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로도토스의 <역사>가 김봉철 교수의 번역으로 도서출판 길에서 출간되었다. '고대 그리스사' 전공자에 의한 희랍어 원전 번역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이 책 번역과 출간에는 10여 년의 시간이 걸렸다. 3~4년 전에 초벌 번역이 끝난 이후에도 서구의 새로운 연구 성과 등을 반영함은 물론, 방대한 역주 작업을 거치는 대장정이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담긴 서술 동기와 목적, 서술 대상과 탐구 방식 등은 '히스토리아'(= 역사)의 본보기가 되었다. 여기서 비로소 '히스토리아'라는 말이 역사와 관련된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특히나 그것은 '인간'의 역사를 다룬다는 데 그 최초의 의미를 갖게 된다. 즉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이라는 인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이는 신(神)이나 반신(半神)적 영웅들의 공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들의 실제 사건에 대한 기록이다. 또한 그는 그 서술에 있어 인간사를 신의 뜻이나 계시로 설명하지 않고 인간 중심의 세속적 인과관계로 설명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신화가 아닌 역사서술을 통해 인간사의 내력을 설명한 '최초의 역사가'라는 평가를 받는다.
물론 헤로도토스가 신화적 사고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보기에는 힘들다. 비록 신들에 대한 이야기를 꺼리기는 했지만, 그의 역사서술에는 그리스 신화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그것은 여담의 소재가 되기도 하고, 그의 논거를 위해 활용되기도 한다. 헤로도토스는 가능한 한 자신의 견문 지식이나 현실적 타당성에 입각해 신화를 부정 혹은 수정하고자 했지만, 어떤 경우에는 아무런 논평 없이 신화를 그냥 전해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화서술에 나타나는 특징은 기본적으로 탈(脫)신화화한 역사를 서술하고자 노력했다는 점이다. 즉 그는 적어도 그리스 신화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이 책은 역사학의 시발점 역할만 한 데 그치지 않는다. 헤로도토스 스스로 단순히 전승하는 사료들만을 믿을 수는 없기 때문에 스스로 직접 보고 듣는 과정을 거치는 작업을 병행했다. 이른바 '발로 뛰는 역사가'였던 셈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고대사의 많은 미지의 영역을 알게 되었는데, 이는 바로 헤로도토스가 남긴 <역사>가 갖고 있는 또 다른 특장점이며, 이 책이 지리학적, 인류학적, 민속학적 자료의 보고로 평가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책의 주제는 그리스인과 이방인들 사이의 전쟁이다. 이를 통해 헤로도토스는 그리스인들이 이방인들(페르시아인들)보다 검약과 절제의 미덕을 갖추었고, 군사적으로 더 용맹했고, 자유를 애호했으며 합리적으로 사유하고, 탁월한 도덕심과 교양을 갖춘 민족이었음을 부각한다. 물론 헤로도토스는 이방인들이 갖고 있는 제도와 가치를 찬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단순히 이분법적 태도로 그의 역사관을 평가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럼에도 동서 문명의 첫 대결이었던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이 중심 소재인 이 책을 통해 헤로도토스는 그리스인들의 자유에 대한 자긍심을 높이 평가하고 고취한다.
<역사>는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경과뿐만 아니라 전쟁의 원인부터 설명하고자 하기 때문에 이들 간의 대립과 전쟁의 기원을 밝히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헤로도토스는 제1권의 서두부터 그 대립의 신화적 사례들을 먼저 소개한 후, 자신이 규명한 역사상의 사례를 설명한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키로스 2세에서 크세륵세스 1세 때까지, 시기적으로는 기원전 558년부터 기원전 479년까지의 약 80년 역사를 다루고 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출간 이후부터 후세 사람들에 의해 많은 관심과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다. 고대부터 그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렸는데, 한쪽에서는 그를 역사서술의 개척자 혹은 대표자로 평가하고자 했고, 다른 쪽에서는 그를 신뢰하기 어려운 거짓말쟁이로 평가해왔다. 특히 문헌 고증 위주의 19세기 실증사학과 객관적 역사서술이 강조되면서 투키디데스의 위상이 부각되고 상대적으로 헤로도토스의 입지는 축소되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서 문헌 위주의 전통적 역사 연구에 비판이 제기되고 인류학, 민속학, 지리학 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헤로도토스의 역사서술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다. 즉 그의 역사서술 속에는 고대의 정치뿐만 아니라 종교, 신화, 풍습, 지리 및 동식물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어 고대 세계에 대한 지식의 보고(寶庫)로 부각되었다. 지역적으로도 그리스뿐만 아니라 페르시아, 리디아, 이집트, 스키타이, 바빌론 등의 지역을 다루어 고대 세계의 지역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다.
옮긴이 김봉철은 서울대 서양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서 <이소크라테스의 정치사상: 기원전 4세기 폴리스의 위기에 대한 인식을 중심으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리스 아테네 대학 대학원 역사고고학과에서 수학하고 영국 옥스퍼드 대학 고전학과 방문학자로 연구한 바 있다. 고대 그리스의 정치, 문화, 집단정신, 오리엔트와의 관계에 대한 논문들을 썼다.
CBS노컷뉴스 김영태 기자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