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세계사는 시간의 흐름을 중심으로 서술되어 왔다. 시간이라는 틀로 세계사를 바라보면 사건의 선후와 그에 따른 인과관계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기에, 예로부터 시간은 역사의 중요한 기준으로 활용되었다. 하지만 신간 '공간의 세계사'의 저자 미야자키 마사카쓰는 시간의 흐름만을 중심으로 역사를 파악하는 것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고 말한다.
대항해 시대처럼 역사의 전환점이 될 수 있는 획기적인 시기가 세계사에 여섯 번 있었다고 말한다. 나아가 공간혁명이라 불리는 그 여섯 번의 시기에는 새로운 공간으로의 확장과 그에 발맞춘 새 공간질서가 형성되었다고 밝힌다.
'공간의 세계사'는 총 6부로 나누어져 있다.
첫 번째 공간혁명, 기원전 5000년경 건조 지대 큰 강 유역에서 거대한 농업공간 형성
두 번째 공간혁명, 2500년 전 유목민이 이끈 유라시아의 여러 지역 세계 형성
세 번째 공간혁명, 1400년 전 이슬람 제국에서 시작된 유목민과 상인에 의한 유라시아의 통합.
네 번째 공간혁명, 500년 전 대항해 시대 이후 대양이 대륙을 잇는 대공간과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근대체제의 형성
다섯 번째 공간혁명, 200년 전 유럽을 중심으로 철도와 증기선에 의해 형성된 자본공간
여섯 번째 공간혁명, 20년 전 인터넷을 바탕으로 형성된 전자공간
이 여섯 번의 공간혁명을 이끈 핵심 요소 네 가지, '말·항해·자본·전자'는 모호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공간'과 '공간으로 읽는 역사'라는 개념을 구체화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실제로 '말'의 공간 형성 능력은 거대한 영역을 연결했고 군사적 잠재력은 유라시아 제국을 형성시키며 세계사의 골격을 만들었다. '항해'는 단번에 세계사의 공간을 확장해 지표의 70퍼센트를 차지하는 해양공간을 역사 속으로 끌어들였다. 이 시기 상인과 항해사들은 배로 넓은 영역을 연결해 대량의 상품을 매매함으로써 이익을 얻는 새로운 경제 방식, 즉 자본주의를 고안했다. 산업혁명 이후 등장한 철도와 증기선은 상품의 대량수송을 뒷받침하며 자본주의를 지구 규모로 확대해 자본공간을 성립시켰고 19세기 후반 미국에서 시작된 인터넷은 '전자'가 의사소통과 정보 전달에 고도로 이용되는 '전자공간'을 탄생시켰다. 현재 '전자공간'은 글로벌한 정보 전달, 금융, 물류 등에 폭넓게 이용되고 있으며 인류 사회는 그에 따라 급격하게 모습을 바꿔가고 있다. 공간혁명은 지금 이 순간에도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여섯 번의 공간혁명과 그에 따른 인간의 활동 공간의 확대가 만들어낸 이 역동적인 세계사는 역사를 먼 과거의 기록이 아닌 지금 이 순간 진행되고 있는 사건으로 인식하게 하며, 우리의 삶과 역사를 결합해 파악할 수 있게 도와준다.
오늘날 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 연결되어 있다. 세계 각지에서 터지는 중요한 사건들은 SNS(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거리와 상관없이 실시간으로 공유되고 있으며 세계 반대편에서 일어난 일의 여파가 몇 시간도 안 돼 전 세계로 퍼져나간다. 이는 인류가 전자공간을 바탕으로 세계 곳곳이 긴밀하게 연결된 '글로벌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세계 각국의 역사와 문화, 그에 따른 차이와 갈등 등을 깊이 파악하고,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는 지식이다. 세계사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책 속으로
이 책은 독일 법학자 카를 슈미트가 언급하는 역사관을 바탕으로 세계사의 발자취를 전체적으로 살펴볼 생각입니다. 그러나 대항해 시대를 세계사의 분기점으로 하는 그의 견해는 대찬성이지만 그것을 유일한 공간혁명이라고 여기는 슈미트의 이야기에는 조금 더 폭넓은 연구를 보태고 싶습니다. 세계사의 구조를 파악하는 데 있어 복수의 역사 공간을 설정하고 공간의 확장과 동시에 형성된 새로운 공간질서를 탐구하는 것은 앞에서도 말했듯, 시간으로만 역사를 파악하는 것 보다 훨씬 단순하고 명료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글로벌 시대에 걸맞는 역사 인식 방법이기도 합니다. _ 《서문》(pp.16-17)에서
말의 공간 형성 능력은 막대하다. 기마술의 개발이 추진되자 말은 이동, 운송 수단뿐 아니라 공간을 확대하는 강력한 무기로 변했다. 또한, 말을 이용해 집단전을 펼치는 유목민이 두 번째, 세 번째 ‘공간혁명’의 주인공이 되었다. (……) 보리가 경제의 상징이듯 말은 군사의 상징이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남쪽’ 큰 강 유역의 농업공간과 ‘북쪽’ 대초원의 유목공간 형성, 그리고 그 후에 진행된 협동과 투쟁(유라시아의 남북대립)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유라시아 대륙의 역동적 세계사가 보이지 않을 것이다.
_ 첫 번째 공간혁명 《1장 모든 것이 시작된 강》 (pp.39-40)에서
현재 중국의 역사서는 광대한 몽골 제국을 ‘원元’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사의 틀 안에 편입시켰고, 이에 유라시아에서 일어난 세 번째 공간혁명은 깡그리 지워지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세계사의 총체적인 과정이 보이지 않게 된다. 오늘날 우리는 높은 곳에서전체 모습을 한눈에 담은 조감도 방식으로 세계사를 바라보며, 유라시아 공간질서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일관된 관점으로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 세계사를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_ 새 번째 공간혁명 《하나가 된 유라시아》(pp.117)에서
15세기에 시작되는 대항해 시대는 유라시아 공간에서 지표의 70퍼센트를 차지하는 대양으로 세계사의 무대를 확장하고, 3개의 대양이 5개의 대륙을 연결하는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열었다. 이것이 바로 네 번째 공간혁명이다. 유라시아 건조 지대를 중심으로 하는 교역 규모를 훨씬 능가하는 바다를 통한 교역이 시작되자 세계는 대규모로 재편되었다. 해양공간은 육지와는 전혀 달라서 눈에 보이는 길 없이 해도에 기록된 항로에 의해 다양한 지역이 연결되는 대공간이다. (……) 대항해 시대 이후 세계사는 섬들과 바다로 이루어진 ‘다도해’의 연계망에 의해 파악되는 공간으로 주 무대를 옮긴다. 다양한 연계망으로 연결되는 해양공간은 사막의 상업공간과 유사하고 영토를 전제로 하는 제국과는 대조적이었다. 슈미트는 “세계사는 기본적으로 육지와 바다의 각축전”이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대항해 시대에 일어난 육지공간에서 바다공간으로의 전환은 세계의 모습을 뿌리부터 바꾸어놓은 변혁이었음”을 지적한다. _ 네 번째 공간혁명 《대항해 시대가 이룩한 세계》(pp.199-200)에서
1870~1890년대에 걸쳐 자본주의는 신기술의 등장으로 광범위하게 쇄신되었다. ‘공간혁명’은 지구 규모로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 것이다. 철강업에서는 무른 선철 대신 부드럽고 강한 강철이 개발되었고 금속을 가공하는 선반 기술이 발달해 조선, 건축 등의 중공업이 산업의 중심이 되었다. 화약과 농약을 만드는 화학공업도 발달했고 석탄을 대신해 석유가 에너지원이 되었다. 이 와중에 열에너지를 기계적 에너지로 바꾸는 내연기관과 함께 새로운 에너지인 전력이 등장했다. 산업 규모가 확대되자 막대한 투자가 필요해지고 자본을 조달하는 은행과 증권회사가 큰 역할을 맡게 되었다. (……) 경제의 세계화는 새로운 정보 연계망을 요구했다. 영국을 중심으로 해저 전신 케이블이 부설되고 정치와 경제 정보의 신속한 전달이 요구되었다. 런던에 거점을 둔 통신회사 로이터는 해저 케이블망을 이용해 세계에 정치 뉴스나 주가, 상품 정보 전송, 전신 송금 등으로 자본의 활동을 지원하고 정보와 금융 면에서 영국의 영향력을 강화했다.
_ 다섯 번째 공간혁명 《자본이 집어삼킨 지구》(pp.316-317)에서
1970년대에 컴퓨터, 통신, 소프트웨어를 축으로 하는 산업구조 변화를 동반한 정보혁명이 추진되자 그 영향으로 여섯 번째 공간혁명이 시작되었다. 미국의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그의 저서 『제3의 물결』에서 농업혁명, 산업혁명에 이은 인류 역사의 획기적인 변혁은 전자를 다각적으로 활용하는 정보혁명이고, 이로써 세계가 탈공업화로 향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토플러는 세계화에 의해 부는 지구상의 어디에서나 창출할 수 있으며, 사이버 공간에 축적될 것이라 말했다. 이로 인해 부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고 각종 전자정보가 교환되는 전자공간의 개발이 새로운 부의 원천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_ 여섯 번째 공간혁명 《지구를 뒤덮은 전자공간》(pp.377-378)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