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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백남기 형님, 후배 농민들의 울타리 자처하던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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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지기로서 너무 안타까워 머리 속이 하얘져

- 경제점수 0점, 도덕점수 100점
- 평생을 농촌·우리 밀 살리기에 앞장서
- 보성농민회, 유지 받들어 5500평 우리 밀 농사 이어갈 예정
- 욕심 버리고 베풀고 살자는 '호랑나비 운동' 주도해

[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 방 송 : FM 98.1 (18:30~20:00)
■ 방송일 : 2016년 9월 26일 (월) 오후 6시 30분
■ 진 행 : 정관용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
■ 출 연 : 최영추 (전남 보성 농민)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병원 장례식장에 놓인 고 백남기 농민 영정. (사진=윤창원 기자/자료사진))

 

◇ 정관용> 백남기 선생 결국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 316일 만에 어제 돌아가셨죠. 먼저 오랜 세월 아주 각별한 우정을 나눈 후배 농민이십니다. 보성의 최영추 선생님 연결해서 백남기 선생 어떤 분이셨는지 잠깐 회고해보도록 하죠. 최 선생님, 나와 계시죠?

◆ 최영추> 네, 반갑습니다.

◇ 정관용> 참. 가슴이 많이 아프시겠어요.

◆ 최영추> 네.

◇ 정관용> 백남기 선생하고는 몇 년 인연이세요?

◆ 최영추> 80년도 중반이니까 약 한 30년 좀 넘는 인연입니다.

◇ 정관용> 네. 원래 최 선생님도 백 선생님도 다 보성 거기가 고향이세요?

◆ 최영추> 저는 보성이 고향이 아니고요. 농민운동하고 귀농한 사람이었고요. 남기 형님은 10대째 사는 고향에 살아서 학생운동하시다가 구속도 되고 그다음에 수도사 생활도 하시다가 귀농했던 시기가 아마 84년도인 것 같습니다. 그때 무렵에 남기 형님을 뵌 것 같습니다.

◇ 정관용> 지금 10대째 거기 보성 백씨 집성촌에 사셨다면서요, 백남기 선생께서.

◆ 최영추> 네, 그렇습니다.

◇ 정관용> 그래서 백 선생께서 자주 가시던 산성이 있던데 그건 어디입니까?

◆ 최영추> 아, 거기는 이제 활성산성이라고요. 임란 때 군사 조련했던 토성이 인근에 있습니다. 거기 원형이 보존되어 있는 토성입니다. 마음이 심란하고 그러시면 거기를 자주 올라가신다고 그러시더라고요. 저하고도 한 번 같이 간 적이 있고요.

◇ 정관용> 특별히 그 장소에 어떤 의미나 인연 이런 것 때문은 아니고?

◆ 최영추> 네. 고향 사랑이시죠. 인근에 있으니까요.

◇ 정관용> 네. 우리 청취자 분들께서 백남기 선생 어떤 분이셨는지 좀 알려주세요. 제일 먼저 뭘 말씀하시겠습니까?

◆ 최영추> 저하고 인연이 30년이 넘게 또 개인적으로 고등학교 선후배 관계이고 농민운동 해서 이렇게 뵀는데 백남기 선생님은 좀 원래 수도사 생활을 한 3년 하셔서 모든 게 수도자적 삶을 사셨고요. 사모님 말에 의하면 그 경제 점수는 0점인데 도덕점수는 100점 이렇게 아주 열변하신 분이셨고 평생을 농촌이 어떻게 하면 우리가 농민들이 일하는 만큼 대접받고 사는 세상을 만들어볼까 노력하신 분이었고 한결같이, 작년에 69세셨으니까요. 70을 앞두고까지도 마지막에 우리도 나이 좀 들었어도 저하고 4년 선배 되십니다만 우리가 중요한 것이 젊은 후배들이 농촌을 자주적으로 이렇게 스스로, 누구도 농민들을 도와주지 않으니까 농민들이 스스로 나서야 된다. 우리가 울타리라도 되어 주자해서 정말 한 번도 마음 변하지 않고 이렇게 농민 활동을 해왔었습니다.

◇ 정관용> 그리고 '우리 밀 살리기 운동'에도 아주 주도적으로 참여하셔서 직접 우리 밀을 많이 재배하셨다면서요.

◆ 최영추> 네. 80년대 후반에 수입 밀 때문에 우리 밀이 흔적조차 없고 종자도 구하기 힘들 정도로 그랬을 때 카톨릭민회 산하 우리밀살리기운동본부를 설립해서 여러 군데를 돌아다니면서 시골에 갖고 있는 종자들도 수집하고 해서 우리 밀 궐기의 선봉에 서셔서 작년에 사고 날도 우리 밀 파종하고 이틀 전에 파종하고 민중총궐기에 이렇게 나섰던 것입니다.

◇ 정관용> 그러니까 작년 사고 이틀 전에 백남기 선생께서 직접 뿌리신 그 씨가 지금 자라서 얼마 전 그걸 수확을 하셨다는데.

◆ 최영추> 네, 수확을 했습니다.

◇ 정관용> 수확량이 그런데 굉장히 줄었다면서요.

◆ 최영추> 네, 이제 남기 형님이 서울에 계시고 사고로 계시고 우리 주변 동지들이 남기 형님 관련해서 바쁘게 움직인 결과 풀 관리를 못해 가지고 조금 수확량은 한 절반, 정도로 떨어졌는데요. 의미를 살리자 해서 지금 우리 밀 살리는 본부하고 같이 해서 수확을 해서요. 작년에 그쪽에 우리 밀 살리기 운동, 우리 밀 공장에서 바로 가공해서 전량 뜻 있는 사람들이 냉면이랄지 이런 것으로 해서 판매가 될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사후에 사모님하고 같이 협의해서 남기 형님 뜻을 살리기 위해서 그 밭을 한 5500평 정도 되는데 그 밭에다 우리 보성농민회가 계속 밀을 심어서 남기 형님의 숭고한 뜻을 대신하자. 이렇게 결정을 했습니다.

◇ 정관용> 네. 그리고 또 얼마 전에는 백남기 선생께서 호랑나비 운동이라는 걸 하셨다는데 그건 뭡니까?

◆ 최영추> 그건 남기 형님하고 저하고 좀 오랜 세월 같이 친구처럼 동지처럼 선후배간이었기 때문에 제안해서 우리가 ‘호랑’이라는 것이 호주머니라는 뜻인데 옛날에 우리 한복에는 호주머니가 없었던 모양이에요. 병자호란 이후로 청나라군대들이 조끼를 입었잖아요. 조끼가 주머니가 있었죠. 유목민족이었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 많아서 호주머니에 넣고 그랬나봐요. 그래서 그 호랑이, 우리가 옛날 시골 촌에서도 호랑이라고 말하거든요. 주머니 낭 자 써가지고 호주머니라고 하는데 우리가 가진 것 없는 농민이지만 같이 있는 것도 같은 동기들끼리 나누고 비우자 그래서 호랑나비. 그래서 사람이 너무 욕심과 또 힘들게 살고 있지만 그런 자그마한 문제로 하면 우리가 비상할 수 없다. 나비처럼 가볍게 날아야 되는데. 그래서 우리가 가진 건 별로 없지만 호주머니 비워서 주변 동지들이나 농민들하고 같이 나누고 비우자 해서 몇 명이, 한 7· 8명이 모여서 그런 운동을 시작했던 것이 호랑나비 운동입니다.

◇ 정관용> 제 주머니 채울 욕심 버리고 주머니에 있는 것 나눠서.

◆ 최영추> 자기 주머니 채워서 주머니에 깔아 앉아버린 사람이 많이 있죠.

◇ 정관용> 알겠습니다. 최 선생님 우리 백 선생님은 가셨습니다만 우리 밀도 계속 좀 심어주시고. 호랑나비 운동도 계속 전개해 주시기를 부탁드릴게요.

◆ 최영추> 네. 하여튼 안타깝고요. 제가 말씀드리기 그렇습니다만 지금 머리가 하얀 상태입니다.

◇ 정관용> 네, 고맙습니다. 최영추 선생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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