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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하일성 생전 강연 "가족 앞에서 난 실패한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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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하일성(사진=자료사진/노컷뉴스)

 

8일 오전 세상을 등진 야구해설가 고(故) 하일성이 생전 한 TV 강연 프로그램에서 가족의 소중함을 강조해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고 하일성은 지난 2014년 12월 방송된 EBS 강연 프로그램 '가족의 발견'에 출연해 자신의 인생사를 전했다.

그는 "사실 가족에 대한 중요성을 별로 생각하지 않고 바쁘게 살아 왔다"며 "이번 기회에 가족이 뭔지, 여태까지 살아 오면서 주위에서 가장 고마웠던 사람이 누군가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고 운을 뗐다.

"저는 사실 어릴 적 소위 냉탕 온탕을 왔다갔다 했어요. 제가 초등학교 4학년까지는 굉장히 부유한 집안에서 외아들로 호강하면서 자랐죠. 그러다가 열한 살에 아버님 어머님이 이혼을 하시면서 어머님은 결혼해 외국으로 떠나셨고, 군인이셨던 아버님은 지방으로 가셨어요. 그때부터 본의 아니게 자취를 시작했어요. 그 이후로 저는 가족과 살지 못했습니다."

하일성은 "그때 제일 싫은 날이 명절이었다. 갈 데가 없었기 때문"이라며 "명절에는 (주인집) 친척들이 올라오니 자취방을 비워줘야 했다. 명절 때면 야구부실에서 혼자 자고 라면 끓여 먹었기 때문에 명절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그는 가족의 소중함을 처음 느낀 때를 전하며 베트남전 참전 당시 아버지에 얽힌 일화를 공개했다.

"1968년 2월 군에 입대를 했어요. 그때 저희 아버님이 장군이셨어요. 속 많이 썩였죠. 학교 다닐 때 불량클럽에 들어가고 불량 리스트에도 오르는 등 어렵게 졸업했는데, 군대 가서도 말썽을 많이 피웠거든요. 가족 간에 제일 중요한 게 대화입니다. 그런데 저는 아버님과 대화를 다섯 마디 이상 해본 적이 없어요. 학교에 오신 아버님이 '별 일 없냐' '어디 아픈 데 없냐' '용돈 필요하냐'라고 물어보시면 '네'라고 대답하는 게 전부였죠. 늘 이런 대화 속에서 자랐어요. 어머니는 외국에서 사시니까 몇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했고요."

학창시절 야구를 했던 하일성은 "야구를 안 했으면 상당히 못된 길로 빠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나마 야구에 매달린 덕에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어요. 군대에 있을 때 하루는 아버님이 저를 부르시더군요. '지금 이렇게 살아서 앞으로 뭐가 되겠냐. 너는 아무 의미 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물론 너를 이렇게 만든 건 부모일지 모르겠다. 너도 이 다음에 나이 먹고 결혼해 자식을 낳아봐라. 부모로서 죄를 지어서 자식에게 하고 싶은 말을 못하고 살 때 얼머나 가슴 아픈지 아냐'라며 '아무 소리 하지 말고 월남에 가거라'라고 말하셨죠."

월남행 배로 향하는 기차에서 만난 아버지는 하일성에게 20달러 지폐 다섯 장을 쥐여줬다고 한다.

"제가 월남에서 전투병과로 있으면서 한 달에 27달러인가 29달러를 받았으니 굉장히 큰 돈이었죠. 아버지는 '베트콩에게 포로로 잡힐 경우 이 돈이라도 주고 살아올 수 있으면 살아오라'고 말하시면서 우시더군요. 그때 가족이라는 걸 처음 느꼈죠. 월남전에 참전하면서 제 인생이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살아 돌아간다면 이렇게 살지 않겠다'고 마음 먹었죠."

◇ "제가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가족"

고 하일성은 야구해설가로서 자신의 삶을 소개하면서 "인생에서 승부는 게임처럼 즐기는 것"이라는 인생관을 강조했다.

"우연한 기회에 야구해설가 일을 시작했고, 열심히 최선을 다했어요. 그런데 제가 착각한 게 있어요. '인생은, 프로는 승부를 전제로 한 인생을 사는 것'이라고 믿은 거죠. 승부는 게임이잖아요. 게임은 즐기면서 재밌게 해야 하는 건데, 저는 승부만 생각했어요. 이기기 위한 승부만을요. 결국 그렇게 얻은 게 병이었죠.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요. 우리는 승부와 경쟁을 하면서 살아가지만, 그 승부와 경쟁을 즐기라는 겁니다."

심근경색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며 수술을 한 일화를 전하면서는 "새벽에 중환자실에서 눈을 뜨니 옆에 아내가 있더라. 그리고 그 시간에 가족들이 다 와 있었다. 그때 살아야 할 이유를 알았다"고 말했다.

"당시 제 몸을 학대했다는 점을 굉장히 후회했어요. '가족들을 슬프게 하면 안 되는구나' '내 곁에는 저 가족이 있구나'라는 걸 절감했죠. 그로부터 2년 뒤에는 위에 종양이 생겨 수술을 했어요. 제 첫 손녀가 호주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 애를 꼭 보고 와야만 수술을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 아이가 그렇게 보고 싶더군요. 수술실 문 닫기 전에 눈 마주치는 사람은 자식이 아니라 아내더군요. '내가 죽으면 저 사람 주민등록등본도 못 떼고, 자동차 오일도 못 갈 텐데' 하는 걱정이 들었죠."

그는 스스로 '실패한 인생'이라고 말했다. "외형적으로는 성공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내면을 봤을 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승부를 즐길 줄 몰랐으니까요.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먼저였고, 그러다 병을 얻어 가족을 슬프게 했으니까요. 제가 수술 뒤 우울증으로 고생할 때 아내가 '당신 술 먹고 다닐 때가 제일 행복했다'는 말을 했어요. 제가 술 마시고 새벽에 들어갈 때마다 매번 뭐라고 하던 사람이었는데 말이죠.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마음에 3개월간 정신과 치료를 받은 뒤 다시 사회 생활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하일성은 마지막으로 "제가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가족"이라고 강조했다.

"요즘 제가 큰 돼지저금통에 동전을 넣어요. 그거 가득 차면 제 셋째 손녀를 줄 겁니다. 동전이 생길 때마다 기분이 좋아져요. 다 차면 줘야지라는 마음이니까요. 이게 가족입니다. 베풀 때 더 행복한 겁니다. 더 힘내고 더 밝고 더 건강하고, 경쟁을 하더라도 즐길 줄 아는 삶을 살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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