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노조 KBS본부(새노조) 성재호 본부장이 김영한 비망록 내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김수정 기자)
청와대가 공영방송 KBS를 통제해 온 정황이 또 다시 드러났다. 청와대는 KBS 이사와 사장 등 주요 인사에 개입함으로써 KBS를 장악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전국언론노동조합은 17일 오전 11시, 서울 영등포구 KBS 연구동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김영한 전 민정수석이 남긴 비망록 내용 가운데 KBS 관련 내용들을 공개했다. 2014년 6월 15일부터 10월 15일까지 넉 달 간 KBS 관련 메모는 18차례 등장했는데, 이를 통해 청와대가 KBS 이사, 사장 등 주요 인사에 개입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 KBS이사회와 사장 선임 개입 정황6월 15일 메모에는 '6월 18일 (수) KBS정기이사회-사장 임명 논의(7/10까지는)', 'KBS 이길영 이사장', '※선, 배수, 움직일 수', '학교 동기생'이라고 적혀 있다.
6월 16일 메모에는 '홍보/미래 KBS 상황, 파악, plan 작성'이라는 내용이, 6월 17일 메모에는 'KBS노조, 16개 직능단체', '사장선임절차 제의, 공영방송 영·독·일, 수용 곤란', '사추위(김인규 사장)-여야 안분', '방통위원장과 상의'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또한 6월 19일에는 'KBS이사회 개최 법-47장. 7/10', '6.23~30 공모', 6월 22일에는 'KBS이사회'라고 쓰여 있다.
당시 KBS는 사장이 공석인 상태로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길환영 사장이 청와대의 지시에 따라 보도와 인사에 개입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해임됐던 까닭이다. 김 전 수석 메모를 보면 6월 15일부터 19일까지 4차례 거쳐 KBS 사장 선임 일정을 확인하고 KBS 상황을 파악하고 대응 계획을 마련하려는 움직임을 읽을 수 있다.
'김영한 비망록' 2014년 6월 17일자 메모. 당시 내부 구성원들과 언론시민단체에서 요구했던 '사추위'(사장추천위원회)가 적혀 있고 그 위에 '수용 곤란'이라고 쓰여 있다. 실제로 KBS이사회는 길환영 사장 후임을 뽑는 인선에서 사추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진=전국언론노동조합 제공)
청와대의 뜻이 실현된 경우도 있다. 6월 17일 메모에는 '사장선임절차 제의'에 대해 '수용 곤란'이라고 쓰여져 있는데, 실제로 KBS이사회는 내부 구성원들과 언론시민사회 및 KBS 야권 추천 이사들이 요구한 '사장추천위원회 및 특별다수제(제적 인원의 3분의 2 동의를 얻어 결정을 내리는 것)'를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장 선임 이후에도 청와대의 KBS 관련 메모는 계속됐다. 7월 1일에는 '사장 선출 관련', 7월 3일에는 'KBS 6명-조대현 7', 7월 4일에는 'KBS 이사 우파 이사-성향 확인 요'라고 쓰여 있다. 7월 11일에는 '부처-정상화, 공공기관 개혁 : 면종복배', 'KBS이사, 길사장' 이라고, 10월 15일에는 'KBS 이사장 선정 과정 BH 개입'이라고 적혀 있다.
7월 3일 메모에는 당시 사장 후보였던 조대현 씨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KBS이사회가 최종 사장 후보를 압축한 시점은 7월 9일이다. 언론노조 KBS본부(새노조) 성재호 본부장은 "추정이긴 하지만, 메모 있고 6일 후에 면접대상자 6명을 대상으로 면접 심사와 표결을 거쳐 오후 8시께 표결 절차를 논의한 후 바로 표결에 들어갔다"며 "6이라는 숫자는 당시 사장 후보 6명을, 7이라는 숫자는 조대현 후보가 최대 7표까지도 얻을 수 있다는 의미로 쓴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면접을 통해 KBS 사장을 1명으로 압축하는 역할을 맡는 KBS이사회에 대한 개입도 확인할 수 있다. 총 11명으로 구성된 KBS이사회는 여권과 야권에서 각각 7명, 4명을 추천한다. KBS 이사 중 우파 이사(여당 추천 이사)들의 성향 확인이 필요하다는 7월 4일 메모와 KBS 이사장 선정 과정에 BH가 개입했다는 10월 15일 메모는 김기춘 당시 비서실장의 언급을 그대로 적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영한 비망록' 2014년 7월 11일자 메모. '면종복배'라는 부분이 'KBS이사'와 연결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사진=전국언론노동조합 제공)
특히 7월 11일 메모 중 '면종복배'라는 부분이 'KBS이사'와 연결되어 있는데, 성 본부장은 이를 두고 "(여권 추천) 이사 2명의 반란으로 조대현 씨가 사장으로 선정된 것에 대한 메모로 보인다. 공공기관 가운데 KBS 이사들을 대표적인 '면종복배'(앞에서는 복종하는 척하나 뒤에서는 칼을 숨기고 있다는 의미)하는 사람들로 꼽은 것"이라고 전했다.
10월 15일 메모에서는 'BH(청와대)' 개입을 통해 KBS 이사장을 청와대 입맛대로 바꾸려고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길환영 사장 해임과 조대현 사장 선임 당시 이사장이었던 이길영 이사장은 2014년 8월 27일 건강상의 이유로 갑작스레 사임하는데, 마치 기다렸다는 듯 이틀 만에 새로운 인물이 이사장으로 내정된다.
백범 김구 선생을 "대한민국 체제를 부정했던 사람"으로 표현하고, "친일파 청산은 소련의 지령"이라고 해 논란을 일으켰던 뉴라이트 성향 이인호 전 서울대 명예교수가 그 주인공이다. 이인호 전 교수는 9월 2일 대통령 임명을 받아 이사가 된 후, 9월 5일 이사회에서 이사장으로 선출된 바 있다.
'김영한 비망록' 2014년 7월 4일 메모와 같은해 10월 15일 메모. 'KBS 우파 이사 성향 확인 요', 'KBS 이사장 선정 과정 BH 개입'이라고 쓰여 있다. (사진=전국언론노동조합 제공)
이길영 전 이사장은 방송통신위원회 최성준 위원장과의 면담 자리에서 먼저 사퇴 요구를 받았고 그래서 사표를 제출했다고 새노조 측에 최근 밝힌 것으로 나타났다.
◇ 프로그램 개입, 노조 감시 흔적도뿐만 아니라 청와대가 KBS 프로그램과 회사, 정권에 비판적인 노조를 감시한 것으로 보이는 흔적도 있다.
6월 20일 메모 '2012년 KBS 파업사건-법원 무죄선고- 노조 강성화 가속'에서는 새노조에 대한 동향을 체크한 것을 유추할 수 있고, 6월 26일 메모 'KBS 추적60분 천안함 관련 판결 - 항소'에서는 방통위가 '추적60분-천안함 편'에 내린 중징계 처분은 위법하다는 1심 판결에 대해 항소하라는 청와대의 대응 계획이 나타나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일본 식민지배는 하나님의 뜻" 등 부적절한 발언이 드러나 총리직에서 낙마한 문창극 후보 관련 KBS 보도에 대해 언급한 부분(7월 2일 메모, 9월 5일 메모), 세월호 국조특위에서 세월호 당시 대통령 행적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한 KBS 보도를 언급한 부분(8월 14일 메모)도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