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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호관 이인상의 시와 산문, 서화의 정신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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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능호집' 상, 하

 

“이인상의 묘처는 기름진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담담한 데 있으며,
익은 맛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선한 맛에 있다.
오직 아는 자만이 이를 알리라.”
凌壺妙處 不在濃而在乎淡 不在熟而在乎生 惟知者知之「'능호필첩' 발문」

능호관(凌壺觀) 이인상(李麟祥, 1710~1760)은 18세기 초기와 중기에 활동한 문인화가(文人畵家)로, 일찍부터 미술사 연구자들에게 주목받아 왔다. 이인상은 뛰어난 화가이면서 동시에 시인이자 산문가였다. 그가 한국을 대표하는 걸출한 문인화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가 ‘문인이면서 화가’였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에서 그는 18세기의 저명한 화가들인 정선, 심사정, 김홍도와 구별된다. 이인상의 그림에는 여타 화가들과 달리 문기(文氣)가 가득하고, 그림의 제화(題畵) 또한 높은 운치를 보여준다. 이인상에게 문학과 예술은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인 그런 관계를 이룬다. 즉 ‘문자행위’는 ‘작화행위’(作畵行爲)의 기반이 되고, ‘작화행위’는 ‘문자행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능호집'(시 2권, 산문 2권)은 이인상이 작고한 지 19년째 되는 해인 1779년에 그의 벗들이 간행했다. 이인상이 작고한 직후에 먼저 벗 윤면동은 이인상의 시문을 수습하여 '능호집'의 초본이라 할 수 있는 '뇌상관고'(雷象觀藁)를 엮었는데, 현재 이 책은 이인상의 후손가에 전한다. 시고(詩藁)와 문고(文藁)가 각각 두 책으로, '능호집' 분량의 3배 이상이다. 윤면동은 초본의 글 중에서 주로 문예적 성취가 높은 작품 및 이인상의 고상한 사대부적 풍모와 엄정한 이념적 자세를 보여주는 것을 문집의 글로 뽑은 듯하다. 이런 기준 때문에 이인상 초년의 시들은 거의 다 배제되었다. 가령 여성적 정조가 담겨 있는 「죽지사」(竹枝詞), 「도소곡」(搗素曲) 등 악부시제(樂府詩題)의 의고시(擬古詩)는 모두 빠졌고, 「구담소기」(龜潭小記), 「관매기」(觀梅記) 등 특이한 형식의 산문 작품도 모두 배제되었다. 하지만 이 작품들은 청년기 이인상의 의식과 지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 책의 상권은 시 작품을 번역한 글을, 하권은 산문 작품을 번역한 글을 수록했다. 아울러 하권에는 1970년대 임창순 선생이 번역한 이인상 간찰을 부록으로 수록했다. 임창순 선생의 번역은 옛날 어투로 되어 있는데, 오늘날의 독자들이 이런 어투를 접하는 것도 신선한 경험이라 판단해서 그 어투를 바꾸지 않고 실었다. 또한 하권에는 별도의 소논문인 「능호관 이인상: 그 인간과 문학」을 수록하여 능호관 이인상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이 책의 번역자 박희병 교수는 1998년부터 '능호집'의 번역에 착수했다. 16년 이상 이 작업에 매진한 셈이다. 처음에 박 교수는 연암 박지원의 문학을 연구하면서 한 세대 위의 선배인 이인상에 주목하게 되었다.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지만, 당시 우리 학계에서 박지원을 보는 시좌(視座)는 대개 ‘아래에서 위의’ 방향으로 잡혀 있었다. 다시 말해 ‘근대’의 시각이 소급되어 들어와 있었다. 그래서 박 교수는 반대의 방향, 즉 ‘위에서 아래의’ 방향으로 박지원을 부감(俯瞰)하면 어떨까 하는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이인상에 대한 주목은 전적으로 이 때문이었다.

2000년 봄에 '능호집'의 번역은 1차 탈고되었다. 하지만 공부를 하다 보니 이인상의 문학이 그의 서화 작품과 불가분의 관계이며, 함께 연구되지 않으면 정확한 번역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박 교수는 잠시 '능호집' 번역을 내려두고 이인상 서화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인상의 후손가에서 받은 '뇌상관고'(雷象觀藁)는 이인상을 좀더 정확하게 읽어낼 수 있는 큰 이정표가 되어 주었다.

이 책은 능호관 이인상의 문집 초본 '뇌상관고', 그리고 그의 모든 서화작품의 제화와 화풍(畵風), 서풍(書風)을 연구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나온 '능호집'완역본이다.

이인상의 '능호집'은 아주 격조가 높고 진실된 글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그 이면을 흐르는 사상은 진부하고 시대착오적인 이념이었다. 이인상은 청나라를 원수로 여기며 ‘존명배청’(尊明排淸) ‘존주대의’(尊周大義)의 이념을 평생 견지했다. 비단 이인상만이 아니라 그와 함께했던 ‘단호그룹’의 벗들 모두가 존명배청의 이념을 지니고 있었으며, 춘추의리에 투철했다. ‘단호그룹’은, 단릉 이윤영과 능호관 이인상을 중심으로 하는 문인ㆍ지식인 집단을 지칭하는 말이다.
하지만, 소설가 이병주(李炳注)가 '관부연락선'에서 설파하고 있듯, “인간의 집념, 인간의 위대함, 인간의 특질”은 “아나크로니즘(시대착오적 이념)을 통해서 더욱 명료하게, 보다 빛나게 나타나는” 법이다.
이인상의 시대인 18세기 전반기에 청나라는 안정과 번영을 구가했다. 조선은 17세기 중반에 틀이 짜여진 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에 잘 적응하고 있었다. 이제 조선의 관료나 지식인 중에는 변화된 현실을 인정하면서 이미 먼 과거사가 된 병자호란의 치욕은 잊어버리고 현실주의적 태도로 청나라와 관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이 같은 대청(對淸) 인식의 변화는 18세기 후반에 북학파(北學派)가 등장하기 이전부터 야기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시간이 흐를수록 이인상과 단호그룹은 현실로부터 점점 고립되어 갔다. 이인상이, “말을 하면 사람들이 개 짖듯 여긴다”(發言謂我吠)라고 한 것은 이런 상황을 반영한다.
이인상과 단호그룹의 인물들이 대명의리를 고수한 것은 퍽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이인상이 죽는 순간까지 이념을 고수하지 않았다면 필시 ‘이인상’은 없었을 터이다. 즉 그의 맑고 깨끗하기 그지없는 언어들, 도저한 독립불구(獨立不懼)의 면모, 예술가로서의 비타협적인 자세, 지식인에게 생명과도 같은 ‘불화’(不和)의 정신은 끝내 문학사와 예술사에 전해지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부정적인 데서 긍정적인 것이 나오고, 빛나는 성취의 근저에 부정적인 것이 자리하고 있다는 역설이 성립된다. 이것이 인간이고, 우리의 생이고, 문학이고, 예술이다.

이인상은 서얼이다. 서얼은 사대부의 일부로 간주되기도 하나, ‘중서’(中庶)로 통칭되곤 했던 데서 알 수 있듯 사대부와 구별되기도 했다. 서얼 스스로에게도 사대부라는 자의식과 함께 사대부로서 행세하지 못하는 불우한 존재라는 자의식이 대체로 공존했다.
이인상의 시대에 활동한 서얼 문인들 가운데 서얼적 자의식의 문학적 외화(外化)를 가장 문제적으로 성취한 작가는 이인상의 벗 이봉환이다. 이봉환은 서얼의 시체(詩體)라고 평가되는 ‘초림체’(椒林體)를 창안했다. 초림체의 특징은, “괴벽하고 기괴하여 마치 귀신이 울고 도깨비가 웃는 듯하다”고 하며, “아마도 서얼들의 억울한 기운이 그 괴이한 빛을 솟구치게 한 것이 아닌가 한다”라고 추정하기도 했다. 이명계(李命啓), 남옥(南玉) 등 이봉환의 벗들은 모두 이 시풍을 좇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인상이 이봉환과 인척관계이면서 친했다는 점 때문에 선행 연구에서는 이인상의 문학을 초림체의 서얼 문학으로 보았다. 하지만, 이인상의 시풍은 이봉환의 초림체와는 완연히 다르다. 이봉환의 시에서는 서얼로서의 신세를 한탄하는 소리라든가 불우한 처지를 비관하는 소리가 자주 발견된다. 이인상의 시는 이와 다르며, 비록 시대와 세상에 대한 고심이 종종 표출되어 있기는 해도, 맑고 격조가 높다.
왜냐하면 이인상의 문학에는 그 밑바닥에 춘추대의의 이념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이념성’과 ‘명분’이 다른 이들과 구분되는 이인상 문학의 특징을 만들었다. 이인상의 이런 자아의 면모는 그의 문학과 예술을 떠받치고 규정하는 근저가 된다. 이 점에 유의하지 않고서는 그의 문학과 예술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이인상은 서얼이기 때문이 아니라 서얼이지만 사대부였기 때문에 문제적인 작가이다.

이 책 하권 말미에는 단순히 이 책의 ‘해제’라고 부르기 어려운 글 한 편이 수록되어 있다. 제목은 「능호관 이인상: 그 인간과 문학」. 이 글을 통해 박희병 교수는 이인상의 가계, 생애, 교우, 생애와 사상, 그리고 시문의 특징, '능호집'의 한계 등 그야말로 능호관 이인상에 대한 소책자 한 권을 꾸린 셈이다. 그동안 잘못 알려진 이인상의 생애 부분도 이 글을 통해 바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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