것일 게다. 수영복 중에서도 비키니는 이런 몸과 옷, 노출과 은폐의 절묘한 줄타기를 통해 우리의 육체가 지킬 수 있는 자유로움의 한계에 도전한다.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 시선과 응시의 부단한 교차 속에서 관음증은 공식적으로 허가받고, 오히려 일종의 장점으로 평가받는다.
― ‘비키니 : 비키니를 입은 비너스’에서

립스틱은 오히려 화장하는 자신의 마음을 감출 수 있는 무기가 된다. 자기 욕구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자기 욕망을 감출 수 있는 속임의 방법으로도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립스틱 색깔로 그녀의 심리 상태를 가늠해보는 일도 100프로 정확하다고 할 수 없게 된다. “립스틱 짙게 바르고” 새로운 결의를 다짐하는 그녀의 입술에서 순정을 확인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 ‘립스틱 : 마음이 드나드는 문’에서

젊은 날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1985에서 로버트 레드퍼드가 메릴 스트리프의 머리를 감겨주는 눈부신 장면을 보고, 나도 언젠가 사랑하는 여인의 머리를 감겨주는 ‘의식’을 행해보리라 생각해본 적이 있다. 그리고 결혼으로 사랑의 세속화를 이룬 이후 나는 또 하나의 의식을 계획했다. 죽기 직전에 그동안 나를 지켜준 여인에게 큰절을 한번 올리고 싶다. 그것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나의 버킷리스트 중의 하나이다.
― ‘헤어스타일 : 라인과 컬러, 무언의 말’에서

원하는 것이 있다면 이 책을 젊고 어린 두 딸과 그 친구들이 읽어주었으면 좋겠다. 이 책엔 아빠 세대의 문화탐험기가 들어 있다. 아빠의 학창시절 읽고 보았던 책과 영화, 즐겨 들었던 팝송, 그리고 아빠가 설명하는 그림들을 두 딸도 똑같이 체험하여 (서로 다르겠지만) 그 느낌을 공유하고 싶다. 아빠가 걸었던 그 길을 간접적으로 같이 걷다가 그네들 자신의 길을 스스로 찾아가길 원한다.
― ‘에필로그 : 다시 여자 속으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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