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일 포먼 장편소설 '저스트 원 데이'. 우연히 만난 낯선 이와 단 하루 동안 어딘가로 여행을 떠난다면 어떨까. 이 책은 바로 이런 두근거리는 상상에서 시작된다. 주인공 앨리슨이 유럽 여행 도중 길거리에서 셰익스피어 연극을 공연하는 빌럼을 만나 단 하루 동안 파리를 여행하는 것이다. 파리, 셰익스피어, 어떤 특별한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단 하루라는 매력적인 소재를 솜씨 좋게 엮어낸 이 소설은 낯선 도시에서 시작된 특별한 로맨스의 두근거림뿐 아니라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성장통을 감각적인 언어로 그려낸다.
앨리슨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기 전 부모님의 권유로 ‘틴 투어’라는 삼 주간의 유럽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인솔자의 보호 아래 또래 아이들과 버스를 타고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는 이 투어 프로그램이 앨리슨은 지루하기만 하다. 아이들은 밤마다 클럽에 가고 맥주도 마시며 여행을 즐기지만 앨리슨은 호텔에서 익숙한 미국영화를 보며 투어가 끝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그리고 드디어 투어의 마지막날, 셰익스피어의 고향인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에서 <햄릿> 공연을 보기 위해 기다리던 앨리슨 일행은 길거리에서 셰익스피어 연극을 하는 언더그라운드 극단 ‘게릴라 윌’을 만나고, 앨리슨과 친구 멜라니는 <햄릿> 대신 게릴라 윌이 공연하는 <십이야>를 보러 간다.
다음날, 앨리슨은 멜라니와 함께 런던에 있는 멜라니의 친척집에 가던 중 기차에서 게릴라 윌 극단의 배우 빌럼을 우연히 다시 만난다. 그리고 파리에 가고 싶었는데 공항 관제탑 직원들이 파업중이라 가지 못했다는 앨리슨의 말에 빌럼은 딱 하루만 함께 파리에 가자고 제안한다. 런던에서 파리는 기차로 고작 두 시간이니 지금 출발하면 점심은 파리에서 먹을 수 있을 거라면서. 모험이나 즉흥적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반듯한’ 아이 앨리슨은 난생처음 모험을 해보기로 결심하고 빌럼과 함께 파리로 떠난다.
“어떻게 할래? 파리에 가고 싶어? 단 하루만이라도?”
이건 분명히 미친 짓이다. 나는 그를 잘 모른다. 엄마에게 들킬 수도 있다. 단 하루 동안 파리를 보면 얼마나 보겠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될 가능성이 많은 일이다. 이 모든 걱정은 사실이다. 나도 안다. 그래도 파리에 가고 싶은 마음은 변함이 없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거절하는 대신, 지금까지와는 다른 대답을 한다.
예스, 라고. _본문 45쪽
파리에서의 하루 동안 빌럼은 앨리슨의 본명을 묻지 않고 그저 룰루라고만 부른다. 앨리슨이 무성영화 배우 루이즈 브룩스를 닮았는데, 루이즈의 애칭이 룰루라는 것이다. 본명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려서인지, 아니면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일탈을 해서인지 앨리슨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태어나 처음으로 자유롭다는 느낌이 들고 스스로에게도 솔직해진다. 그리고 빌럼과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이 설렘은, 이 자유로움은 단 하루 만에 끝나고 만다. 함께 밤을 보내고 난 후 아침에 일어나보니 빌럼이 아무런 말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상실감을 안은 채 집으로 돌아온 앨리슨은 대학에 진학해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려 애쓰며 파리에서의 하루를 지워버리려 노력한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빌럼이, 그리고 룰루였던 자신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빌럼은 왜 말없이 그녀를 떠난 걸까,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그의 행동은 거짓이었던 걸까, 혹시 그에게 무슨 사고라도 난 건 아니었을까. 그리고 룰루, 그날 그 자유롭던 모습은 진짜 나일까, 아니면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착한 아이인 척 연기를 하는 데 익숙한 이 모습이 진짜 나의 모습일까. 앨리슨은 이 모든 의문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책의 앞부분이 앨리슨과 빌럼의 로맨틱한 만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뒷부분은 앨리슨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자신의 삶에 솔직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내용을 그렸다. 대학에 진학하기 전까지 앨리슨은 엄마가 짜놓은 인생을 큰 불만 없이 살아왔다. 어렸을 때부터 엄마는 앨리슨에게 아빠처럼 의사가 되라고 말해왔고 언젠가부터 앨리슨도 자기가 의사가 되고 싶어한다고 믿었다. 앨리슨의 취미는 시계를 모으는 것인데, 심지어 이 취미마저도 엄마가 시계를 하나둘씩 사주기 시작하며 생긴 것이지 앨리슨이 진짜로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앨리슨은 지금껏 한 번도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뭐가 하고 싶고 하기 싫은지, 뭐가 되고 싶은지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살아온 것이다.
하지만 이런 앨리슨의 삶은 파리에서의 그 하루가 지난 후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단지 빌럼과 보낸 하루를 잊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정말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 것이다.
계속 룰루를 생각한다. 어쩌면 룰루는 그저 하나의 이름에 불과했을 수도 있다. 가짜 이름.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룰루는 가짜가 아니었다. 그날 하루 동안, 나는 진짜 룰루였다. 영화 속의 룰루는 아닐지라도, 진짜 루이즈 부룩스는 아닐지라도, 그날 나는 룰루가 의미하는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자유. 대범함. 모험. 그리고 예스라고 말하는 것.
문득 내가 찾는 사람이 단지 빌럼이 아님을 깨닫는다. 나는 룰루도 찾고 있었다. _본문 301쪽
이런 앨리슨의 고민은 교양수업 ‘크게 읽는 셰익스피어’를 들으며 조금씩 돌파구를 찾기 시작한다. 강의명 그대로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실제 연극을 하듯 소리 내어 읽는 이 수업의 이번 학기 주제는 ‘그 누구도 자기가 연기하는 사람이 아니다’. 정체성 바꾸기와 현실 바꾸기라는 주제로 진행되는 수업을 통해, 그리고 “너는 네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고 있느냐”고 묻는 수업에서 만난 친구 디를 통해 앨리슨은 진짜 자기 자신을 찾고 싶다는 용기를 얻는다. 그리고 자신이 버림받은 것일까봐 두려워 지금껏 알아볼 용기를 내지 못했던, 그날 파리에서 빌럼이 사라진 이유 역시 스스로 찾아보기로 결심한다.
이제 앨리슨은 그날 하루를 정면으로 마주하기 위해 다시 파리로 돌아갈 준비를 시작한다. 난생처음 아르바이트를 해 여행 경비를 모으고, 프랑스어를 배운다. 그리고 파리로 떠난다. 그곳에서 잃어버린 빌럼을 찾기 위해. 아니, 그곳에 두고 온 진짜 ‘나’를 찾기 위해.
책 속으로
우리 모두 어느 하루에 태어났고 어느 하루에 죽는다. 어느 하루, 우리는 달라질 수도 있다. 어느 하루, 사랑에 빠질 수도 있다. 하루 동안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_본문 163쪽
그날 하루, 빌럼과 함께 룰루로 살면서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그동안 내가 창도 없고 문도 없는 비좁은 방에서 참 답답하게 살아왔다는 걸. 그렇게 살면서도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심지어 행복했다.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누군가 내게 다가와 그 방에 문이 있다고 일러주었다. 전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문이었다. 그리고 그 문을 열어주었다. 내 손을 잡고 그 문밖으로 나서게 해주었다. 그 완벽했던 하루, 나는 문밖에 있었다. 다른 곳에 있었다.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는 떠났고 나는 다시 좁은 방에 홀로 남았다. 그런데 이젠 아무리 애를 써도 그 문을 찾을 수가 없다. _본문 221-222쪽
그 순간 나는 그가 내게 얼룩을 남겼음을 깨닫는다. 내가 아직도 그와 사랑에 빠져 있건, 그가 한 번이라도 나와 사랑에 빠진 적이 있건, 그가 지금 누구를 사랑하건 상관없다. 빌럼은 내 삶을 바꾸어놓았다. 그는 내게 길을 잃는 법을 가르쳐주었고 나는 길을 찾는 법을 스스로 터득했다.
우연은 적절한 말이 아닐지도 모른다. 기적이 더 맞는 말일지도.
아니, 기적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마 이런 게 삶일 수도 있다. 우리가 마음을 열었을 때 펼쳐지는 삶. 삶의 행로에 우리 자신을 내려놓았을 때의 삶. 예스라고 말할 때 펼쳐지는 삶. _본문 447-448쪽
게일 포먼 지음 | 이진 옮김 | 문학동네 | 460쪽 | 14,500원
인류가 정체불명의 외계 종족 토오란과 벌이는 기나긴 전쟁을 그린 '영원한 전쟁'이 출간되었다. 블랙홀의 일종인 콜랩서를 이용한 초광속 항법을 발견하여 다른 항성계에 식민지를 건설하기 시작한 인류는 정체불명의 외계 종족 토오란의 공격을 받고 전쟁에 돌입한다. 보병 부대를 편성하기로 결정한 UNEF(국제연합 탐사군)는 ‘엘리트 징병법’에 의거해 IQ150 이상의 강인한 육체를 가진 남녀 쉰 명을 선발하여 강제로 입대시켜서 최정예 징집 군대를 만든다.
이 중 한 사람인 스물두 살 청년 윌리엄 만델라는 사상자가 속출하는 가혹한 훈련을 거친 후 동료들과 함께 한 행성에 있는 토오란의 기지로 보내진다. 그리고 군에서 인위적으로 주입한 의사(擬似) 기억으로 인해 토오란에게 강한 적대감을 품는 살인 기계로 변모하는 경험을 겪는다. 군인들은 전쟁이라는 살육 행위와 초광속 항법으로 인한 시간적 격차로 인해 지쳐 가는 한편, 안식처를 갈구하며 기나긴 여정을 계속하는데…….
CBS노컷뉴스 김영태 기자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