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한 경쟁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사회의 룰’을 숭배하며 언제 계절이 오고 가는지 어떻게 꽃이 피고 지는지조차 점점 잊어간다. 그리고 은퇴할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또 다른 삶에 눈을 돌리지만 선뜻 길을 정하지 못하고 방황하게 된다.
신간 '사라져 아름답다: 은퇴할 사람들과 은퇴한 사람들에게 띄우는 세 번째 지리산 통신' 은 바로 이러한 삶의 후반기에 놓인 세대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33년의 방송인 생활을 접고 은퇴 7년차인 저자 구영회는 직접 자신의 경험을 소개하며 사회인의 옷을 벗고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삶으로 돌아가 아름답게 인생을 마무리 지으라고 이야기한다.
여기 초로(初老)의 한 남자가 있다. 가난한 시골 출신으로 고학 끝에 명문대를 졸업하고 유명 방송국에서 불꽃 튀는 진검승부를 거쳐 정상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 그는 세인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성공한 사회인’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는 어떤 허허로움을 느꼈다. 이 숨 가쁜 질주의 ‘끝’에서 기다리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이 ‘유한한’ 삶을 어떻게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 걸까? 이런 고민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깊어졌고 이윽고 그는 좁은 사회 속에서 규정지었던 삶을 대자연으로 확장해야만 그 답을 얻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는 지리산의 품에 안겼다. 세속적 계산과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무상(無常)의 섬진강 물결에 몸을 싣고 인생의 의미를 찾기로 했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사유의 여정으로의 초대장이다. 저자는 지리산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할 수 있도록 깨달음을 준 자연물과 인물이 있는 곳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강과 바다가 만나지는 지점으로 세상살이의 끄트머리를 암시하는 망덕 포구, 피고 지는 삶의 이치를 보여주는 섬진강변 벚꽃길, 잊었던 동심을 일깨우는 순수한 농촌 아이들, 진정한 이타심을 가르쳐 주는 수녀님들, 묵묵히 자신의 길에 정진하며 번뇌를 다스리라고 다독여 주는 스님들.
저자의 발길을 따라 지리산 곳곳을 거닐며, 아름다운 대자연과 그 안에서 자연의 품성에 물들어가는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행복한 삶과 아름다운 마감의 비밀이 결코 멀리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잔잔하지만 울림이 큰 시적인 문체와 저자가 직접 찍은 수채화 같은 사진들도 오랫동안 여운을 남긴다.
이제 떨어지는 꽃잎을 다시 바라보자. 꽃이 지는 것은 바람 때문이 아니다. 그 향기와 아름다움을 추억으로 남긴 채 자신의 자리를 연둣빛 잎과 열매에게 내주는 꽃은, 불같은 격정을 뒤로 하고 자연의 섭리를 받아들이는 성숙한 사랑의 실천자이다. 지상에서 이별하는 이의 뒷모습도 이와 같기를. 꽃처럼 아름다운 삶과 이별을 준비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고 저자는 말한다.
책 속으로강이 이름을 버려야 하는 곳에는 바다가 기다리고 있다. ‘낮은 곳’을 향해 하염없이 흐르고 흐르던 섬진강은, 마침내 이름 없는 그냥 물이 되어 큰 바다에 고여 든다. 그 강의 이름이었던 섬진은, 바로 은퇴할 당신의 세상살이에 당신이 마지막으로 쥐고 있던 사회적 명함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 은퇴할 당신은 세상에서 물러나면 명함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은퇴한 당신은 그냥 다시 물이 될 뿐 명함이 없다.(‘망덕 포구’ 중에서)
나는 벚꽃 천지인 섬진강 풍경을 가슴에 또 새기고 싶었다. 비에 젖은 꽃잎들은 엷은 분홍빛을 더욱 강렬하게 보이게 했고, 틈틈이 새하얀 꽃잎들은 분홍빛과 대조를 이루며 서로 도드라졌다. 나무줄기와 가지들 또한 진한 검정으로 눈길을 잡아끌었다. 지리산 계곡 방향으로 꺾어들어 화개 벚꽃들이 만들어 놓은 긴 꽃 터널을 지날 때, 이곳에서 함께했던 옛 얼굴들이 문득 떠올랐다. 한껏 설렘과 흥겨움을 나누었던 그 시절 그 얼굴들과 그 마음들…. 비에 젖은 차창에 꽃잎들이 후두둑 떨어져 달라붙었다. 바람이 꽃비를 뿌렸다. 길가 나무들 아래에는 무수한 꽃잎들이 쌓여가고 있었다. 꽃잎들은 피어나면서 동시에 지고 있었다.(‘섬진강변에서’ 중에서)
내가 가야 할 길이 있듯이 스님도 스님의 길이 있었다. 더구나 스님은 10대 시절 출가한 이래 이미 50년 동안 그 외길을 걸어온 것이었다. 일생 동안 단 하나의 실마리를 붙들고 살아온 것이었다. 평생을 오로지 한 가지에 몰두한 것이었다. 그 모습은 천하에서 가장 고독한 것이었지만, 그러나 나를 포함해 주변을 끊임없이 적시어 온 것이었다. 그 모습은 ‘일심불란’(一心不亂)이었다. 내 마음은 아직도 이런저런 잡티가 섞여 다심소란(多心騷亂)하다.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다. 청산은 원래 움직인 적 없는데 흰 구름만 저 혼자 오고 간다. 내 안의 청산은 어디 있을까.(‘일심불란’ 중에서)
나는 나를 되풀이해서 추스르고 추슬렀다. 내 마음 이곳저곳에 덕지덕지 붙은 해묵은 부스럼 딱지들을 떼어내며 새살이 돋기를 바랐다. 나는 처음에는 내 인생의 종주(縱走) 배낭을 그럴싸한 온갖 것들로 가득 채워야 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배낭 속 잡동사니들을 버려야 했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어 갔다. 자연스럽다는 것! 원래 주어진 모양대로 왜곡하지 않는 것! 인위적으로 가미하거나 탈색하지 않는 것! 나는 이런 것들을 새로 배우기 시작했다. 그 배움의 터전이 나에게는 바로 지리산이었다.(‘지리산 리세팅’ 중에서)
스티브는 나에게 언젠가 나도 사라진다는 것을 넌지시 귀띔해 주었다. 이전에도 나는 내가 언젠가 마감을 맞이해 어디론가 사라진다는 것을 놓치지 않고 지내왔지만, 그가 나에게 마지막으로 전해 준 몇 마디는 작은 조약돌이 되어 내 마음에 잔잔한 물결을 다시 일으켰다. 그 파문 위에서 종이배를 탄 듯 내가 조용히 흔들리는 것을 느낀다. 내 마음이 항상 잠들지 않고 흔들리는 가운데 깨어 있기를 나는 기도한다. 훗날 내가 사라지고 나면 내가 머물던 자리는, 남겨진 누군가의 사랑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믿는다.(‘사랑이 하자는 대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