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감정들, 자기 관찰을 통한 내면 읽기'는 감정의 본성과 작동 원리를 해명한다. 구체적이고 역동적인 저자의 묘사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던 감정의 영역을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놓는다.
저자 김성환은 불교식 내관법으로 자기 탐색을 시작했고, 그중에서도 불안, 화, 우울과 같은 부정적 감정의 본질을 밝히는 데 진력했다.
흔히 부정적 감정을 다루는 방법으로 감정이 일어나면 그 느낌을 알아차리고 가만히 바라보라고 말하는데, 막상 이를 실행하기는 말처럼 쉽지 않다. 감정은 ‘나’와 한 몸처럼 붙어 있는 데다가 감정이 일어남과 동시에 몸과 마음이 습관적으로 반응하므로 객관적으로 바라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저자는 감정을 감지하는 즉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쓸리지 않도록 뒤로 물러나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왜 감정 자체를 직접 들여다보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감정이라는 것이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감정이라는 것은 관찰자와 사실상 밀착해 있다시피 하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바라보기가 결코 쉽지 않다. 게다가 감정은 일어남과 거의 동시에 습관적 반응 속으로 몸과 마음을 끌어들이기 때문에 관찰 대상으로 삼기가 더더욱 힘들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감정을 관찰하는 것은 가능하다. 감정을 감지하는 즉시 기존에 중심을 잡고 있던 자리에서 떨어져 나오면, 감정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을뿐더러 그 감정과의 거리까지도 확보해낼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일단 감정을 대상화해놓고 나면, 이제부터는 그 느낌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움직임과 질감 등을 더듬어볼 수 있게 된다.
책 속으로 가장 뚜렷한 형태의 질투는 보통 만족스러운 관계를 유지하던 사람들 중 누군가가 외부에 있는 욕망의 대상을 향해 관심을 돌릴 때 촉발된다. 서로에게 관심을 쏟으며 만족스러운 합일감을 누리던 구성원 중 한 명이 외부 대상으로 상대방을 대체하려 할 때 그 상대방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 그것이 바로 가장 일반적인 의미의 질투이다. … 먼저 확실히 해 두어야 할 것은 새롭게 등장한 욕망의 대상이 질투 당사자가 인정할 만한 탁월성을 실제로 지닌다는 점이다. 만일 이 측면이 결여된다면 당사자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질투라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 이 같은 태도에서는 질투 특유의 긴장감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 <시기와 질투="">·30쪽
매혹은 발생과 동시에 일종의 거부감, 또는 반감까지도 함께 불러일으키는 경향이 있다. 즉, 매혹은 매혹 대상을 중심으로 쾌감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이 대상에게 관심을 빼앗기는 다른 대상을 거부감으로 뒤덮기도 한다. 다른 사람의 화려한 모습이 자신을 상대적으로 초라해 보이게 만드는 것도 바로 이 거부감의 영향 탓일 것이다. ― <열등의식>·57쪽
불안의 느낌 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미묘한 형태의 마찰감이다. 무언가 쏠려 오는 듯한 느낌과 함께 일어나는 모호한 형태의 통증, 그것이 불안의 가장 큰 특징이다. 이 통증은 신체적 통증과는 달리 특정 지점에 국한되어 있지 않으며, 일정 기간 동안 지속되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곤 한다. 그것은 말하자면 유동하는 통증, 움직이는 통증이다. … 그 통증은 어딘가 차갑다는 인상도 전해준다. 마찰에 의해 발생했거나 마찰 그 자체인 것처럼 보이는데도 화끈거리기보다는 차갑고 삭막하다. 마치 서늘한 안개가 몸속으로 스며들기라도 하는 듯한 기분이다. 이와 더불어 불안에는 무언가가 수축하는 듯한 느낌도 동반된다. 그것은 보통 중심을 향해 꽉 조여지는 듯한 느낌으로 경험되며, 실제로 일어나는 근육의 수축, 즉 긴장 운동을 통해 가장 뚜렷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 <불안>·86쪽
불안은 내적 균열로부터 비롯된 일종의 자기 파괴 과정이다. 즉, 일시적으로 떨어져 나가 독자적으로 활동하게 된 주체의 일부가 뒤로 후퇴하다 그곳에 이미 자리 잡고 있던 다른 부분과 마찰을 빚으면, 그 쓰라린 통증이 수동적 입장에 놓인 주체 자신에게 불안으로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 <불안>·88쪽
여기서 말하는 욕망의 좌절은 단순히 그 욕망이 실현되지 않는 것과는 다르다. 욕망의 좌절이란 욕망이 거꾸로 실현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자면, 상대방과 좋은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욕망의 좌절은 상대와의 관계를 파탄 내는 것이다. … 그렇다면 불안 대상으로서의 죽음에는 모든 욕망이 거꾸로 실현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을 향한 의지 전체가 거꾸로 실현되는 것, 그것이 곧 죽음인 셈이다. ― <불안>·145~146쪽
모든 불안은 결국 죽음에 대한 근본적 불안이 소규모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불안의 내용이 실현되는 것은 의지나 욕망이 거꾸로 실현되는 것이고, 이는 곧 의지나 욕망의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 <불안>·147쪽
모든 것을 뜻대로 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의지가 아무리 내달린다 해도 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화의 기본 단위라 할 수 있는 충돌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처럼 방해 요인이 존재한다고 해서 반드시 화가 촉발되는 것은 아니다. 화를 유발하려면 당사자가 기존의 태도를 고집해야만 한다. 방해 요인을 인식하는 즉시 기존의 욕구나 견해 따위를 수정한다면 화는 일어날 수 없다. 화라 불리는 그 느낌은 사실상 의지와 방해 요인의 지속적 충돌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 <화>·156쪽
화를 통해 정신적인 몸의 윤곽이 드러나는 셈이다. 어쩌면 화라는 것은 결국 그 보이지 않는 몸이 현실과 부딪힐 때 일어나는 심리적 통증에 불과한지 모른다. … 화라는 반응을 뒤틀린 회복 의지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화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는 결국 잃어버린 몸을 회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화는 몸에 난 상처의 화끈거리는 반응과도 지극히 유사하다. 하지만 화는 신체적 염증과는 달리 본래 목적에서 벗어나 파괴를 향해 곧장 치달을 수도 있다. 회복 의지가 파괴 의지로 변형되고 마는 것이다. ― <화>·158~159쪽
터질 듯이 들끓던 화라도 상황에 대한 이해가 들어서기만 하면 즉시 사라질 수 있다. 이 효과는 거의 놀라울 정도이다. 따라서 현실에 대한 이해력 결여는 생각보다 큰 문제라 할 수 있다. 불필요한 화를 촉발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즉, 현실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면 부족할수록 상황을 제멋대로 해석해놓고 거기에다 화를 내기도 쉬운 것이다. ― <화>·171쪽
우울감의 고통이 이러한 의지의 유출, 또는 소실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당면한 현실 상황과 자신의 의지가 공존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식한 당사자가 현실을 인정하고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의지를 놓아버릴 때, 정신에 의한 구성 작용을 상실한 의지가 흩어져 소멸하면서 우울감 특유의 불쾌감을 유발하는 것이다. ― <우울과 슬픔="">·190쪽
우울한 느낌의 진정한 원인은 현실 상황 자체가 아니라 그 현실 너머로 부풀어 오른 의지의 포기이다. 설령 현실 인식을 포기와 결국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고 우울감의 원인으로 설정한다 하더라도, 그 원인과 사실상 일체를 이루고 있는 능동적 측면을 무시한다면, 다시 말해 현실의 압력에 짓눌려 곧 무산되고 말 의지를 굳이 일으키는 이 맹목적 행위를 함께 고려하지 않는다면, 전체 원인의 반쪽을 놓치는 셈이 될 것이다. ― <우울과 슬픔="">·1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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